높이 오른 자의 허무

니체 읽기(13), 지혜로운 대인관계에 대하여, 10월 18일 단상

by 김요섭


'무서운 것은 산꼭대기가 아니라 비탈이다! 눈길은 아래쪽으로 급전직하하고 손은 위를 향하여 내뻗는 비탈. 여기서 마음은 자신의 이중의 의지 때문에 현기증을 일으킨다' -니체



산비탈의 위험


그의 허무는 정상 이후, 그를 기다린 반대편 절벽이다. 언제일지도 모를 또 다른 정상을 기약하며, 8천 미터를 내려가야 한다. 다시 오를 수 있을지 생각하면 머리가 새하야질 정도로 아득할 뿐이다.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다시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 크다. 얼어버린 발가락은 감각을 잃은 지 오래다. 의사는 분명 다음은 불가능하다고 말할 것이다. 신경이 망가져 검게 질린 부분은 절단해야 한다며, 근엄한 표정으로 말할지도 모른다. 점점 뻣뻣하게 굳어가는 관절은 말을 듣지 않는다. 무엇보다 노쇠한 육체의 빛은 이미 흐려지고 있다.


도전이 오직 자신의 문제라면 혹시 또 모른다. 7천 미터 이상, 극한의 날씨는 인간의 의지만으로 돌파 가능한 것이 아니다. 팀을 꾸리고 엄청난 비용을 들여 다시 한번 모험을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이 많아지며 집중력이 흩어진다.

순간 그는 중심을 잃는다. 비탈을 몇 바퀴 구르다가 로프에 걸린 줄이 그의 배를 당긴다. 대원들의 로프가 팽팽하게 당겨지며 하중이 걸린다. 아이젠이 심하게 미끄러지며 돌을 긁는 소리를 낸다. 겨우 멈추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든다. 멀어지는 정상만큼 그는 점점 불가능으로 내몰린다.


한 낮임에도 시야를 잃을 정도로 눈이 쏟아진다. 불안은 이제 그의 몸을 옥죄기 시작한다. 그의 의지는 정상을 정복했을 때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멈출 기미가 없는 눈발은 점점 강해진다. 두꺼운 패딩 사이로 한기가 침습하기 시작한다. 앞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도 위험하고, 가만히 멈춰있는 것은 더욱 위험하다.


그는 미로에 갇혔다. 사정없이 쏟아지는 폭설에 힘은 점점 빠진다. 오히려 여기서 죽으면 편할 것이다. 문득 사나운 눈보라에 복종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에베레스트에서 마감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 때쯤, 그는 발을 헛디디고 말았다. 앞으로 고꾸라지며 자신의 아이젠에 그만 로프가 잘리고 말았다. 그는 비명을 지를 틈도 없이 크레바스로 내동댕이 쳐진다. 날카로운 통증이 지나간다. 그의 검은 선글라스 위로 하얀 눈이 소복하게 덮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그는 눈을 떴다. 눈보라도 없는 짙은 어둠만 있을 뿐이다. 이곳이 어디인지 도대체 감각되지 않는다. 정상을 올랐던 것이 맞는지도 불분명하다. 그는 한동안 멍하니 있다가 갑자기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젓는다. '아직 도전은 끝나지 않았어.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면 모험은 완성되지 못해. 절대 이대로 죽을 수 없어' 그는 몸을 일으킨다. 통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 신기하다. 혹시 이번에는 발가락만 자르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살아나가야 하는 것만 생각해야 한다. 정상에 오른 환희를 무의미하게 만들 수 없다. 그는 여러 번 되뇌며, 미로의 바깥을 찾는다.


'눈길은 높은 곳으로 치솟아 올라가고 내 손은 심연을 붙든 채 그 위에 몸을 지탱하고자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이것이 나의 비탈이며 나의 위험이다'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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