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시시각각 머리카락처럼 변하는, 사랑

다채로운 색의 사랑과 하루 0.2mm만큼의 이별

by 졔졔

인간에 의한 구원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결국 모든 구원은 인간이 매개가 되지 않고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나는 그의 존재로, 그와 함께한 6년 간의 시간으로 체득했다. 그를 만났을 무렵은 내 인생이 무저갱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던 시기였다. 지금에서야 생각했을 때 그때의 내가 참 어렸고 여전히 씩씩하지 못할 이유가 없는 나이와 상황이지만, 그 당시는 마음과 몸이 지금껏 그 어느 때보다 늙고 가난하게 여겨지던 때였다. 잔뜩 지쳐있고 끝이 무거운, 마음의 상태를 대변하는 듯한 까만 머리카락에 나는 그 어떤 것도 할 기운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매번 친구들이 '머리카락 가지고 장난치지 말라고 했지.'라고 얘기했던 날들은 모두 옛이야기가 된 것 같았다. 원형탈모를 겪으면서는 머리카락에 어떤 것을 해도 안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더 이상 비옥한 토양같이 튼튼하던 두피는 존재하지 않고, 쇠락한 도시의 부스러져 내리는 성벽과 같이 쇠퇴하고 메마른 두피만 남았다 느꼈다. 두피는 모르겠고 실로 내 마음의 상태는 그러했던 시기, 그가 내 옆에 있었다.


그는 성마르게 모든 것을 다시 세워 올리기보다는, 모든 것이 무너진 상태의 나를 애정으로 바라봐주었다. 그도 괴로웠을 것이다. 다른 남자와의 관계에서 임신과 임신 중단을 경험하고 모든 것이 시들어버린 상태로 그 옆에 있는 내 모습을 보는 것이. 무슨 생각이었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내 옆에 있었다. 채근하지 않았다. 그런 그로 인해 나는 연인이라던가, 사랑이라던가 하는 단어들에 일말의 기대와 신뢰를 놓지 않을 수 있었다. 겨울, 봄, 여름, 가을, 다시 겨울. 5번의 계절이 지났지만 늘 겨울을 살았다. 유독 시리고 혹독했던 마음과 영혼의 겨울이 지나고, 조심스러운 생동감이 얼어붙었던 웃음과 기쁨을 녹여도 되냐고 묻는 듯한 봄을 함께 맞았다. 곧 뜨겁고 숨 막히는 여름이 왔다. 높은 온도가 끓게 만든 마음의 주전자가 더 이상 참지 못한 소리가 새어 나와 서로를 향해 꽂혀 들었다.


"사랑해"


어둠이 걷혔다. 사랑이, 사랑과 함께 한 시간이, 그리고 스테로이드 연고가 몸과 마음과 영혼과 두피 모두를 이제야 건강하게 만들었다고 느꼈다. 극동 아시안으로서 머리카락이 까만 것은 유전적으로 상당히 자연스러운 일임에도 까만 머리에서도 벗어나고 싶어졌다. 머리카락에 인이 박혔을 괴로운 기억들과 모든 더께가 쌓여 머리가 지나치게 까매진 것 같았다. 너무 어두웠다. 이제 그만 어둡자. 머리를 전체 탈색했다. 그렇게 탈색모 시절이 시작되었다.


모두가 그렇듯(?) 탈색모 라이프의 처음은 당연히 순정으로 시작한다. 여기서의 순정이 순한 맛, 혹은 고결하고 때 묻지 않은 무언가를 뜻하면 너무 좋겠지만 탈색의 세계는 호락호락한 것이 아니다. 탈색제를 바르고 열을 가하는 작업을 두세 번 반복하다 보면 두피가 구워지는 느낌과 함께 탈색 순정 컬러, 즉 '양아치 옐로우'가 발색된다. PANTONE 123 PC (C:0 M:21 Y:88 K:0)로 추정되는 양아치 옐로우는 나같이 참는 것에 인이 박힌 사람들이 원래 탈색은 따가운 것이려니 하고 버티다 보면 나오는 컬러인데, 컬러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너무 참다 보면 양아치 옐로우와 함께 타버린 두피에서 진물도 난다. 껍질이 벗겨진 소나무가 되는 기분이다. 송진이 줄줄 흘러내리는 두피와 함께 얻을 수 있는 이것. 이것이 탈색 후의 순정 머리색이다. 극동 아시안을 칙칙하게 보이게 만드는 근본 없는 컬러라고 하는데 나는 일단 팬톤 칩에도 있을 고오급진 컬러라고 우겨본다. 내가 했었던 머리 색이니까. 우김 실패. 가을 웜톤의 얼굴이 둥둥 뜬다. 껍질 벗겨진 소나무 위에 볏단을 얹은 것 같이 된다. 그래도 아무렴 좋다. 이전에도 브라운이나 오렌지 계열로 염색을 하고, 염색한 머리가 해를 너무 많이 받아 색이 날아가면서 더 밝은 머리 색이 된 적도 있지만 이들은 고집이 세다. 다른 컬러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양아치 옐로우야말로 다른 색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기를 희생하고 다른 색이 돋보이도록 하는 모든 컬러 플레이의 조상이자 시발이 된다. 그러니 양아치라고 하기보다는 군자 옐로우라고 부르는 편을 제안해본다.


