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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보류 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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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초름 May 31. 2023

3. 아반롱반(4)

    그날은 늦은 여름이었는데, 어느새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오고있었다. 현준은 망한 삶이 뭔지 알아내기 위해 하루 온종일 머리를 싸매고 있다.엉켜버린 끈 뭉치의 크기는 어림잡아도 주먹보다 큰 듯했다.

    '전공 공부보다 더 어려운 것 같아.'

    그래도 다행인 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으로 보이는 태석의 밝은 표정이었다. 태석과의 약속을 지키려면 빨리 해답을 찾아야 할 일이었다. 대학 동기들은 기말고사를 준비하고 있겠지. 아참, 현준은 그날 이후로 학교 도서관을 가지 않는다. 어차피 F 학점이라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막상 양 옆에서 김을 뿜으며 공부하는 친구들을 보니 괜히 불안해지더란다. 그리하여 현준은 발을 돌려 동네 카페를 투어 하는 중이다. 이전에는 테이크아웃 카페에서 공장처럼 내려주는 ‘샷 두 번 추가한 아메리카노’만 사가곤 했지만 요즘은 다양한 음료에 도전해보고 있다. 밤낮으로 심한 기온차에 몸이 시리는 날이면 따뜻한 유자차를 마시기도 하고, 배고플 때는 초코라테에 휘핑까지 추가해서 마시기도 한다.

    새로운 카페를 찾아 서성이던 현준은 골목 끝 부근에서 '커피 오마카세'를 발견했다. 사실 현준은 오마카세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그저 '커피'라는 단어와 햇살이 가득 내리쬐는 창가자리가 그를 그 곳으로 이끌었다.

    '메뉴판이 어디 있지?'

    특이한 구조였다. 입구부터 큰 테이블 하나가 놓여있어 주문을 하려면 카운터까지 틈새를 비집고 가야했다. 게다가 사장님은 손님도 없는데 이미 바쁘신 듯 보였다. 왠지 기가 죽은 현준이었다. 그도 잠시, 사장은 현준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저 아직 안 시켰는데요?"

    사장은 픽-웃으며 대답했다.

    "여기는 제가 주는 메뉴를 마시면 됩니다. 그게 바로 이곳의 운영 철칙 이거든요."

    "아, 철칙, 이건 아메리카노네요?"

    "아니요. '아반롱반'이라는 메뉴예요."

    현준은 처음 들어보는 메뉴에 그 의미를 찾아내고자 커피를 골똘히 바라봤다.

    "손님, 컵 뚫리겠어요. 내 얘기 들어볼래요? 꽤 재밌을 거예요."

    50대 아주머니로 보이던 사장의 눈이 10대 소녀처럼 반짝 빛났다.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고 사장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젊었을 때 해외에 나가서 커피를 배웠었거든요. 처음으로 커피를 배웠던 곳은 베트남에서 다니던 어학원 아래 층에 있는 바리스타학원이었는데, 선생님이 말도 못 하게 까다로웠어요. 40개가 넘는 커피 제조법을 일주일 만에 외워오래서 어찌나 당황스러웠던지. 재료가 못해도 백개는 넘었을 거야. 나 그때 메뉴 열개도 못 외웠잖아요. 영어를 알아듣지도 못하는 애가 어떻게 읽고 외우기까지 할 수 있었겠어요? 그러니 매번 시럽 잘 못 넣고, 얼음 까먹고, 그러다 엄청 혼났죠.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영어를 못했던 게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왜냐면 그 험한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들었거든. 알아들었으면 어린 내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어요?"

    왜 사람들은 이야기가 조금만 길어지면 딴 길로 세는 걸까. 하지만 사장의 이야기가 꽤 흥미로웠던 현준은 묵묵히 그녀의 푸념을 들었다.

