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래저래 환장할 봄
벚나무야, 조팝나무야 좀 쑤셔서 겨울 동안 어떻게 살았니?
저 가지에는 몇 송이, 이 가지에는 몇 개.
쪼물쪼물 꽃 수놓고 싶어 어떻게 견뎠니?
積算溫度(적산온도) 106도를 채워야 꽃이 핀다는 벚나무야.
그 온도를 맞추기 위해서 날마다 까치발 들고 햇살을 보듬었겠구나.
꽃숭어리 건져내려고 뜬눈으로 아침을 맞았구나.
긴 준비기간에 비해 꽃들이 너무 일찍 사라졌다.
한꺼번에 쓸고 간 연분홍 고갯길이 심심해서 어쩌라고.
그 길이 허전해서 어쩌라고.
이리도 일찍 떠나갔는가.
일말의 아쉬움도 이별가도 없이 꽃이 졌다.
연분홍 치마도 입어보기 전에 꽃잔치는 서둘러 멍석을 접었다.
내년에 또 올게.
그것이 유일한 위로였다.
아낙들은 시커먼 비닐봉지에 들녘의 봄을 담았다.
쑥 목대에 칼침을 놓고 봄을 낚아채고 있다.
쑥 무덤들이 소리 없이 숨을 죽인다.
짧은 생애가 이 봄날을 또 휘젓고 지나간다.
spring 은 용수철을 의미하듯이 봄은 도발적이다.
놀라운 탄성으로 붕 떠서 또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용수철.
그래선가 이 계절 봄은 툭 튀어나왔다 톡 사라지는 습성이 있다.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통해 젊은이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던 18세기 후반,
그 봄도 잔혹한 봄이었다.
독일의 사실주의 화가 빌헬름 엠베르크(1822~1899)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가만두지 않았다.
그의 풍부한 감수성으로 그려낸 그림에는 다섯 명의 처녀들이 등장한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가 책을 읽어주고 있다.
흰 드레스를 입고 모자를 쓴 아가씨와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아가씨.
팔을 턱에 괴고 앉은 아가씨, 허리를 꼬고 돌아앉은 아가씨.
이렇게 다섯 명의 아가씨들은 표정에서부터 벌써 짝사랑의 주인공 `베르테르`를
열심히 연민하면서도 질투하고 있다.
저토록 `로테`에게 일편단심인 `베르테르`처럼 나를 사랑해 줄 남자가 없을까.
아가씨들은 찾아와 주지 않는 연인을 갈구하고 또 갈원 했을 것이다.
자신들을 소설 속으로 퐁당퐁당 밀어 넣으며 빠져들었을 것이 분명하다.
화가의 손에 그 소설을 그려내지 않으면 못 배길 정도로 소설은 시대를 관통했다.
그것은 그만큼 소설이 가진 비중이 크다는 걸 증명한다.
`로테`의 사랑을 차지하지 못한 `베르테르`는 결국 권총자살이라는 비극을 맞았다.
그 사회는 `베르테르 효과`를 반영한 젊은이들이 극단적인 자살로 이어졌던 암울한 봄이었다.
분홍봄이 아닌 검은 봄.
"이봐요, `괴테`양반.
이왕이면 찐하고 달착지근한 수밀도를 그려낼 것이지 어쩌자고 검은 봄을 그려내서
이 사달을 만들었소?"
`에취`
"예끼, 이 사람아 나도 이렇게 까지 내가 대 스타가 될 줄 몰랐잖아.
이렇게 애들이 우르르 죽을 줄 알았다면 꽃분홍으로 했겠지.
젠장, 그렇다고 그렇게나 많이 죽어버리면 난 어쩐다냐. 내가 살인자가 된 거잖아"
한 작가의 영향력은 이처럼 단호하고 매웠다.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는 괴력이고 열풍이었다.
뜨겁되 차디찬 봄이었다.
어디 봄날의 비극은 그것뿐이랴.
오페라 `나비부인`의 배경도 쓰린 봄이다.
찰싹찰싹 얼굴을 때려주고 싶은 아린 봄이다.
"어떤 갠 날 보일 거야.
먼 수평선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배가 나타나.
하얀 배인데 항구로 들어오면서 고동을 울릴 거야.
보여? 그이가 온 거야!
복잡한 시가지로부터 작은 점처럼, 한 남자가 언덕을 걸어 올라와.
