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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창우 Jul 01. 2017

대안 학교 대안 아빠 #8

배움의 목적

* 학교명이 두레학교에서 새음학교로 변경되었습니다.


50명이 빼곡히 앉아서 공부하던 80년대 초등학교 시절, 시험은 자주 친 것 같은데 석차가 나오지 않다 보니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어머니가 시험 점수에 일희일비하시는 분이셨다면 선생님 면담을 통해 파악이 되었겠지만 그러질 않으셨다. 나도 90~100점을 받으면 기분이 좋고 70~80점을 받으면 살짝 부끄러워졌지만, 그렇다고 옆 친구가 몇 점인지 전혀 궁금해하지 않았다. 다만 선생님이 우리를 쳐다보실 때 유독 동공이 하트 모양으로 변하는 아이들이 있어서, 선생님들의 이쁨을 받는 그 친구들이 공부를 잘하는 집단이라 생각했다. 지금 되돌아보니 동공 하트 유발자들은 모두 큰 집에 살던 아이들이었다.


그러다 내가 처음 반에서의 석차를 인지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당시 6학년 담임선생님은 학교에서 공부 많이 시키기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그래서 언제나 6학년만 맡으셨고, 모든 치맛바람 부모님들은 자식들이 그 선생님 반에 배정되길 원했다. 당시 반 배정 알고리즘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나도 그 반이 되었다.


역시 첫날부터 시험을 치셨다. 그것도 방과 후 다른 반 친구들은 도시락 가방과 신발 가방을 쭐래쭐래 흔들며 하교를 한 시간에, 우리 반만 남아서 시험을 쳤다. 시험지에는 <계산력 테스트>라고 적혀 있었다. 선생님이 직접 만드신 35x {16+(200/4+5x6) x3}/{120-(52+27/3-7) x3 따위의 문제들이 25개나 적혀 있었다. 다들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이게 실화가 아니길 바랬지만, 선생님은 회심의 시작종을 울리셨다. 별도의 연습장이 주어지지 않아서, 시험지 빈 공간에 간지나는 제도 샤프로 빼곡하게 계산을 한 후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니, 초록색 나무 책상 위에 널브러져 있는 지우개 가루들만 다 모아도 축구공 하나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은 <계산력 테스트>는 물론 계산력도 중요했지만, 춤을 추는 숫자와 사칙연산 부호들로부터 초점을 잃지 않을 시력, 그리고 내가 방과 후 이걸 왜 풀고 있어야 하는지 생각할 수록 빡도는 마음을 스스로 달래줄 수 있는 자제력이 필요했다. 부러진 샤프심과 지우개 가루들이 산을 이루는 20번 문제가 넘어갈 때 쯤이면 다들 사춘기가 찾아왔다. 삐뚤어질 준비를 끝낸 13세 소년 소녀들의 한 숨소리들이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렇게 우린 첫 번째 <계산력 테스트>를 끝냈고, 다음 날 조회 시간이었다.


"이노무쉬키들, 80점 이상이 한 명뿐이야. 이래 가지고 중학교 가서 우짤라고 이러노. 앞으로 매주 한 번씩 방과 후에 계산력 테스트를 본다. 알겠어?"

"네~"

"이노무쉬키들, 대답 소리 봐라. 알겠어?"

"네!"

"손창우, 일어서라"

"???"

"손창우만 80점 넘었다. 88점. 다들 박수치라"


난 아주 당황했다. 내가 1등이라고? 기분이 좋았다기보다는 일어서서 박수받는 게 너무 쪽팔려서 귀까지 발개졌다. 어쨌든 그날부터 난 본의아니게 수학을 잘하는 아이로 알려졌다. 나보다 훨씬 공부를 잘하던 아이들이 많았고, 특히 주산학원을 몇 년씩 다녀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16비트 컴퓨터처럼 계산을 잘하던 무림의 고수들이 즐비했는데, 내 생각엔 그들은 15번이 넘어갈 때 사춘기가 찾아왔고, 난 뭐든 한 박자씩 늦어서 마지막 문제를 풀 때에서야 삐뚤어졌다. 그 차이 밖엔 설명이 되질 않았다. 그 후로 우리 반은 정말 매주 계산력 테스트를 쳤고, 난 주산 고수들이 태업을 할 때마다 박수를 받곤 했다.


