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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 끝에는 뭐가 있을까? 저 길 끝에는...?

2023년 4월 26일

by 안지숙

-세브니츠라는 마을에 와있다. 심플하고 깔끔하고 단정한 인상이 보이시한 20대 여성 같은 마을이다. 천하 길치인 내가 드레스덴에 이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독일의 소도시를 찾아오게 된 건 마을 안으로 돌아 흐르는 개울이 참 예쁘더라는 데친샘의 말 때문이었다.

데친샘의 개울 운운하는 말을 듣는 순간 크로아티아의 한 마을이 생각났다. 마을길을 따라 흐르던 개울이 마당 안으로 들어와서 뒤로 돌아나가던 집의 스무 살 어린 처녀. 어여쁜 그 여자애와 그 마을이 생각나서 얼른 가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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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안동처럼 강이 돌아나가는 마을을 체코에서는 크룸로프라고 한다. 독일에서는 뭐라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무슨 용어가 있을 것이다. 강이 아니라 개울이어서 없으려나.

세브니츠역에 11시40분에 도착해서 두 시간 남짓 마을을 돌아다녔다. 왜 책을 읽다보면 그럴 때 있잖나. 다음 장이 궁금해 마음이 급해지는 거. 오늘 이 마을을 돌면서 느낀 내 마음이 그랬다.

아, 예쁘다. 이 길 끝에는 뭐가 있을까. 저 멋진 건물 뒤에는 어떤 건물이 서있을까. 개울이 돌아나가는 저편의 숲은 어떤 모습일까. 저 언덕 위의 집들과 정원은 더 예쁘겠지. 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을은 기똥차게 멋있겠지. 도저히 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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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가 뻑뻑해지도록 걷다가 나를 위해 기다리고 있었던 듯 나무벤치가 놓인 너른 풀밭으로 들어갔다. 뭔가 축축한 느낌에 발밑을 보니 신발 밑창이 다 젖었다. 신고식이네.

약간 흐리던 날씨가 때마침 쨍한 햇볕을 내리쬐어 주기에 신발을 벗어놓고 편하게 앉아 천도복숭아와 포도를 먹었다. 준비성 없는 내가 오늘은 배낭도 메고 먹을걸 넣어왔는데 소풍같은 느낌도 들고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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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도 말랐고 따뜻한 커피로 속도 데워 힘이 나기에 아랫마을로 넘어가 다시 씩씩하게 돌아다녔다. 한 시간 넘게 걸었을 것이다.

거리는 깨끗했고, 개울 따라 난 길은 걷기 편하게 닦였고, 하교하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엄친아 타입으로 보였다. 아이고 어른이고 노인처럼 천천히 걸었다. 이리저리 둘러보며 바빠보이는 건 나같이 손에 카메라폰 든 사람들뿐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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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걸어도 될 만큼 안전하고 질서 있고 깨끗한 소도시를 탐욕스럽게(?) 맛보고 나니 혹시 이런 게 바로 독일인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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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도시 방문 감상을 정리할 겸 카페에 들어가 커피나 마실까 하는데 바람이 갑자기 거칠어졌다. 바람 맞으며 십여 분 돌아다녔으나 제법 규모가 큰 이 마을에 카페가 보이지 않았다. 식사를 안 하면 민폐일 것 같은 레스토랑밖에 눈에 띄지 않았다. 한 군데, 마마보(MA MA B0)라는 카페 간판에 커피잔이 그려져 있기에 반가워 뛰어갔더니 문을 닫았네. 아, 진짜 데친이나 세브니치나 왜 이러니, 니들.

역시 독일은, 아무리 소도시라도 소소한 재미에는 약해. 괜한 어깃장을 놓으며 세브니츠역으로 서둘러 갔다. 역무원이 한 명도 보이지 않는 역에서 벽에 붙은 기차시간표를 훑어보니 16시 18분 출발하는 차가 있다. 아이고 잘됐네. 세찬 바람에 훌쩍이던 코를 풀고 잠시 앉아 기다리니 기차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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