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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브랜드부스터 켄 May 27. 2020

부하를 희생양으로 삼는 리더

리더의 권한은 위임할 수도 없고, 위임해서도 안 된다.

※ 이 글에는 영화 <남산의 부장들> 일부를 발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출처: 남산의 부장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대통령인 '박통'은 중대한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순간, 심복에게 항상 같은 말을 한다. 박통의 심복인 박용각, 김규평, 곽상천, 다시 말해 남산의 부장들은 모두가 다음과 같은 박통의 달콤한 자유이용권을 받는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대로 해.




조직의 구성원 입장에서 리더로부터 '전권을 위임한다는 말'을 들으면 누구나 '당신이 하는 그 어떤 일이라도 내가 책임지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일 것이다. 이렇게 인정받는 구성원 입장에서는 얼마나 뿌듯할까?실제로 이 말은 굉장한 마법을 일으킨다. 그는 리더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것이다.


남산의 부장들 역시 박통의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온 힘을 다 한다. 구체적으로 지시하지도 않았는데 박통의 문제를 자기 문제처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그들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박용각은 쫓겨났고, 김규평은 신뢰를 잃고 곽상천은 총에 맞는다. 곽상천은 김규평을 계속 자극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박통은 이 모든 결과를 외면한다. 심복이 나름대로 해결한 공적도 인정하지 않는다. 책임은 일을 벌인 심복의 몫이 되고, 성과는 고스란히 박통이 차지한다.


이 상황을 비유하자면 이렇다. 당신이 선배와 놀이동산에 갔다고 가정해보자. 선배가 마음대로 놀이기구를 타라고 자유이용권을 줬다. 신나게 즐기고 저녁이 되었는데 직원이 지금까지 탄 놀이기구들에게 대한 이용금액을 지불하라고 하면 어떨까? 당신은 우선 선배부터 찾을 것이다. 그런데 선배가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놀이기구를 탄 사람은 너 아니냐고 잡아 뗀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나쁜 리더는 실무자를 희생양으로 삼는다. 실무자에게 가짜 자유이용권을 발급하고 박통처럼 달콤한 말을 속삭인다. '나는 박과장을 믿어요. 이번 프로젝트의 PM을 맡아주세요. 전권을 위임할 테니 마음껏 하고 싶은 대로 해봐요.' 열정이 넘치고 몸을 사리지 않으며 인정욕구가 충만한 사람이 이런 유혹에 많이 넘어간다. 만약 프로젝트가 잘 되면 리더는 적절한 인재를 찾아 위임할 줄 아는 훌륭한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칭송받을 것이다. 안 되면? 가짜 자유이용권을 쓴 대가를 실무자 혼자 치르게 된다.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이런 경험이 몇 번 있었다. 앞서 상술한 열정이 넘치고 몸을 사리지 않으며 인정욕구가 충만한 사람이 바로 나다. 성공한 적도 있었고 실패한 적도 있었지만 언제나 프로젝트가 끝나고 든 생각은 '도박장에서 나오는 기분'이었다. 가진 권한이나 책임에 비해 너무 큰 프로젝트는 위험하면서도 유혹적이다. 좋아서 맡았지만 책임만 있고 권한이 적어 속칭 개고생을 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물론 그 덕에 많은 업무경험을 쌓을 수 있었으니 그 부분은 만족한다. 


회사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한 '조직문화', 'R&R 체계' 등이 없다면 '전권을 가진 실무자'는 사막 속의 바다처럼 허상에 불과하다. 조직의 모든 구성원 앞이 아니라 밀실에서 리더가 비밀스럽게 제시한 자유이용권은 희생양이 되기 딱 알맞다. 아무도 모르는 자유이용권은 혼란을 일으킬 뿐이다. 열정만 넘쳐서 아무도 모르는 리더의 보증만 믿는 실무자는 아래와 같은 상황을 맞이하게 된다.


실무자: (나에게 이런 권한이 있으니까) 이렇게 해주세요.
유관 담당자: (니가 뭔데 그렇게 말하지?) 왜요?
실무자: (어? 이게 아닌데) 아니, 이번 프로젝트 제가 책임지는 건데 해주셔야죠.
유관 담당자: (바빠 죽겠는데 뭐지?) 전 들은 게 없어요. 필요하면 저희 팀장님 통해서 요청주세요.
실무자: (와, 진짜 협조 안되네. 이 팀 뭐지) 네 알겠습니다.


위 상황에서 두 명 다 잘못이 없다. 실무자는 리더의 권한 위임을 받아 문제를 해결하려는 입장일 뿐이고, 유관 담당자는 그런 내용을 전달받지 못한 상황에서 실무자의 월권 행위를 견제한 것 뿐이다.


잘못은 저 뒤에서 관망하는 나쁜 리더에게 있다. 리더의 권한은 위임할 수도 없고, 위임해서도 안 된다. 리더가 진심으로 위임하고 싶다면 공개적인 장소에서 구성원들에게 밝혀야 위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물론 말뿐이 아닌 행동으로도 보여줘야 한다.


여담이지만, 실제로 재직 중인 회사에서 황당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전사 워크샵이었고, 대표이사가 중간 리더들을 앞에 세워놓고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이 분들을 신뢰합니다.
제가 없는 상황에서 이 사람들이 저와 같다고 생각해주세요.


생각지도 못했던 이 발언에 나는 대단히 감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말이라는 걸 깨달았다. 기획안을 보고해도 중간 리더들은 전혀 결정하지 못하고 대표이사만을 찾았다. 그들에게는 어떤 권한도 없었다. 누군가는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말이지 그걸 다 믿냐고 면박을 줄지 모르겠으나 나는 그 사람에게 이렇게 되묻고 싶다. '그렇게 대표이사가 자기가 한 말 하나도 못 지키고 앞뒤 안 맞는 회사에서 다니는 게 자랑이세요?'


리더는 불확실한 환경 속에서 문제를 앞장서서 해결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앞장서지 않으면 리더가 아니다. 자신이 리더라면 본분을 잊지 말자. 반복하지만 리더의 권한은 위임할 수도 없고, 위임해서도 안 된다. 일을 위임한다는 건 해야 할 일의 범위를 정해서 따로 목표를 정해주고 그 부분에 대한 권한을 쪼개주는 것이지 리더의 고유한 역할 자체를 넘기는 건 직무 유기다. 그렇게 위임하고 싶으면 그냥 그만두고 그 자리를 통째로 넘기면 된다. 


자신이 실무자라면 리더가 비공개적으로 제시하는 자유이용권을 의심해라. 자유이용권의 뒷장까지 확인해라. 그곳에 당신이 미처 확인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실패 시 모든 책임은 당신에게'라는 아주 작은은 유의사항이 쓰여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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