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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마레 Jul 10. 2024

엄마는 내 나이 때 뭐 했어?

배우가 찍고 쓰는 단편영화이야기

씬으로 읽는 단편영화


아홉수





이 영화의 첫 제목은, 

달팽이였다.


최종본에 아홉수로 바뀌었지만.


아마도 감독은

스물아홉 취준생 혜진이

달팽이처럼 느리지만 

제 길을 찾아가는 청춘의 모습을 

담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런 딸 혜진을 지켜보며 응원하는 

엄마였다.


대본리딩
<단편영화 아홉수 중에서>




이 영화는

스물아홉 취준생 혜진이

 면접을 본 날부터

불합격 통보를 받고도

엄마에게는 차마 털어놓지 못하던

그 여러 날을 담은

아홉수에 관한 이야기다.




아홉수, 참 힘들다.


엄마는 내 나이 때 뭐 했어?


딸은 궁금했다.

엄마는 내 나이 때 뭘 했을까.

자신처럼 답답했을까.

아니면....


되돌아온 답은

'널 낳았지' 


미처 몰랐던 

엄마의 스물아홉 시절까지

전해 듣는다.


씬 5의 대본을 들여다보자.



#5. 카페 / D  


  혜진과 엄마는 카페에 앉아있다.

혜진  (커피를 마시고) 엄마 거보다 맛있는데?

엄마  얘는 요리도 하면서 입맛이 형편없냐?

 (커피를 마신다)

혜진  어우, 농담이야 농담.

엄마  맛있긴 하네. 커피 뭐 쓴 거지?

혜진  근데, 갑자기 왜 왔어?

엄마  밥은 잘 챙겨 먹어?

혜진  나이가 몇 살인데. 밥은 먹지.

엄마  결과 발표는?

혜진  아직 안 나왔어. 


  혜진은 무심한 듯 디저트를 먹는다. 

엄마 눈에는 혜진의 표정이 좋지 않다.


엄마  (측은한 표정으로) 너무 신경 쓰지는 마.

혜진  (입가를 닦으며) 

엄마는 처음부터 카페 한 거야? 

내 나이 때 뭐 했어?

엄마  스물아홉이면... 너 낳았지. 

그전엔 노래한다고 밴드연습하고 그랬는데.

혜진  그래? 노래 좀 했나 보네?

엄마  그냥 하고만 싶었던 거야. 

기타는 늘지도 않더라. (커피를 마신다)

혜진  가만 보면 어른들은 대단해. 

그 나이에 가정도 꾸리고, 돈도 벌고. 

난 아직 애 같은데.

엄마  예전이나 그랬지. 

요즘은 너도 젊은 거야.

혜진  근데 다들 나보다 어른 같고 

잘 나가더라.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본다. 

한숨을 쉬는 혜진.


엄마  땅 꺼지겠다.

혜진  난 뭐 해 먹고살지? 

이게 맞나 싶기도 하고.

엄마  하고 싶은 거 해.

혜진하고 싶은 게 딱히 없는 것 같아.

엄마  너 재밌어하는 건 있잖아.

혜진  재밌는 건 있긴 하지.

엄마  재밌는 거 해. 

나는 직업은 평생 가니까 

무조건 본인이 재밌어야 된다고 봐.

혜진  그런가.


<#5 대본 중에서>



혜진은 거짓말을 했다.

이번에도 떨어졌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스물아홉.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

자존감 바닥.


속상해할 엄마까지 어찌 감당하랴.


엄마는 내 나이 때 뭐 했어?


'어른들은 대단해'라는

 혜진의 말속에는

엄마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담겼다.


이 대사를 곱씹으며,

나는 나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나도 역시 그런 생각을 한다.


스물아홉이 아니라

쉰아홉을 겨우 두 해 남겨 둔

지금 이 나이에도 문득문득.


엄마는 내 나이 때 뭐 했어?


지금 내 나이 때 나의 엄마도 

지금의 나와 같았을까.


곱씹을수록

참 대단하셨네 우리 엄마.



2021년도 5월 29일.

이 영화를 찍은 지

벌써 3년.


 연기를 시작하고 출연한

두 번째 단편영화다.


첫 번째 영화의 촬영일이

같은 해 5월 8일 어버이날이었으니.

아무래도

엄마라는 배역과 인연이 깊은가 보다.


한번 봐줄래?


궁금했다 어떻게 볼지.

오랜 지인이 이 영화를 보고 

나에게 해준 얘기는 이거였다.


'누나는 눈빛이 너무 맑아.

엄마들은 안 그래'


그럴지도,

난 엄마가 되어 본 적이 없으니까.


엄마의 눈빛은 어떨까.


결혼을 하고 남편이 되고

아빠가 된 녀석이 해 준 말이니

더구나 영상쟁이니 허투루 한 말은 

아닐 거고.. 그리 듣고 보아하지 

또 그런 듯도 싶다.


엄마역을 할 때마다

후배 녀석의 그 말을 떠올린다.


여전히 나에게는 숙제다.


<인스타그램 스토리에 올렸던 촬영현장, 코로나19 시절이라 모두 마스크를 썼다>



엄마는 내 나이 때 뭐 했어?


열아홉, 스물아홉,

서른아홉, 마흔아홉.


어찌어찌

지나갔다.


이제

쉰아홉. 예순아홉....


어디 나뿐이랴

 헉헉대며

 지나야 할 인생의 아홉수는

혜진에게도

혜진의 엄마에게도 

 여전히 남아있다. 


결국에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떨리는 목소리로 전하던

불합격 소식.


그걸 보면서

재밌는 거 해봐.

하던 엄마인 나의 말을 떠올려 주길.


재미있어하던

요리를 혜진이 다시 시작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한다.


 감독은 그런 바람을 갖도록

영화 내내 심어 놓았다.


혜진의 휴대폰 속 음식 사진,

책꽂이 사이사이 놓인 요리책.


감독은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나 보다.


느리더라도

힘을 내서 가자고.


처음 이 영화의 

제목이 달팽이였던 것처럼.


그래서 결국엔 제목으로 정한

'아홉수'를 건너가자고.


오랜만에 노트북 폴더 안에 잠들어 있던

이 영화를 깨우니 짐짓 나에게도 말을 건다.


느리더라도 마침내는

넘어갑니다, 모든 아홉수.


<엔딩크레딧>



아홉수 (Fiction/Color/12'13"/2021)

각본/연출: 유정명

출연: 이은송, 구가람, 장마레, 이예린

같이 만든 사람들: 김옥건, 송경현, 김철진, 우희용, 유인성, 황혜영



달팽이 같은

끈기로

모든 아홉수를 가뿐히 넘어가실 

유정명감독의 

영화로운 시절을

응원합니다.




배우가 찍고 쓰는 단편영화이야기


'100명의 마레가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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