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통곡의 이별에도 안 자른 머리를 싹둑 잘랐다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무서울 수 있는 것도 모르고

by 졔졔

"아니, 나는 사실 그때 졔졔가 잘못될까 봐... 자살할까 봐 걱정됐어."


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었겠구나. 통곡의 이별에도 안 잘랐던 긴 머리를, 학교 다닐 때는 그렇게 하라고 그래도 들은 척도 안 하던 귀 밑 5센티로 자르고 몇 개월이 지난 뒤 들었던 이야기이다. 하긴 자르기만 했던가. 노랗거나 분홍색이거나 회색이거나 각종 색으로 물들였던 머리를 다른 색을 입힐 수 없게 검정에 가까운 갈색으로 진하게 물들이기까지 했다.


이유는 단 하나, 나이가 들어 보이기 위해서.


자랑은 아닌데, 어리고 예뻐 보이면 좋겠지만 나는 그냥 어려만 보이는 편이다. (안 어려 보여도 되니 예뻐만 보이고 싶은데) 원래 나이보다는 보통 6-7살 어리게 본다. 얼굴이 어려 보이는 게 맞나? 사실 얼굴이 어려 보이는 게 아니라, 내 생각에는 하고 다니는 스타일 내지는 꼬락서니 때문에 사람들이 내가 설마 3n 살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평소에는 잘 못 느끼는데 친구의 결혼식 같은 곳에 가면 정말 노란 머리카락을 한 사람은 나뿐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 깜짝 놀라곤 한다. 보통 혼주 되시는 신랑 신부의 모부님도 놀란다. '아...? 네가 졔졔니?' (학교 다닐 때 내 새끼가 너랑 다녔으면 당장 말렸을 거야...라는 말이 뒤에 곧 따라붙을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괜히 머쓱해진다. 한 가지 좋은 점이 있다. 결혼식에 늦은 친구가 어디냐고 묻는 말에 간단히 답할 수 있다. '신부 측 노란 뒤통수'


얼굴이 어려 보이는 것은 아니더라도 그게 돈이 없어 보이는 빈(貧)한 꼬라지 탓이던, 나잇값 하지 못하는 것 같은 스타일 탓이던 어려 보이는 것은 어쨌든 늙어 보이는 것보다는 기분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도 나는 나이가 들어 보이기 위해서 헤어 스타일을 바꾼 것이다. 늘 남들과 다른 편에 서있던 탓에 내 기준의 과감한 격정이 헤어스타일 변화를 통해 남들과 비슷하거나 같거나, 구분이 되지 않는 '파격적인 형태'로. 나를 아끼는 (것으로 추정되는) 회사 동료가 내 자살을 걱정하며 나를 유심히 살필 정도의 파격으로.


갑작스러운 심경의 변화는 그 며칠 전 일어났다.


내가 담당하는 한 프로젝트에 통역사가 필요해 통역사를 불렀다. 통역사를 섭외해놓고 두 개 이상의 프로젝트를 맡고 있었던 나는 한 층 아래에서 다른 일을 진행하고 있을 때 같이 일하는 회사 동료에게 SOS 메시지가 날아왔다. 통역사가 자꾸 통역해야 할 대상 - 영어 원어민이 아닌 아시아인들 - 의 영어를 까내리며 흉본다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통역 환경에 대해서도 계속 불평을 하며 일한다는 것이었다. 통역을 하기에 베스트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 원어민의 발음도 아니고, 통역 부스가 있는 것도 아니고, 나란히 여러 명이 함께 운영하며 진행해야 하는 라이브 송출 행사의 특성상 환경이 정신 사나웠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을 계속 표현하면서, 나와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전문성을 무시하며 자신이 생각하는 통역 환경이 '꼭' 주어져야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 것처럼 구는 부정적인 태도는 팀의 사기, 더 나아가 프로젝트의 성패를 가르는 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도 일의 전문성에 대해서 시시콜콜 우리를 흠잡고 얕잡는 말을 하고 있는 그야말로 프로의 태도라고 생각되진 않았다. 그는 다른 일들에 집중해야 하는 동료들의 주의를 흐트러뜨리고 있었다.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동료들과 통역사가 있는 곳에 가 지금 혹시 불편하신 것이 있는지를 여쭸다.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불평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자기 말을 자기가 들으며 다시 분노가 치솟는지 분노 조절에 실패한 것처럼 점점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나도 점점 불쾌감을 참을 수가 없었다. 불편한 상황인 것은 알겠으나, 우리가 이 시간 일을 해주 십사 하고 단기적으로 고용한 것이니 적어도 불쾌감을 사방팔방 뿌리며 일하진 말아달라고 했다.