중고등학교 때도 수학을 잘하는 편이긴 했는데, 그건 상대적으로 국어가 싫었기 때문이었다.


'이 글에 대한 설명으로 알맞지 않은 것은?' 다 맞는 거 같은데...

'위 시에서 시대적 상황을 나타내는 단어는?' 저 시의 단어들, 요즘은 아무도 안 쓰는데 하나만 찾으라고?

'밑줄 친 부분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알맞은 것은?' 아, 밑줄 친 부분 다시 읽기 싫은데...


영어도 재미없었다. If I (   ) a bird에서 괄호 속이 왜 were인지 제대로 설명해주는 선생님은 없었다. 그냥 외워야 했다. 어젠 I 뒤에 was라며. 근데 이건 왜 were야. 이쯤되면 또 사춘기가 찾아온다.


결정적으로 난 밤 10시부터 12시까지 ‘별이 빛나는 밤에’를 매일 들었다. 부산에는 이문세 씨가 진행하는 방송이 나오지 않았고, 성우 한 분이 높낮이 없는 톤과 희로애락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목소리로 진행을 했지만 내 귀에는 충분히 호강스러웠다. 라디오는 무조건 들어야 했는데 음악을 들으면서 할 수 있는 공부가 수학뿐이었다. 귀로 음악을 듣고, 눈과 손은 기계적으로 수학 문제를 풀어나갔다. 팝송을 듣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야간 자습시간에도 교복 안주머니에 국제시장에서 산 마이마이 워커맨을 넣고, 왼쪽 팔 쪽으로 이어폰을 쭈욱 뺀 후 시계로 고정시킨 다음, 왼쪽 귀에 몰래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들었다. 그때도 할 수 있는 공부는 수학뿐이었다.


그렇게 나의 공부 시간의 80~90%는 수학에 할당되었다. 수학이 좋아서가 아니라 국어, 영어가 재미없었고 음악을 듣기 위해서였다. 정석은 기본으로 다 풀고, 문제집도 4~5권을 기계적으로 풀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많이 풀면, 시험칠 때 틀리기가 어려웠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시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들 중에는 피타고라스급의 수학자나 스티브 잡스급의 창의력을 가진 분들은 없어서, 4~5개의 문제집을 풀고 나면 거기서 크게 벗어나는 문제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난 시험 점수가 석차로 연결되기 시작한 초등학교 6학년 이후로 수학 하나만 잘하는 아이였다.  


그런데 말입니다.


난 내가 왜 수학을 배워야 하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어느 누구도 과목의 목적에 대해서 가르쳐준 적이 없었다. 아, 숱하게 들은 목적은 있지. 수학을 잘해야 좋은 대학에 간다는 것이었다. 내가 왜 미적분, 삼각함수, 로그 따위를 배워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고, 목적의식 없이 그냥 기계적으로 문제만 풀었을 뿐이다.


REM 수면주기를 삼각함수로 계산해보면 1.5시간의 배로 수면을 취할 때 가장 양질의 꿀잠을 잘 수 있다는 것을 그래프로 그려주며 설명해줬다면, 삼각함수가 조금 더 재밌지 않았을까? 지하철의 운행 주기를 미적분으로 계산하여 출퇴근 시간 교통체증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면, 미적분이 좀 더 유용하게 느껴지지 않았을까? 이런 계산들을 어떻게 실생활에 적용하여 세상을 바꿀 수 있는지 누군가가 알려주었다면 수학이 얼마나 더 재미있었을까.


그렇게 수학만 잘하던 나는, 알고 보면 수학 문제들을 영혼 없이 풀기만 했던 기계였다.


