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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utiPo Mar 08. 2018

[Part3] 스물아홉의 수험생, 수능시험을 보다  

[Part 3 : 행복하지만 불안한, 퇴사 이후의 삶]

2017.11.23(목) / 회사를 떠나고 308일 후.


수능시험을 무사히 마쳤다. 원래대로라면 1주일 전 11월 16일에 치렀어야 할 시험이었다.


수능 전날 지진이 심하게 일어나면서 갑작스럽게 시험이 1주일 연기되었다. 세상에, 수능시험이 연기된 것도 머리털 나고 처음 보는 광경인데, 하필이면 10년 만에 수능을 다시 보는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1주일 전 수능시험 날짜 연기가 발표되던 날, 저녁 7시나 8시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도시락으로 싸갈 죽을 주문해놓고 홀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수능시험이 연기되었다는 뉴스가 떴다. 안전을 생각하면 참 다행이다 싶으면서도, 당황스럽고 황당하고 믿기지가 않아서 인터넷 뉴스를 계속 새로고침했다.


시험이 끝나면 놀러가겠다고 휴가를 냈던 남자친구는 급히 다음날의 휴가를 취소했다. 나는 포장한 죽을 냉장고에 대충 넣어놓고, 그 길로 나가서 남자친구와 소주를 한 잔 했다.


그날 밤에는, 수능시험이 정상적으로 치러지는데 나 혼자만 시험을 보러 가지 못하는 꿈을 꾸었다. 꿈 속에서 한참을 헤매다가, 본래는 수학시험을 보고 있어야 할 시간 즈음 느지막히 일어나 어제 사온 죽을 데워서 후루룩 먹어버렸다.




뜻밖에 얻게 된 일주일 동안에는 아무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진짜 수능날이 금방 돌아왔다. 도시락으로 가져갈 죽을 또 샀고, 간식으로 먹을 사탕과 물과 커피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시험장에 갔다. 그런데 우습게도, 먹을 것을 그렇게 많이 챙기고서 정작 수저를 챙기지 않아서 나는 교무실에서 나무젓가락을 얻어다가 겨우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시험은 순식간에 끝나 버렸다. 나와 함께 시험장을 나오는 열아홉살 수험생들이 와글와글 떠들었다.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홀가분한 얼굴과 들뜬 목소리로, 신나게 놀 계획에 부풀어있는 그 아이들이 귀여워 보였다.


나도 10년 전에는 저렇게 행복했겠지? 이제부터 고생 끝 행복 시작인 줄로만 알았겠지?


이제와서 지난 10년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수능시험이 끝나고 성인이 되던 그 순간은,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을 끝내고 본게임을 시작하는 순간일 뿐이었다. 진짜 게임 시작, 더 큰 고생의 시작.




시험이 끝나고 남자친구가 나를 데리러 왔다. 저녁으로 뭘 먹고싶냐는 남자친구의 물음에 나는 뜨끈한 국물이 먹고싶다고 답했다. 머릿속에 맛집 지도가 들어있는 남자친구는, 근처에 유명한 아구지리탕 집으로 향했다.


정말 시원하고 깨끗한 맛이었다. 하루종일 뒷목을 뻐근하게 하던 날카로운 긴장이 전부 탁 풀리는 그런 맛. 안주가 좋으니 청하도 한 병 곁들였다.


그러다가 갑자기 이 상황이 너무 웃겨서 막 웃었다. 나랑 같이 시험을 치른 애기들은 파스타나 스테이크 같은 팬시한 음식을 먹으러 갔을텐데. 나는 늙은 수험생이라 이런 뜨끈하고 시원한 지리에 청하를 먹고 있구나.


10년만에 다시 본 수능시험. 정말 오랜만에 느낀 코 끝 시리는 추위와 그보다 더 시린 긴장감. 앳된 얼굴의 고등학생들 사이에 앉아있는 동안의 어색함과 부끄러움. 앳되지 않은 내 얼굴을 보고 의아해하는 감독관 선생님들의 눈빛. 그리고 따뜻한 아구지리탕과 깔끔한 청하의 조화.


나는 오늘의 저녁식사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알코올의 기운이 약간 오른 알딸딸한 상태로 가채점을 했다. 다행히 내게 필요한 만큼의 점수는 나온 것 같다. 성적표가 나오고 원서접수를 할 때까지는 복잡한 생각을 접어두고 조금 쉬고 싶다.






취준생부터 퇴사 이후 새출발까지, <나의 똥같은 날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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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 0 : D-Day, 회사를 나서다 (☞ 첫 글 보기)
Part 1 : 취업 준비  (☞ 첫 글 보기)
Part 2 : 직장 생활  (☞ 첫 글 보기)
Part 3 : 퇴사 이후  (☞ 첫 글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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