누굴까? 뭐라고 말할까?
먼 데서 부르겠지.
"나비!"
나는 대답하지 않고 숨어 기다릴 거야.
놀라게 하려고, 또 조금은, 내가 죽을 거 같아서."
`나비부인`은 미군에게 속아 가짜 결혼을 한 `게이샤`가 결국 목숨을 끊는 비극을 담고 있다.
`푸치니`가 오페라 `나비부인`을 만든 배경도 동아시아의 봄이다.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집에서 저런 독백을 했다.
꽃들이 만발한 이 찬란한 봄날에 `베르테르`도 `나비부인`도 아픔을 진하게 겪었다.
그렇다고 이 봄이 그렇게 야속하기만 할쏘냐.
어둠을 걷어내는 교황곡이 스러져가는 봄날을 역전시킨다.
슈만의 `봄의 교황곡 1번`이 그렇다.
인기 피아니스트 `클라라`와의 결혼이 이 곡을 완성 짓는데 한 몫했다.
`클라라`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를 불사하고 결혼을 성사시킨 `슈만`.
그는 쓴 봄을 단 봄으로 회복시킨 주인공이다.
그래서 봄은 다시 황홀하다.
인생의 봄이고 사계 중의 여왕인 봄은 이렇게 음악으로 다시 살아났다.
四季(사계)의 첫 번째로 슬픔도 경탄도 쑥버무리를 만들어 놓은 봄.
엎치락뒤치락 암울함과 환희를 업고 이렇게 또 봄은 왔다.
조선시대 풍속화가로 유명한 신윤복(1758~1814)의 화풍에도 봄이 그대로 녹아있다.(하단 그림 참조)
하녀의 쟁반에 놓인 술상과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두 남녀의 신발이 어쩐지 수상하다.
`아니 도대체 이 양반 술상을 들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신윤복의 유쾌한 은유는 이 봄을 다시 환장곡으로 변모시켰다.
양반들을 풍자하면서 봄을 유쾌하게 이끌고 간 화가의 익살스러운 성정이
다시 봄을 분홍빛으로 와락 일으켜 세웠다.
담 모퉁이에 피어난 소담스러운 꽃이 찬란한 봄을 노래하고 있고,
술상을 받쳐든 하녀는 로맨틱 무드가 익어가는 저 방 안의 분위기를
어쩌지 못해 서성거리고 있다.
얼굴까지 발그레 물이 들었다.
`에햄` 하면서 양반 흉내를 낼 수도 없고 어쩌란 말이냐.
까딱 잘못했다간 양반에게 머리채를 뽑힐 처지고 보면,
이 봄은 다시 메타포가 된다.
칫칫! 양반은 무슨 냥반.
로맨틱인지 로맨슨지 나는 모르오.
어서 술상이나 받으시오.
낄낄낄.
호호호.
껄껄껄.
깔깔깔.
남녀의 웃음소리는 곧 화사한 봄을 방안 가득 불러 들였다.
서양의 봄이나 동양의 봄이나 사랑으로 인해 슬프고 사랑으로 인해 달콤하다.
조선의 양반가에서 펼쳐지는 어설픈 유희도, 사람 마음을 결정적으로 흔든 것도 다 봄이다.
온통 꽃들이 피어나는 주변은 사랑의 촉매제가 되어주기에 충분했다.
그렇다면 이 봄도 길게 드러누워야 맞다.
금세 떠나면 안 되는 거다.
슈만이 클라라와의 사랑에 성공한 것처럼, 이 봄을 나는 오래도록 껴안고만 싶다.
아주 길게 오래도록.
짧아서 아쉽고 그래서 더 붙잡고 싶은 이 봄.
떨어져 내리는 연분홍 꽃잎이 내 머리에 잠시 앉았다가 떠나버렸다.
나를 위로했건만 나는 그 위로가 턱없다.
그래서 아주 깊게 요놈의 봄을 포옹하고 싶다.
봄은 四時長春(사시장춘) 이어야 한다. 그게 맞다.
신윤복 화백께서 필자 그림을 보신다면.
"어쭈, 이거 봐라. 그래 이왕 그렸으니 싱크로율 50% 줄게."
부끄러워 저 소나무 뒤로 숨고 싶어라.
그래도 현대라서 안주 가짓수가 더 많네. 푸하 푸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