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방학
* 학교명이 두레학교에서 새음학교로 변경되었습니다.
오래간만에 대안 아빠로의 복귀다. 일단 가볍게 방학 이야기로 시작하자.
새음학교는 일반학교보다 방학과 개학이 빠르다. 그래서 성수기를 피해 여행도 다녀올 수 있다. 열대야와 짜증을 동반하는 우리나라의 폭염 기간이 새음학교 방학 일정과 더 겹치는 것 같다. 이틀 전까지만 해도 가족과 에어컨이 동시에 물에 빠졌을 경우, 누구를 먼저 구해야 할지 판단이 혼미해질 정도로 무더위였는데, 갑자기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이러다 터지는게 아닐까 걱정되던 선풍기가 마침내 멈췄다. 그리고 바로 내일이 새음학교 개학이다.
지우의 방학 숙제 중 '우리 지우는 이렇게 방학을 보냈어요'라는 주제로 부모가 한 페이지 적어야 하는 것이 있었다. 난 무엇인가 적는 일에 대해 큰 두려움은 없는 편인데도, 연필을 들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우리 딸이 방학 동안 무엇을 했냐고? 흠, 정말 적을 말이 없었다.
지우는 내가 아는 전국의 초등학교 3학년 생 중 가장 널널한 방학을 보냈다. 운동, 악기, 학원, 가정 학습 등등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지아는 일주일을 제외하곤 유치원은 다녔으니 지아보다 널널한 방학을 보냈다. 심지어 지우에게 책이라도 많이 읽으란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 내가 '드래곤볼'이나 '슬램덩크'에 빠져 있을 때처럼, '마법천자문' 책들만 반복해서 읽는 듯했다. 만화책도 좋은데 글자로 된 책도 좀 보라고 하려다, 꼰대는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란 강한 확신이 들어, 그냥 놔뒀다. 결론적으로, 아무 것도 안했다. 영어로 낫띵!
대신 친구들과 거의 매일 놀았다. 근처 사는 친구 집 가서 놀고, 우리 집에 친구가 와서 놀고, 자전거나 인라인 타고 놀고, 수영장 가서 놀고, 친구 집에서 외박하고 오고, 친구가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고, 동갑내기 사촌과 주말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놀이란 놀이는 다 하고, 동생 유치원 끝날 때 데리러 갔다가 집에 와서 저녁 먹으라고 할 때까지 놀고, 삼촌이 들어오면 낙타라 부르며 등에 올라타고 놀고, 할머니가 마트나 교회 가실 때 따라가고, 할아버지가 tv 보시면 옆에 앉아서 같이 보고, 그러면서 전쟁 나는 거 아니냐고 걱정하고...
와이프가 방학 숙제를 좀 봐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할 때마다, 난 '자기주도 학습'을 강조하며 단 한 번도 방학 숙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숙제는 본인이 알아서 해야지. 초등학교 3학년이면 스스로 많은 것을 깨닭아야 할 나이다. 숙제를 하건, 안 해서 부끄러워지건, 책을 많이 읽건, 너무 책을 놓아서 학기 초에 고생을 하건, 그건 본인이 스스로 깨달아가야 하는 나이다. 그런 시행착오를 가장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나이가 이때 아니겠는가. 나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와이프도 다행히 회사 일이 바쁘고 출장이 잦아, 지우의 방학 생활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게 개학은 다가왔고, 와이프는 개학을 앞두고 또다시 출장으로 자리를 비웠다. 뭔가 속는 기분이 들었지만, 자연스럽게 개학 준비가 내 몫이 되어버렸다.
그래도 부모로서 할 건 해야지. 개학을 하루 앞두고 처음으로 방학 숙제를 체크했다. 나름 숙제가 많았다. 그중 1학기 때 배운 수학 복습을 위해 문제집을 한 권 푸는 게 있었다. 조금씩 하면 전혀 부담이 없는데 한꺼번에 몰아서 하려니 상당한 분량이었다. 한 달 만에 급하게 풀다 보니, 틀린 문제들이 속출했다. 그중 몇몇 문제는 너무 오래간만이라 개념 자체가 헷갈리는 것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오답들은 문제를 제대로 읽지 않거나 집중력이 현저히 떨어져 범한 실수들이었다.
속으로 쌤통이란 생각도 들었다. 수학의 신 피타고라스가 초3으로 온다고 해도, 한 달 놀고 나면 '한 시간에 15초씩 늦는 시계가 있는데, 7시에 정시를 맞췄는데 6시간 후엔 시계가 몇 시 몇 분을 가리키는지'와 같은 문제는 틀릴 수 있다. 속으론, 아빠 40년 이상 살면서 아직 한 시간에 15초씩 늦는 미친 시계는 본 적 없으니 그냥 넘어가자고 하고 싶었지만 그 정도로 막되먹은 아빠는 아니다. 적어도 왜 틀렸는지 물어보는 문제는 성의껏 다 설명해주려 노력했다.
전국의 초등학교 부모들은 공감할 것이다. 3학년부터 수학 문제가 너무 어렵다. 문제를 딱! 째려보며, 답이 척! 하고 나오는 착한 문제들은 2학년으로 끝이 난다. 3학년 문제부터는 지문이 너무 길어서 국어를 해야 한다. 이렇게 풀어줘야 하는 문제가 한 두 문제면 상관없는데, 한꺼번에 틀린 문제 수십 개를 다시 설명해줘야 하는 상황이 되면, 안 마시던 술이 생각난다. 이 시기에 아랫집에서 담배 냄새가 올라온다면, 아마 방학 숙제를 봐주고 있을 듯하다. 차라리 아무도 없는 지하주차장에서 애나벨 공포영화 한 편 보는 게 나을 것 같다. 엄청나게 쌓여있는 다시 풀어야 할 문제들을 보며 나도 울고, 지우도 울고, 문제지도 울고, 지우개도 울었다.
오히려 내가 살짝 지우를 꼬셨다. "지우야, 이거 오늘 꼭 다 안 해도 돼. 숙제를 억지로 다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네가 한 문제 한 문제가 무엇을 묻고 있는지 제대로 이해하면서 풀어보는 게 더 중요한 거야. 며칠 늦으면 되지 뭐. 주말까지 천천히 하자." 하지만 이 아이에겐 씨도 안 먹히는 말이다. '방학 숙제를 다 한 아이'란 타이틀이 더 중요하다. 나와는 성격이 정반대다. 오히려 지쳐가는 날 다독이고 10분 휴식시간도 주면서, 기어이 마지막 장까지 끝냈다.
당연히 숙제를 다 끝냈을 때 너무너무 좋아했다. "할머니, 저 수셈공 드디어 다 풀었어요!"하며 큰 소리로 자랑했다. 그런데 하기 싫은 숙제를 기어이 다 끝내서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드디어 내일이 개학이라고 좋아했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개학이라서 좋다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학생이 방학 끝나는 게 좋을 수 있는 걸까?
지우는 정말 개학을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과 친구들이 너무 보고 싶단다.
3학년이나 된 지우가 이렇게 계속해서 새음학교를 좋아하는 비밀을 나도 정말 알고 싶다.
이 아이가 방학을 어떻게 보냈는지가 중요한게 아니라, 방학이 끝날 때 이렇게 기쁠 수 있는 이유가 정말 궁금하다.
이것이 대안 학교 대안 아빠로서 계속해서 글을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마지막으로, 겨울 방학 땐 숙제 미리미리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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