IMG_3748 복사본 2.JPG 이것이 군자 옐로우이다. 군자는 등나무 소파 등받이와도 잘 어울린다. 겸손한 군자 옐로우.


군자 옐로우가 '양아치 옐로우'로 악명이 높아지며 탈색 후 바로 염색을 하는 이들도 적잖겠지만, 군자 옐로우도 그 자체로 플레이할 가치가 충분히 있는 엄연한 컬러이다. 나에게도 군자 옐로우, 아니 팬톤123PC는 새로 기지개를 켜는 삶의 의욕에 활기와 응원을 불어넣기 충분히 따뜻한 색이었다. 하지만 쭉 군자 옐로우를 고집하기에, 나는 사랑에 빠진 사람이었다. 그와 함께 사랑했던 6년 간의 세상은 훨씬 다채로웠다. 영화 <무드 인디고>에서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져 행복에 겨워하던 때나, <라라 랜드>에서 세바스찬과 미아가 서로에 반해 춤추던 날의 풍경처럼 그때의 연애도 비비드하고 컬러풀했다.


<무드 인디고>, 미셸 공드리
maxresdefault.jpg?type=w800 <라라 랜드>, 데미안 셔젤


내겐 미셸 공드리나 데미안 셔젤이 없으므로 온 세상이 비비드한 이 감정을 한껏 머리 색으로 표현했다. 군자 옐로우를 시작으로 레드, 핫핑크, 그리고 핫핑크에서 물이 빠진 연핑크, 그레이, 애쉬 퍼플, 애쉬 블루 등 다양한 머리 색을 시도했다. 당시 나는 창업을 한다고 열심은 부렸지만 돈이 없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여러 머리카락 색을 시도할 수 있었던 일등공신이 있었으니, 그것은 셀프 염색이었다. 말이 좋아 셀프 염색이지, 스스로 염색약만 구매했을 뿐 나머지는 연인이 해준 연인 염색이었다. 부모님 집에서 독립하기 전엔 모-호텔 침구에 묻히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독립한 후에는 집에서 침구에 염모가 묻어도 좋다는 안도감 속에서, 연인의 미용실은 개장하곤 했다.


그가 내 전속 미용사가 되길 처음부터 자처한 것은 아니었다. 망해도 좋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처음 염색을 부탁했을 때 그는 화들짝 놀라며 어이없어했다. 망하면 어떻게 하냔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런 그에게 망해도 좋다고 했다. 사실 바랐던 것은 완벽하게 원하는 색을 뽑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 머리카락을 사랑을 담아 조심스레 만져주는 시간이었으니까.


염모제를 고루 바르기 위해서는 촘촘한 빗으로 빗어가며 염색약을 발라줘야 한다. 탈색된 머리카락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어 빗질이 잘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굵은 빗으로 미리 머리를 빗지 않고서는 오버 조금 보태서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는 정성스레 초벌 빗질부터 해주었다. 길고 잘 엉키는 머리카락을 억지로 당겨 아프지 않도록 끝에서부터 머리칼을 쥐고 빗어 내리곤 했다. 그의 조심스러운 손놀림에서 나를 소중히 여겨지는 마음이 전달되어 기뻤다. 머리칼을 다 빗어내고 나면 귀에 물이 들지 않도록 정성스레 귀에 비닐을 씌워줬다. 염모제를 섞어 가장 아래 깊은 곳의 머리카락부터 꼼꼼히 바르기 시작하는 것이나 섹션을 나누어 당장 염모제를 바르지 않은 바깥쪽의 머리카락을 위로 넘겨 고정해주는 손놀림 하나하나가 서툴렀다. 그래서 더 좋았다. 그의 손이 서투른 시간만큼 그의 손은 내 머리에 더 길게 머물렀고 더 길어진 염색 시간은 나를 더 충만하게 했다.


온갖 색이 넘실대던 시절, 세상은 찬란했고 그 중심엔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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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핑크핑크한 류의 머리가 많았지.