    "그래도 내가 커피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만들었거든요. 반에서 1등이었어요. 그래서 선생님이 나를 커피만 전문으로 파는 카페로 취업시켜줬어요. 커피 제조는 까다롭지만, 녹차푸라푸치노나 괴물초코라떼 같은 게 없으니 외우는 건 덜할 것 같다면서. 알고보면 정이 많은 분이었던거죠. 그런데 내가 그 카페에서 아주 신기한 사실을 알았지 뭐예요. 이전에 아메리카노라고 하고 배웠던 것이, 사실은 롱블랙이었다는 걸요. 난 분명 학원에서 따뜻한 아메리카노는 물 넣고 샷 넣기.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얼음과 물 넣고 샷 넣기라고 배웠어요. 그 정도는 확실히 외웠다고요. 그래서 똑같은 방식으로 자신 있게 만든 거죠. 그랬더니 세상에 카페 사장이 박장대소를 하면서 도대체 어디서 배운 레시피냐는 거예요. 그때 그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어찌나 기분 나쁘던지요. 그러고는 롱블랙과 아메리카노의 차이를 설명해 주는데, 내가 머리를 탁 맞은 것 같더라니까요? 샷을 먼저 부은 다음에 물을 부으면 아메리카노, 반대로 물을 붓고 나서 샷을 부으면 롱블랙이라는 거예요.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시키면 위에 노르스름한 크레마가 삭 올라가 있는 거 본 적 있죠? 그거 다 롱블랙이에요. 아메리카노는 크레마가 있을 수 없어요."

    "...!"

    현준은 경악했다. 지금껏 먹어왔던 아메리카노가 사실은 아메리카노가 아니었다니.

    "왜요? 배신감 들어서? 나도 처음에 그랬어요. 내가 여태껏 만들었던 아메리카노가 롱블랙이었다니. 난 아메리카노를 만들어 본 적이 없었던 거라니! 그래서 난 그때부터 새로 배운 제조법으로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지요. 그런데 내가 이 카페 차려보고 알게 된 사실이 뭔지 알아요? 그딴 건 개나 주라는 거예요."

    "...!"

    현준은 너무나도 직설적인 사장의 표현에 한 번 더 경악했다.

    "학원 선생과 카페 사장은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이였지만 나를 사이에 껴두고 격렬히 싸우고 있었어요. 롱블랙을 아메리카노라고 하면 안 된다느니, 이미 대중은 크레마가 가득한 아메리카노를 익숙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느니, 어쩌니, 저쩌니, 어우! 진절머리나. 웃긴 게 뭐게요? 사실 손님들은 롱블랙과 아메리카노를 구별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냥 물과 에스프레소 2샷. 그거면 된 거예요. 자기네들이 전문가랍시고 쓸데없는 자존심으로 내가 맞니 네가 틀렸니 간섭하는 게 참 괘씸하더라고요. 그냥 다른 방식 아닌가요? 그래서 난 그냥 물 넣고 샷 넣은 다음에 스푼으로 저어서 크레마를 깨버려요. 그러면 아메리카노도 맞고 롱블랙도 맞아요. 그래서 이 메뉴는 '아메리카노 반 롱블랙 반'이에요. 줄여서 '아반롱반'. 이름도 귀엽고 아주 마음에 들어요."

    서로 다른 방식을 틀린 방식이라고 착각하며 살아가기 쉬운 세상이다. 마치 내 생각을 해주는 척, 나를 위해 본인이 희생하는 척, "커피를 그렇게 만드니까 망하지"라며 간섭하는 옆집 사장의 말에 내 커피가 오답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늘 되뇌고, 상기해야 한다. 내 커피는 망한 게 아니라, 다른 것 뿐인 걸. 또 하나, 내 카페에서는 내 마음 가는 대로 커피를 만들 자유가 있다.

    현준은 답을 찾은 듯했다. 태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태석아 뭐 해?"

    "오 현준이 형, 저 학원 가는 길이에요. 전화하신 걸 보니 형 혹시..."

    "맞아. 드디어 답을 찾았어."

    "헐 대박. 답이 뭔데요?"

    "망했다는 건 없어. 우린 모두 다른 것뿐이야. 그러니 우리는 기꺼이 망할 자유가 있어!"

