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반반으로 해주세요

어디로 가야 할지 정답이 없을 때

by 졔졔

전문가 같고 프로페셔널 해 보이는 머리(?)를 시도한 후 처참히 실패하고, 직전의 '안 하던 짓'이 무색하게 살던 대로 하고 싶은 머리를 하면서 살자는 생각으로 미용실을 찾았다.


"5:5 가르마를 타서, 반만 탈색해주세요."

얼굴에 있는 모든 안면근육을 활용해서 진짜냐고 묻는 뚱한 표정의 미용사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크루엘라 드빌처럼요."

미용사는 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니요, 그냥 해주세요. 제가 하고 싶어서요."


안다. 처음부터 당신이 권해서 하는 머리가 아니니까, 내가 원해서 하는 머리니까 당신의 권유는 중요하지 않다. 마음에 들지 않게 나와도 내가 감당해야 할 나의 몫이고, 마음에 잘 든다면 그것 역시 나의 선택이다. 얼레벌레 어떤 머리를 하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미용실 의자에 앉아서 '상담'이란 것을 통해 권하는 헤어스타일에 '아... 예...' 하면서 따라가는 것은 원래도 하지 않고, 이제는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바로 전 했던 머리의 반작용이 씨-게 온 것이다.


그깟 머리카락에 무슨 큰 의미를 부여하나 싶겠지만, 나에게 머리카락은 큰 의미이다. 가성비 높게 나 스스로를 타인과 구별해낼 수 있도록 마킹하는 행위이자 내면을 숨 막히게 하지 않도록 내 자아를 발현하는 창구이자 굴뚝이기도 하니까. 반반으로 머리 컬러를 다르게 하는 것은 당시 나의 상태를 제일 잘 반영하는 스타일이라고 생각했다. 노란 머리여서 받게 되는 여러 질문들과 편견, 그리고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은 무거운 까만 머리를 유지하는 것에서 오는 중압감 그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기 어려운 시기에 나는 서있었다. 실무형 이사로 누군가에게는 경영진 같아 보이지만, 결국에 고용된 것은 매 한 가지인 노동자라는 지점도 둘 다 내가 가지고 있는 양면적인 상태였다. 인생의 가치란 또 어떠한지. 사회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고 싶었고, 그렇게 살고 있다고 믿고 싶었지만 그 생각에만 안주하기에 나는 현실에 발 디디고 살아가야 하는 콩날두 (콩떡, 날라, 호두 우리 집 세 고양이)의 보호자이고 나 스스로를 먹여 살려야 하는 한 가정의 가장이다. 사회적 가치와 함께 재무적인 가치, 돈 역시 추구해야 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하다.


직장의 동료는 내가 '어드메'라는 말을 많이 쓴다고 했다. 그 말이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국어사전에 검색해봤다고도 했다. 그러고는 어드메는 어디를 옛 스럽게 일컫는 말, 어디를 일컫는 북한 말인 것을 알게 되었다며 내게 이야기했다. 그러게. 나는 어드메라는 말을 많이 쓴다. 점점 이도 저도 아닌, 선과 악,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싫은 것, 자본주의와 낭만주의, 공동체주의와 개인주의 사이 '어드메'에 스스로가 존재한다고 느낀다. 나에게 어드메는 어디이기도 하지만 '어디쯤에'에 좀 더 가까운 말이다. 어떤 것 하나를 들어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혹은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리고 이전에는 그랬던 것 같기도 하지만, 이 복잡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신과 확신은 점점 유예하게 되고 오직 그 사이 어디에서 부유하고 있는 나만 남는다고 느낀다. 논지가 명확할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던데 그런 점에서 내가 쓰는 모든 글이 졸글일 수밖에 없다는 사족 같은 생각도 따라온다. 그래도 어쩌나, 이게 지금의 나인데.