물론 늘 찬란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머리카락은 우리의 관계처럼 시시각각 변했다. 일례로 양아치 옐로우는 마주하고 싶지 않아도 계속 마주쳐야만 했던 색이었다. 그가 사랑을 듬뿍 담아 덧칠한 핑크와 레드는 시간이 지나면 퇴색되었다. 아무리 보색 샴푸로 그 시기를 늦추려 해도 결국엔 퇴색되었다. 어떤 색을 위에 덧씌워도 밝기의 정도나, 얼룩의 정도, 톤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염색 물이 빠지면서 다시 드러나는 색이었으니까. 할 수 있는 것은 영영 그 모든 것이 퇴색되기 전 새로운 색으로 머리를 물들이는 것뿐이었다. 서로에 무뎌지기 전 서로를 보듬는 노력뿐이었다. 6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어떤 날은 더 사랑하고 어떤 날은 덜 사랑하되 영영 사랑하지 않게 되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뿐이었던가? 자주 마주쳐야 했던 색은 양아치 옐로뿐은 아니었다. 어떤 날은 흐리거나 먹구름이 드리우는 것 같은 날도 있었다. 탈색모 기간 동안 조금만 게을리하면 어디선가 스멀스멀 까만 머리가 다시 고개를 들어 정수리를 중심으로 퍼져나가 머리 꼭대기에 까만 뚜껑을 만들곤 했다. 처음엔 페트병 뚜껑만 하다가, 전기 포트 뚜껑만 해졌고, 게을러서 미용실 찾기가 귀찮은 땐 밥솥 뚜껑만 해지기도 했고, 어떤 날엔 게으름에 돈 없음이 겹쳐 화이바만해지곤 했다. 그 상태에서 머리를 넘겨 묶으면 뒤집어진 양말처럼 까만 부분이 블랙홀처럼 탈색된 부분을 삼켜버리는 것도 예사였다. 우리도 사랑으로, 그리고 얕은 속임수로 우리의 본질인 척했던 것들 역시 결국 만들어진 모습이었던 것을 목도하게 되는 날들이 있었다. 사랑을 얻기 위해 스스로도 속였지만 끝내 가릴 수 없었던 우리의 민낯과, 우리의 본질을 서로 마주쳤던 날에 우리는 종종 서로의 얼굴에 경멸의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 눈빛에 서로 상처를 주고받곤 했다. 깜깜한 날에 나를 구원했던 그이기에 나를 다시 심연으로 밀어 넣는 것 같은 날엔 더욱 고통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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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아치 옐로우와 까만 뚜껑은 덮어놓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지.


하지만 양아치 옐로우도 검은색도 핑크 핑크하고 레드 레드 한 우리 사랑의 색 중 일부였을 뿐이었다. 결국 그 모든 색이 모여서 우리 관계를 다채롭게 완성할 뿐이었다. 누군가 짚어준 몇 가지 사랑의 색이 담긴 컬러 팔레트가 아닌, RGB로 구현할 수 있는 모든 컬러를 담은 스펙트럼처럼 사랑했다. 많이 싸우고, 많이 울고, 많이 웃었다. 다양한 곳을 여행하며 맛집을 찾았고, 드라이브했고 나란히 걸었지만, 우리를 알아보는 동네 카페를 아지트 삼아 안온하게 서로에 기대 휴식하기도 했다. 연애 기간 동안 내 머리카락 색이 바뀌었던 만큼 그의 머리카락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내 닦달에 했을 그의 인생 최초 펌, 여느 때처럼 그의 머리를 쓰다듬다 원형 탈모 선배로서 심상히 여기지 않고 발견한 그의 초기 원형탈모, 늦깎이로 훈련소에 입대하기 하룻밤 전 애써 웃으며 그의 머리카락이 군인 머리로 밀려나가는 것을 함께 하던 대전의 한 미용실... 어떤 머리를 하고 있던 그 이유가 무엇이던 그를 깊이 사랑했다.


그런데도 끝이 났다.


사랑의 끝은 외려 드라마틱하거나 역동적이어서 그 변화를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는 머리 색의 변화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다만 머리 길이의 변화처럼 찾아왔다. 뜨거운 태양 볕 및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을 오래 맞은 머리카락처럼 우리도 우리를 둘러싼 환경에 지쳐버려, 머리카락의 성장 속도만큼 하루 0.2mm만큼씩 멀어졌나 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리는 끝이 갈라진 머리카락처럼 다시는 서로를 부둥켜안을 수 없는 관계가 되어 있었다. '아직 뿌리는 같으니까', '아직 완전히 떨어진 것은 아니니까' 생각하며 그와 나의 연결성을 놓지 않고 그 끝을 다시 붙여보려고 했지만 헛된 일이었다. 아니, 헛된 일인 줄 알면서도 붙여보려고 했다. 상한 머리카락을 복구해준다는 트리트먼트를 믿는 마음으로, 결국은 잘라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음을 알면서도. 늘 다정했던 그가 더 현명했다. 그는 상한 우리 관계의 끝을 잘라내는 것으로 그를, 그리고 나를 지켰다. 그 대가로 그는 나를, 나는 그를 잃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이별이 우리의 최선이었다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가락으로 머리카락과 두피를 쓸어 만져주면 노곤한 표정으로 미소 짓던 그가 종종 생각난다. 그를 생각해도 정말 아무렇지 않아 지려면 얼마나 걸릴까 아득하다가도 하루 0.2mm씩 이별과 가까워진 우리를 생각하며, 하루 0.2mm씩 그를 잊어가고 있을 테니 서두르지 말자고 체념하게 된다. 얼마나 더 걸릴까. 그는 이미 나를 잊은 듯하다. 나도 잊은 듯 지내다가도 오늘 같은 날이면 늘 머리가 빠르게 자라던 그가 얄밉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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