갑자기 그는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했다. '이 무식한 여자랑 얘기하기 싫으니 (맞다... 내가 이 무식한 여자다...) 높은 사람 나오라고, 책임자 나오라고 소리치기 시작했다.' 옆 사무실, 옆 옆 사무실에서 사람들이 하나 둘 고개를 내밀어 구경을 오기 시작했다. 무안했다. 이 사람 뭐냐는 말에 내 직책을 말하니 더욱 화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책임자고 내가 당신이 지금 찾는 그 '높은' 사람이라고 얘기했지만 믿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머리 노오란 어린 여자가 '높은' 사람일 것이라는 상상은 아예 부재한 듯했다. 게다가 나는 코에 피어싱을 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그에게 좋은 빌미가 되었다. 코뚜레를 한 무식한 여자 (...)가 오랜 기간 통역을 해온 전문가에 대한 예우 없이 업무 방해(?)를 하고 있다며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대사에 잠깐 멍해졌다. 하지만 잊지 말자. 내가 업무를 요청한 사람이다. 업무가 제일 잘 되길 바라는 사람은 나라고!) 어떤 시스템 없는 회사가 아니고서야, 내가 낙하산이나 가족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책임자일 수 있냐고 한참을 소리쳤다. 결국 보다 못한 동료들이 나에게 자리를 피해있으라고 했고, 그 사람을 달래 보냈다.


분이 치밀어 올랐다. 오슬오슬 소름이 돋고 위 아랫니가 서로 딱딱 큰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몸서리가 쳐졌다. 내가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성이었어도 지금 이 상황이 벌어졌을까 생각해보았는데, 머리에 그려지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이가 조금 있어 보이는 남성 동료가 그 사람을 달래서 다가서자 그는 그 미친 듯한 분노를 빠르게 잠재웠기 때문이다. 그는 '높은 사람'으로 추정되는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남성이 등장하자 그에게 나를 이르듯이 얘기했다. 그 모든 논리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어색하고 정리되지 않는 말들을 뒤로한 채 끝까지 그가 하는 말들을 듣지 않고 자리를 피했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것은 머리가 노랗고 코뚜레를 한 여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의 모든 정성스러운 추측에 미안하게도, 나는 회사에서 일로 역량을 인정받은 이사였다.


그날의 일을 내 앞에서는 그 누구도 먼저 물어보거나 꺼내려하지 않았지만 공기를 통해 그 일이 암암리에 공중에서 회자되고 있다는 것은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더 어떤 일이 있던 것인지 설명하고 해명하고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것도 불쾌하고 괴로웠다. '내가 여자고 어려 보여서 그런 것 같아.'라는 이야기를 할 때마다 머리가 노랗고 코를 뚫은 내 잘못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이라고 시인하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나이 머리를 어둡게 하고 프로페셔널해 보이는 단발을 하기 위해 (왜인지는 몰라도 커리어우먼이라면 단발이니까!) 미용실을 찾았다.


그 결과, 이렇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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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니까 왼쪽이 원래 머리고, 오른쪽이 나름 제 나이를 찾기 위한 머리였는데...


응... 나도 안다.


머리가 잘 어울리고 아니고는 둘째라고 하고, 원래 목적 달성에 실패했다는 것은 자명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나 자신을 속이려 했지만, 다음 날 회사로 갔을 때의 주된 반응이 '어려 보인다' 였던 것을 보면 뱅이 문제였나. (물론... '높은' 사람에 대한 동료들의 사회생활이었을 수도 있다... 이 기회를 빌어 그때 혹시 그 말을 내뱉으며 자낳괴 다 된 스스로의 모습에 환멸을 느낀 동료가 있다면 다들 그렇게 산다고 위로하고 싶다.) 하여간 좀 더 띨구 같아 보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찰랑찰랑한 커리어 우먼 머리를 하기에는 매직을 하기에도 탈색했던 머리인지라 불가능했고, 그냥 지미유만 되었다.


