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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노래 XI

처음 사랑을 하면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by 헬리오스

처음 사랑을 하면 아무것도 막을 수 없다.


계절은 깊은숨을 쉬고 있습니다.

가을걷이가 끝난 들판의 줄무늬들은 그녀가 지나가며 적어놓은 쓸쓸한 편지 같고,

떨어진 낙엽 위 노랗고 앙상하게 줄지어 선 나무들은 기다림 속에 메말라버린 내 마음을 닮았습니다.


나의 사랑은 무수한 기억의 조각들에 불과합니다.

달리의 그림 속 모래 위에 놓인 시계처럼, 시간은 더 이상 흐르지 않고,

그 녹아내린 시계의 곡선처럼 우리는 서로의 품 안에서 끝없이 이어집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따스함, 스치는 눈빛, 그저 한 걸음씩 나아가던 발걸음과 나누었던 숨결,

그 모든 것이 흐릿하게, 그림 속 시계처럼 더디게 녹아내리며 우리는 우리 둘만의 우주 속에 갇혀 버렸습니다.


가을을 가둔 황금빛 나무들 사이의 빛은 다가오는 겨울 속에서도 여전히 희미한 따스함을 품고 있습니다.

나는 끝없이 펼쳐지는 들판을 바라보며, 그 속에 겹겹이 숨겨진 봄날의 장미꽃잎을 떠올려 봅니다.

그 기억의 흔들림 속에서, 나는 여전히 그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분홍빛 안개가 바다를 덮었습니다.

수평선은 사라지고, 하늘과 바다는 하나로 흐려집니다.

푸르스름한 안갯속에서, 나는 그녀가 걸어오는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아득히 멀지만 다가오는 발소리,

그 무거운 고요 속에 담긴 사랑의 울림이 전해옵니다.

푸른 안개의 침묵이 깨지고 두 개의 발자국이 이 풍경 속에 새겨집니다.


이제 그리움 속에 숨겨두었던 시간들이 다시 조용히 피어오릅니다.

서로의 눈빛이 겨울의 첫눈처럼 쌓여가고,

차가운 도시의 불빛 속에서 우리는 우리만의 빛을 키웁니다.

불어오는 바람은 차갑지만,

우리의 온기는 가늘게 불어오는 숨결 속에 묻어 따뜻이 서로를 감쌉니다.

이제 다시, 그리움의 무게를 덜어내며 우리는 겨울을 함께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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