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 학교명이 두레학교에서 새음학교로 변경되었습니다.
하루에 일간, 서울, 조선 등 3종의 스포츠 신문을 모두 정독하여 찌라시성 정보가 아주 밝은 친구 녀석이 당구를 치다가 말을 꺼냈다. 머릿속으로 기억이 날 듯 말 듯 가물가물한 것을 기억해내는 순간 아이큐가 올라간다고 했다. 녀석의 말이라면,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해도 괜히 아닐 것 같은 생각이 먼저 들지만 가파른 하락 국면에 접어든 두뇌를 좀 돌려보곤 싶었다. 그래서 해본 것이 학창 시절 담임 선생님들 이름 기억하기였다.
처음에는 떠오르지 않던 이름들이 ㄱㄴㄷ부터 대입하며 뇌를 짜내다 보니 신기하게 한 명씩 기억이 되살아 났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하*희, 천*자, 손*자, 이*석, 한*순, 강*룡, 한*수, 강*자, 정*근, 전*희, 정*진. 그런데 어이없게 제일 가까운 고3 때 담임 선생님 이름이 기억나질 않았다. 졸업앨범을 보거나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금방 알 수 있지만, 맨들맨들하게 펴지고 있는 뇌를 돌리며 다시 주름지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온갖 기억법들을 다 동원하여 노력했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내 머릿속 1994년 고3 때의 저장공간에 무슨 일이 생겼던 걸까. 12타수 11안타도 훌륭한 거라 위안하며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거짓말처럼 정*봉 선생님의 이름이 떠올랐다. 아, 이런 느낌이구나. 나의 뇌 쥐어짜는 노력이 불쌍했던지, 그동안 끊어져 있던 뉴런의 시냅스들이 살아나서 고3 폴더에 다시 연결이 되었나 보다. 정말 아이큐가 0.5 정도 좋아진 기분이었다. 0.5 플러스면 이제 165.5쯤 되는건가.
이렇게 선생님들 이름까진 기억났는데, 선생님들과의 에피소드는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이건 기억을 쥐어짠다고 떠오를 것 같지도 않았다. 그냥 출석을 부르시던 모습, 성적표를 나눠주시던 모습, 사랑의 마음을 가득 담아 귀싸대기를 때리시던 모습 정도만이 떠올랐다. 한 반에 항상 5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있었으니, 난 n분의 1의 관심을 받는 게 당연했고, 그 평균을 뛰어넘으려면 어머니가 자주(?) 학교에 오셨어야 했는데, 울 어머니는 그러지 않으셨다. 6학년 담임 선생님은 방과 후에 15명 정도를 남겨서 별도로 공부를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15명 선정의 기준이 애매했다. 우열반도 아니었고 열등반도 아니었다. 굳이 따지면 어머니들이 학교에 많이 오는 아이들 위주였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차별이었다. 물론 난 그 15명에 속하지 않았다. 그런 시절이었다.
그래도 하나는 생각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내가 과한 장난을 쳐서 엄청나게 혼나야 할 일이 있었다. 선생님은 예상대로 방과 후 남으라고 하셨다. 난 속으로 죽었다를 복창하고 있었고, 방과 후 아무도 없는 교실에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고개를 들라고 해서 들었더니 선생님이 웃고 계셨다. 그리고 머리 한 번 쓰다듬어 주시고 날 데리고 나가시더니, 무려 떡볶이를 사주셨다. 물론 오뎅도 사주셨겠지만, 내 기억 속엔 떡볶이 표면을 감싸던 물엿에 비친 선생님의 미소만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이것이 지금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선생님들과의 개인적인 에피소드다.
대신 중고등학교 땐, 날 따로 찾아주시는 선생님들이 계셨다. 바로 체육 선생님들. 항상 학기초만 되면 체육 선생님이 날 부르셨다. 어떤 선생님은 날 보러 직접 교실로 찾아오기도 하셨다. 체육선생님들은 대부분 학생부 소속이셨고 미간은 본드로 붙여놓은 듯 구기고 다니셨다. 그런 체육 선생님들이 인상을 쓰며 교실문을 열고 "손창우가 누고? 니가? 체육실로 따라온나."하고 나가시면 아이들은 내가 담배피다가 걸리기라도 한 듯 불쌍하게 쳐다봤다.