반반머리가 이 애매한 상황 속 지금의 나를 가장 잘 나타낸다고 생각해서 고심하고 온 미용실에서 그 머리를 권하지 않는다는 미용사와 잠시간의 실랑이를 벌인 끝에 미용사는 설득되었다. 설득이 됐다기보다는 체념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겠지. 미용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졔졔씨는 하고 싶은 건 다 해봐야 하는 것 같네요."라며 "사람이 하는 일인지라 칼 같은 반반은 어려울 수 있겠지만 최선을 다해볼게요."라는 말과 함께 탈색제를 준비했다. 나는 "네, 괜찮아요. 잘 부탁드려요."라고 사람 좋은 척 웃었다. 속으로 '탈색제도 반만 쓰고 시간도 반만 걸리는데 돈은 똑같이 받을 거면서 선심 쓰는 척까지 하네.'라고 생각했으면서도.


코로나19라서 미용실에서 제공되고는 하던 커피나, 녹차, 하다 못해 그 흔한 물 한 잔 없이 핸드폰 속 소셜 미디어의 시시껄렁한 예능 클립에 눈을 고정하고 얼마 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탈색이 끝났다. 후에 누군가는 '반반, 무 많이요'를 외친 치킨 같은 머리가, 누군가는 가수 'Sia' 머리 같다고 한 그것이, 누군가는 의도대로 크루엘라 같다고 한 그 머리가 내 것이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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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반, 치킨 무 많이요.


미용사가 건네주는 손거울을 들어 뒤통수를 비춰보고서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한 상태를 표현하고자 했는데 막상 해놓고 보니 똑 떨어지는 반반이 흑백논리 마니아 같단 생각이 잠깐 들었다. '워! 똑 떨어지는데! 그래! 나는 흑백논리 왕이다! 모든 것을 단순하게 생각하자! 이대로라면 오히려 명확하게 뭣이 중하고 뭣이 안 중헌지 구분 지을 수 있겠어!'는 꿈이고... 여전히 나는 노랑과 블랙, 인공과 자연, 천성과 후천, 성격과 선택, 도전과 안주, 자본과 가치, 코르셋 꽉 조인 외모 꾸미기와 내 몸이 가장 편한 상태로 두기, 일하는 자아와 일하지 않는 자아, 노동과 불로소득, 그리고 기타 등등의 것에서 하루에도 수 십 번씩 흔들린다. 어떤 날은 노란 선택을, 어떤 날은 까만 선택을 한다. 그래서 싫냐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검정과 노랑 하나를 선택하지 못하는 회색분자가 되었지만 (어렸을 때 나는 경멸조로 아빠한테 아빠는 회색분자 같아! 를 외친 적이 있었음에도) 이 둘의 멋짐과 짜침 둘 다를 이해하고 그때그때 나만의 밸런싱을 찾아가게 되는 지금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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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반이었던 머리는 시간 순으로 점점 어디까지가 노랑이었고 어디까지가 검정이었는지 그 경계가 희미해진다.


지금은 이 반반머리의 잔흔이 머리에 지저분하게 남아있다. 언제 반반이었나 싶게, 반반이었던 흔적은 찾기가 어렵다. 새로 자란 검은 머리들이 노랗던 영역을 차지했고, 영역을 내준 노란 머리들은 어제 일부를 잘라냈다. 미용실에서는 노란 부분에 대한 염색을 권하기도 했는데, 이 지저분한 상태를 유지하고 싶어 그냥 두었더니 예기치 못한 곳에 쏟아져버린 음료처럼 노란 부분이 오른쪽 머리 아래쪽만을 지키고 있다. 5:5였던 가르마를 바꾸어 헝클어 놓아 어디까지가 노란 머리였고, 어디부터 검정 머리인지 헷갈리게 흐트러 놓고 다니고 있다. 이 역시도 지금의 내 상태이다. 굳이 경계를 두지 않고, 이도 저도 아닌 나 자신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하고 있다. 흔들흔들, 덜컹덜컹, 마구 섞여 지저분한 상태가 지금의 나이다. 모든 것이 뒤섞인 상태, 혼란이 그득해 보이고 정리되지 않은 모습이어도 지금이 좋다. 끊임없이 흔들려야 고이지 않는다고 믿는다. 계속 가르마를 바꾸는 마음으로,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삐뚤빼뚤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믿는다.


반반의 경계가 뚜렷한 세상에서, 경계를 문지르고 종횡으로 누비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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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사진: Photo by Noah Boy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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