가장 자신있던 수학이 이런데, 다른 과목들은 어땠으랴. 내가 왜 국어, 영어, 물상, 생물, 지리과학, 역사, 세계사, 음악, 미술, 사회, 문학, 한자, 기술, 체육, 교련 등의 과목을 공부해야 하는지, 대학입시 목적을 제외하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그리고 대부분 나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새음학교 교육 수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의 하나가 '교육의 목적'부터 가르친다는 것이다. 목적 없이 공부해온 나에겐 상당히 신선했으며, 독일에서 교육을 받았던 와이프는 이래서 새음 학교가 독일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새음 학교에선 매 수업시간 전에 아래와 같이 기도를 하고 시작한다.



우리말 우리글 기도문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 말과 우리글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표현하며 책임감 있게 사용함으로써 하나님과 친밀하게 소통하고 공동체와의 화목한 관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주세요.


수와 셈 그리고 공간 기도문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 속에 담겨 있는 수와 셈 그리고 공간의 법칙과 질서, 비밀을 발견하여 하나님이 신실하시고 완전하심을 깨닫게 하며, 생활 속의 문제들을 수학적 사고로 해결,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사회 기도문

인간과 사회(정치, 경제, 사회), 인간과 공간(지리, 환경), 인간과 시간(역사, 문화, 인류)이 하나님의 주권 안에 있음을 발견하고, 탐구하는 능력을 익혀, 우리에게 맡겨진 사회 공동체의 질서를 세우고, 협력하여 나눔을 실천하도록 도와주세요.


영어 기도문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영향력 있는 언어로 선택된 영어를 통해 의사소통하고 타문화를 이해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회복하는 세계화 시대의 사명자로서 살도록 도와주세요.


과학 기도문

자연현상과 사물에 대하여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질서 속의 과학적 지식 체계를 이해하여 창조세계를 회복하고 아름답게 가꿔 나가도록 도와주세요.



종교적인 부분을 떠나서, 각 과목마다 뚜렷한 목표가 있다는 것이 멋지지 않은가. 나에게 영어는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 위하여 열심히 해야 하는 과목이었는데, 가장 영향력 있는 언어이기 때문에 세상과 의사소통하고 타문화를 이해하여 세계화 시대의 사명자로 살기 위해서 배우는 학문이었던 것이다. 목적이 있는 공부와 점수를 위한 공부의 차이, 망치로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과목에 대한 기도문뿐만 아니라, 그날 배우는 주제들에 대해서도 항상 배우는 목적을 먼저 가르쳐준다. 우리가 왜 덧셈과 뺄셈을 배우는지, 왜 구구단을 외워야 하는지, 왜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이해를 해야 하는지를 아이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해준다. 그리고 가르치는 방식 또한 대안 학교답게 상당히 자연친화적이고 창의적이다.


얼마 전 '동서남북'에 대해서 배울 땐, 아이들은 나침반을 하나씩 들고 뒷 산으로 올라가서 각각 동서남북으로 팀을 나눠서 나침반을 보고 목적지를 찾아가서 미션을 수행했다고 자랑했다. '사계절'에 대해서 배울 땐, 한 달간 우리말 우리글 시간마다 숲에 가서 '가을'이란 주제로 낙엽으로 미술작품도 만들고 가을에 대한 책을 읽었다. 그리고 가을이란 주제로 시를 한 편씩 지어서 시 낭송회를 가졌다. 비록 초등학교 1학년 아이들의 시였지만 그 속엔 자연 속에서 뒹굴지 않았으면 절대 나올 수 없는 흔적들이 듬뿍 담겨 있었다. 최근엔 '시간과 거리'에 대해서 배웠는데, 팀별로 이어달리기를 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시간 및 거리에 대해 둘러앉아 토론하며 개념을 익혔다고 했다.


그렇게 새음 아이들은 각 과목별로 배움의 목적을 먼저 생각하고, 자연 속에서 사계절, 동서남북, 시간과 거리 등을 배워 간다. 선생님들은 항상 그 날 배울 주제들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올바르게 전달될 수 있는지 고민하고 있으며, 그 노력들의 결과로 아이들은 이런 배움의 방식을 너무 좋아한다. 항상 놀이처럼 시작하지만, 자연 속에서 토론하며 그 개념을 정확하게 인지한 후, 배움의 목적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며 단원을 끝낸다.


기계적인 문제풀이 수학만 잘하던 대안 아빠는 오늘도 새음 학교에서 함께 배워 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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