안 하던 짓을 해서 괜히 누군가를 걱정하게 만들었던 내 급진적(?) 단발은 그렇게 실패했다. 나답지도 않은 일을 하려다가 실패까지 해버리면서 다시 곱씹게 되었다.


'아니, 내가 대체 외떼무내 일하는 맥락인데! 일이 아니라! 성과가 아니라! 일하는 태도가 아니라! 나의 전문성을 증명하고 일하는 존재로서 정당히 주장할 것들을 주장할 때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외모나 스타일을 고민하며 어차피 해도 안될 것을 미용실에 돈 쓰고 시간 써가면서 몸부림치고 있나! 일하는 자아가 모라고!!!! 겉모습이 뭐라고! 머리카락은 고유성이라고 주장하고 굳게 믿고 친구들보다 모르긴 몰라도 1천만 원 이상의 연봉은 포기하면서 자유로운 환경에서 일하고 있는 건데!!!!!!!! 친구들의 결혼식장에서 이정표가 되는 이 자랑스러운 나다운 뒤통수를!!!!! 왜! 나 자신을 지키고 주장하며 일에 매몰된 자아가 아닌 나로서 일하려고 했던, 내 존재를 이렇게 스스로 부정하게 만드나!!!!!!!!!!! 정말 그게 모라고 외때무네!!!!!!!!!!!!!!!!!!!!!!!! 그냥 일을 잘하고 머리도 노란 그 자체로, 코도 뚫고 업무도 문제없이 해내는 그 자체로 존재할 수 없는가!!!!!!!! 코를 뚫어서 코뚜레가 있던, 머리가 노랗던, 앞머리를 내리던 어쩌던 있는 그대로 어려 보이는 여자라도 '높은 사람'이라고 하면 좀 '높은 사람'인가 보다 하면 안 되나!!!!!!!!! 쁙이츤드,,,,,'


여전히 고민이 된다. 회사란, 아니 일이란, 내 노동력과 시간을 파는 것 그 이상을 나에게 요구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학교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았던 두발 제한은 사실 공기 중에 떠다니는 행인과 고용주와 하다못해 내가 고용한 사람들의 시선에 여전히, 늘, 평생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고유성과 밥벌이 사이에서 머리카락은 내 정수리 위에 달렸지만 자본의 것은 아닌지 의문을 품게 된다. 그렇다면 자본을 쳐줘라.


세상의 모든 쩐주들아. 용모를 원하는 대로 단정하게 만들어줬으면 하거든 거기에 대한 자본을 쳐줘라. 고작 시간을 사는 돈을 지불하는 주제에, 누군가의 인생과 삶과 고유성을 저당 잡은 것처럼 굴지 마라. 남의 돈 버는 게 쉬운 줄 아냐는 얘기로 타인이 자아를 팔게 하지 마라. 그리고 세상의 모든 꼰대들아. 외모를 전문성과 같은 영역에 두고 저울질할 생각 말아라. 코 뚫고 머리 노란 내가, 지금까지 내가 만난 너희 꼰대들 대부분보다 일 잘하고 똑똑하더라. 역량이 아니라 시간이 대신 쌓아준 권위로 타인의 외모를 들어 함부로 상대의 '높고 낮음'을 판단하지 말아라. 까분다고? 교만하다고? 미안하지만 나는 적어도 외모로 타인의 역량을 함부로 판단하지 않아야 된다는 점을 아는 것에선 너보다 똑똑한 것 같아, 앞선 말을 철회할 의지가 안 생긴다.


그리고 나 자신아. 다시는 외부의 편견이나 시선에 상처 받았다며 갑자기 자살할 사람처럼 안 하던 짓해서 다른 사람 놀라게 하지 말자. 네 몸을 오롯이 네 것으로 두자. 그 누구도 말로, 편견으로, 돈을 빌미로 너를 침탈하게 하지 말자. 노랗고 알록달록한 머리로, 그대로 존재함으로서 달달한 엿을 먹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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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사진: Photo by Markus Winkl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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