체육실로 들어가는 순간부터는 항상 같은 그림이었다. 이 선생님들도 미간이 펴지시는 분들이었다. 환하게 웃으면서 "니가 영찬이 행님 아들이라매. 와, 일마 아부지랑 똑같이 생깄네. 느그 아버지 대단하셨다. 슨생님이 안부 전하더라고 꼭 말씀 드리래이. 무슨 일 있으면 선생님 찾아오고. 담배 같은건 피지 말고, 공부 열심히 해라이" 체육선생님들에게 울 아버지는 보스와 같았다. 이 또한 대단한 차별이어서 마음은 불편했지만, 지금도 담임선생님들보단 날 예뻐하신 체육선생님들만 기억에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12년 학창 시절 동안 담임선생님만 12분, 학과목 선생님까지 합치면 50여 명 이상의 선생님을 경험한다. 하지만 한 반에 50명씩이던 그 시절 학교를 다녔던 사람들은 대부분 나와 비슷할 것 같다. 겨우 생각나는 선생님과의 추억이 야단치지 않고 사주신 떡볶이 한 접시뿐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이나 스쿨 오브 락의 잭 블랙과 같은 선생님은 현실에선 만나기 힘들다. 우리의 학창 시절은 그랬다.
모든 부모들에게 자기 자식은 다 천재이지 않는가. 우리도 지우를 키우면서 퍼즐을 맞출 때 천재가 아닌가 생각했고, 줄넘기와 달리기의 안정적인 폼을 보고 올림픽에서 메달 몇 개는 딸 수 있는 운동 영재가 아닌가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모든 부모가 자식들 키우면서 느끼는 딱 그 정도의 감탄이었다. 우리가 감당 못할 영재의 행보는 확실히 아니었다.
지우의 어릴 때 가장 특이했던 점은 승부욕이 너무 강했다. 엄마 아빠는 승부욕이 하위 3프로에 들어갈 사람들인데, 우리 딸이 어떻게 이런 짐승 같은 승부욕을 가지고 태어났을까 의아했지만, 보스 할아버지를 떠올리니 모든 게 설명이 되었다. 가위바위보에서 지면 억울해서 30분을 울고, 윷놀이에서 윷이 나오지 않으면 한 시간을 부들부들 떨며 울었다. 난 왜 이렇게 못하냐고 울부짖고 화를 내며 울었다. 그래서 난 져도 괜찮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일부러 질 때마다 2등 했다고 오버해서 좋아했는데 별 효과는 없었다.
그러던 지우가 유치원에 간 이후론 많이 달라졌다. 좋게 말하면 부드러워졌고, 나쁘게 말하면 개성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처음 유치원 참여 수업에 갔을 때 난 약간 충격을 받았다. 집에선 항상 승부욕의 화신으로 왕 노릇을 하던 지우가 유치원에선 정말 조용한 아이였다. 마냥 신나서 떠들고 발표하고 웃는 다른 5살 아이들과는 달리 지우는 표정도 다소 경직되어 있었고, 율동도 소극적으로 시늉만 내고, '합죽이가 됩시다, 합!' 타임이라도 되는 것처럼 입을 꾸욱 닫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날 발표를 한 번도 하지 않는 건 우리 지우가 유일했던 것 같다. 물론 같은 유치원을 3년 다니다 보니 조금씩 좋아지긴 했지만, 7살 부모 교육 때도 여전히 가장 소극적인 아이가 지우였다.
지우는 실수를 하면 혼난다고 생각해 실수에 대한 공포감이 있는 것 같았다. 트라우마가 있나. 그러다 보니 유치원이 재밌다는 말은 거의 한 적이 없었다. 툭하면 가기 싫다고 했고, 특히 야외로 소풍이나 견학을 가는 날이면 가기 싫다고 드러누워서 배를 째는 바람에 보내지 않은 날도 많았다.
그렇게 지우의 유치원 생활은 개성 강한 아이에서 평범한 아이로 변해가는 과정이었고, 유치원 선생님들은 지우를 조용하지만 큰 문제는 없고, 할 건 하는 아이 정도로만 기억해주었다. 하지만 보스 할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지우의 본성은 아직 살아있어서, 유치원에서 꾹꾹 누르던 감정들은 집에 와서 폭발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남들보다 난이도 높은 미운 일곱 살 시기를 보낸 후, 새음학교를 가게 되었다.
새음학교에 입학한 이후의 지우는, 한 마디로 표현하면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였다. 그렇게 유치원을 가기 싫어하던 지우가 학교 가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좋아했냐면,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했다. 심지어 주말엔 학교에 가지 않는다고 아쉬워할 정도였다. 유치원 땐 오늘 뭐했냐는 질문에, "그냥 놀았어" 수준의 답만 하던 지우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신나서 하기 시작했다.