    "망할 자유가 있다라... 그거 참 짜릿한 말이네요. 그럼 형은 이제 자유로운 남자? free man!"

    "으익, 프리맨이 뭐야. 요즘 중학생들은 그런 게 유행이니? 뭐, 그래. 맞다! 난 자유야! 난 프리라고!"

    현준은 다짐했다. 자유를 잊지도, 잃지도 않겠다고. 그날로 현준의 이름은 후리가 되었다. 후리는 개명을 하지 않았다. 그저 주변 사람들에게 본인을 후리라고 소개할 뿐이었다. 이전의 자신을, 그 흔적을 없애고 싶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문신을 지우지도 않았다. 다만 후리는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침대 위에 있는 매직펜을 든다.

        '망친 인생'을 '희망찬 인생'으로.

    후리는 그렇게 매일 희망을 그리며 하루를 시작한다.

    

    "후리씨, 오늘은 일본어 하는 날이네요?"

    삶의 희망을 찾은 겨울의 계절이 지나 봄이 찾아왔다. 후리는 학교로 돌아가 2학년이 되는 대신 휴학을 결심했다. 세계일주를 하기 위함이었다. 그리하여 일주일에 두 번 커피오마카세에 들려 일본어와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영어와 중국어를 열심히 공부해 둔 덕분에 또 다른 언어에 몰두할 수 있었다. 중국어는 정말 쓸데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이렇게 쓰일 줄이야. 그때는 괴롭기만 했던 외국어공부가 꽤 ‘재미’있다고 느끼는 후리였다. 시험을 위한 공부가 아닌 진정으로 배우고 싶어서 하는 공부는 처음인 것 같기도 하고.

    여행이란, 종착점이라는 정답을 피해 수많은 오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후리 또한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돌고 돌아 다시 이 자리로 돌아오겠지.'

    하지만 언제 돌아올지, 어떻게 돌아올지는 분명 오답 투성이일 것이다. 후리가 바라는 진정한 정답은 오답을 쟁취할 자유, 그 안에서 찾는 희망이다. 홀로 사색에 빠졌던 후리는 사장에게 빙긋 웃어 보였다.

    "... 맞아요. 일요일은 일본어. 수요일은 스페인어."

    "그럼 일본어를 공부하는 일요일이니까 일본식 커피를 내려드릴게요."

    "그런 게 있어요?"

    "일본에서 사 온 컵이 있어요. 이 컵에 담으면 일본식 커피지요. 아차, 후리씨 혹시 돈 많아요?"

    갑자기 들어온 재정 공격에 뼈가 아릿해지는 후리였다.

    "사장님, 저 아파요. 굳이 따지자면 있는 편이라기 보다는 상당히 없는 편이랄까요."

    총을 맞은 듯한 제스처를 취하는 후리의 모습에 사장은 활짝 웃어 보이며 대답했다.

    "하하하, 그런 뜻이 아니라요. 여기 단골손님의 동생이 올해 수능을 보는데 두 달만 과외 좀 해줘요. 후리씨 공부 좀 하잖아."

    후리는 오랜만에 듣는 공부라는 단어가 꽤 반가웠다. 그렇게 나를 괴롭혔던 공부인데, 미운 정이 들어버린 걸까. 후리는 생각했다. 대학 공부는 자신이 없을지라도 수능 정도의 수준에서 모르는 문제란 없었다. 사실 자신 있었다. 그는 호의적인 태도를 숨기기 위해 입을 꽉 깨물고 대답했다.

    "흠, 외국어 공부하느라 좀 바쁘긴 한데..."

    "그래요? 그러면, "

    "아, 잠시만요! 2, 3일은 시간 낼 수 있어요. 하루에 세 시간 정도요."

    "그렇죠? 그럴 줄 알았어요. 그럼 손님한테 말해둘게요. 과외는 여기서 해도 좋고 나가서 해도 돼요."

    사장의 계략에 걸려든 후리였다. 역시 사장은 사람의 마음을 간파하는 능력이 상당하다. 후리는 세계일주 일정을 반년 정도 앞당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들뜨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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