우린 너무 신기했다. 어떻게 하면 학교가 이렇게 좋을 수 있는 거지? 그네 타고 수업하나? 수업 시간에 뽀로로를 틀어주고 쉬는 시간마다 사탕과 아이스크림을 주나? 정말 그 이유가 궁금했다. 그리고 이젠 유치원과 새음 학교의 차이를 명확하게 알게 되었다.
새음학교에서 가장 좋은 것 하나를 물어본다면, 난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 바로 선생님들이다.
지우가 1학년 때 결론을 내렸던 것은, 지우의 담임 선생님은 모든 면을 객관적으로 종합했을 때 전국의 1학년 선생님 중 최고일 것 같다는 생각이었다. 와이프의 생각도 같았다.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고, 나름 교육의 질적인 부분에서 기대치가 높은 학부모가 최고라고 결론을 내렸다면, 다른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는가.
다만 조금 더 확인할 부분이 있었다. 1학년 담임 선생님만 특출 나게 좋았던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이 부분도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지우는 전국 최고의 2학년 담임 선생님을 만났고, 현재도 전국 최고의 3학년 담임 선생님을 만나서 여전히 학교 가는 것을 즐거워한다. 와이프와 나도 이보다 더 만족스럽기 힘들 만큼 선생님들을 좋아한다. 새음 학교의 다른 선생님들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새음 학교 아이들은 학년이 올라갈 때 어떤 선생님이 담임이 되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선생님들이 다 좋으니.
밑도 끝도 없이 선생님들이 좋다는 말은 크게 와 닿지 않을 것 같다. 이 사례가 설명에 조금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하루는 지우가 상을 받아 왔다고 입이 귀에 걸린 채 좋아했다. 난 영혼 없이 축하한다는 말을 해주고 볼 일을 본 후, 한참 후에야 별생각 없이 상장을 보았다. 그리고 난 온몸의 전율을 느꼈다.
내가 알고 있던 상이 아니었다. 유치원 때 전혀 발표를 안 하던 아이였기 때문에, 난 지우가 적극적으로 발표를 하는 아이가 되길 바랬다. 하지만 나도 초등학교 6년 내내 발표 한 횟수는 손에 꼽을 만큼 발표를 안 하던 아이였으니, 날 닮았으면 발표는 참 안 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뽐내고 싶은 것이 있으면 앞에 나와서 해보라는 선생님의 말에, 그 수줍음이 많던 지우가 손을 들고 나섰다는 부분에서도 충격을 받았고, 뽐낼 개인기로 줄넘기를 택한 것도 뿌듯했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그 장면을 캐치하여 이런 상장을 만들어서 전교생들 앞에서 칭찬을 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이 상을 받은 이후, 지우는 이제 발표도 잘 하는 아이가 되었다.
새음학교엔 우리가 익숙한 우수상, 개근상, 모범상 등이 없다. 대신 위와 같이 선생님의 애정과 관심, 그리고 디테일한 관찰이 없으면 줄 수 없는 상들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새음 학교의 상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상'이라고 표현한다. 우린 얼마나 많은 '이하동문' 상들을 받아 왔었는가. 하지만 새음 학교에는 똑같은 내용의 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상장 내용들만 묶어서 책을 내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을 정도로 정말 디테일이 깨알같이 살아있는 내용들이었다. 지우도 위와 같은 내용의 상을 일 년에 10여 개 받아왔다. 그렇게 새음 학교의 아이들은 필요한 타이밍에 최고의 칭찬을 받으면서 기분 좋게 한 뼘씩 한 뼘씩 성장해나간다.
특수관계인이라 볼 수 있는 체육선생님들이 내게 주셨던 애정과 관심을, 지우는 모든 새음 학교 선생님들에게 받고 있으며, 나의 초등학교 유일한 기억인 떡볶이 에피소드와 같은 일들을 지우는 매일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선생님들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즐거운 학교 생활을 하고 있는 지우가 부러울 뿐이다.
이렇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관찰하고, 칭찬하며 성장시키는 전국 최고의 선생님들이 있는 학교,
이것이 새음 학교의 가장 큰 경쟁력이자 자랑거리다.
https://brunch.co.kr/@boxerstyle/89
https://brunch.co.kr/@boxerstyle/88
https://brunch.co.kr/@boxerstyle/83
https://brunch.co.kr/@boxerstyle/86
https://brunch.co.kr/@boxerstyle/85
https://brunch.co.kr/@boxerstyle/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