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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우 김윤후 Sep 28. 2019

평강공주 콤플렉스(something about us)

평강공주 콤플렉스(something about us)


 그 날부터 내 생애 처음으로 사내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러나 달콤한 장밋빛을 상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잠들기 전 내일 새벽 다섯 시까지 그녀의 모교 앞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곳에서 두 시간 정도 춤 연습을 한 후에 인천으로 넘어가 공식 연습에 참여하자는 것이었다. 그녀와 나의 첫날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다음날 일찍 일어나 그녀의 모교 앞에서 하품을 하며 서 있었다. 계산을 해 보니 수면 시간이 다섯 시간도 되지 않았다. 그녀가 당돌한 성격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새벽부터 같이 연습을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동이 틀 무렵 저 멀리서 검은색 옷을 입은 작은 체구의 좀비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걸어오고 있었다. 나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내 앞까지 졸린 눈을 하며 터벅터벅 걸어온 그녀가 말했다.

  "깔끔하게 하고 나왔네? 나는 이만 닦고 나왔는데. 준비할 시간에 더 자지 그랬어?"

  그녀가 눈을 비비며 앞장서 걸었다. 나는 천천히 캠퍼스를 구경하면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묶인 머리를 보니 정말 머리를 감지 않은 것 같았다. 무슨 옷을 입고 나갈까 몇 번이나 고민한 자신이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를 따라 건물에 들어갔다. 

  오전 다섯 시 반의 이른 시간이었지만 빈 연습실을 찾기가 힘들었다. 몇 번이나 노크를 하면서 확인한 후에야 겨우 하나를 발견했다. 

  "이게 대한민국 최고의 예술대학교 수준이야, 다들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오빠도 열심히 해야겠지?"

  연습실로 들어서면서 그녀가 말했다.  

  나도 대학시절에는 밤을 새우며 연습을 했다는 말을 하려다 매서운 눈으로 날 보고 있는 그녀를 향해 천천히 박수를 세 번 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옷을 갈아입고 연습을 시작했다. 그녀의 졸린 눈은 어느새 호랑이 눈으로 변했다. 그녀는  내 동작이 틀리거나 정확하지 않으면 '다시'라는 말을 외치며 이전과 같은 방법으로 연습을 시켰다.

  그렇게 그녀와 나는 두 시간 동안 쉴 틈 없이 안무 연습을 했다. 연습이 끝나자 그녀가 오늘은 첫날이어서 가볍게 연습을 한 것이라며 시간이 없으니 빨리 옷을 갈아입으라고 재촉했다. 옷을 갈아입고 급행열차를 타기 위해 학교에서 역까지 달려갔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그녀가 나에게 개운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옷을 갈아입어도 몸의 열기가 식지 않아서 계속 땀을 흘리고 있는 나를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해야 되니?" 

  원래 연습실에 일찍 가서 개인 연습을 하고 공식 연습에 참여하는 나로서는 새벽 다섯 시부터 이렇게 연습을 하는 것에 대해 의구심이 생겼다. 

  "전 작품 사람들 다 떨어졌다면서? 그 사람들 생각해야지. 그리고 오빠는 프로잖아?"

  '전 작품 사람들'과 '프로'라는 단어가 그렇게 나를 할 말 없게 만들 줄은 몰랐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자 그녀가 나를 보면서 해맑게 웃었다. 

  운 좋게 붙어 있는 두 자리가 나서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인천으로 갈 수 있었다. 그녀는 부족한 잠을 자야겠다고 하면서 이어폰 한쪽을 건네며 본인이 좋아한다는 노래를 들려주었다. 노래는 팝송이었다. 뮤지컬 곡이 아니면 듣지 않는 내겐 생소한 곡이었다. 

  그녀는 내 어깨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나의 노래와 연기는 무난하지만 춤은 못 봐주겠다며 지금은 약점을 보완해야 한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다 들리거든."

  "들으라고 하는 소리야."

  그녀는 내 손을 꼭 잡고는 잠에 빠져들었다. 나를 위해 새벽부터 춤을 가르쳐 주는 그녀가 고마웠다. 그녀가 잠이 깨지 않게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항상 혼자서 연습을 하러 가던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함께 가고 있다는 현실이 신기하게 느껴졌다. 한 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가 좀 더 길었으면 좋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보름도 남지 않은 연습 기간이 아쉽다는 생각도 들었다. 작품이 끝나면 그녀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이 너무 좋아서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새벽부터 개인 연습과 공식 연습을 하면서 춤 실력이 나날이 늘게 되었다. 안무 감독님은 춤이 일취월장한다며 격려해 주었고 주위 배우들도 실력이 많이 늘었다며 응원해 주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쉬는 시간마다 나를 붙잡고  '다시'를 외쳤다.  

뮤지컬 작업의정석2017(배우 진세인)

확실히 사내연애는 마성의 매력이 있었다. 거울을 통에 눈이 마주칠 때마다 윙크를 하는 것, 연습을 하는 중간에 사람들 속에서 스쳐 지나가다 손이 닿으면 잠깐 잡는 것, 식사 시간에 떨어져 앉아서 메신저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행동들이 우리의 피로를 잊게 해 주었다. 

  지하철을 타고 연습하기 위해 오고 가는 시간들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녀는 내가 배우를 하면서 겪었던 희로애락들을 흥미 있게 들어주었다. 그런 그녀와 함께 있으면 내가 이 길을 걷게 된 이유가 어쩌면 이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서로 가지고 있는 예술관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순수예술을 하면서도 돈을 버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고 나는 상업예술을 하면서도 돈이 중요한 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서로 상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것은 나에게도 와 닿는 말이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예술관과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했다. 나에게 그녀는 후천적 소울메이트였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더 깊어져 갔다. 

  그녀의 아버지는 경기도권에서 큰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수수하게 옷을 입고 꾸밀 줄 모르는 그녀가 부유한 집 딸이었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럼에도 그녀가 쓰는 말과 행동에 기품이 있었기 때문에 쉽게 납득이 갔다. 

  그녀는 어머니가 우리의 모든 과정들을 다 알고 있다고 하면서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는 그녀가 조금은 독특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나와의 관계를 시작했다고 으스댔다. 그리고 우리가 알맞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알맞은 시기에 만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며 묘하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엔 씁쓸함도 묻어났지만 내가 좋다는 말에 행복을 느끼며 생각했다.

  '우리 사이에는 뭔가 있으니까.'

  공연이 시작된 어느 날 그녀와 새벽 연습을 마치고 공연장으로 갔다. 공연 세 시간 전부터 메이크업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평소보다 조금 일찍 도착한 후 무대에서 몸을 풀고 나서 메이크업을 받았다. 그런데 그녀를 찾을 수가 없었다. 공연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녀도 그녀가 보이지 않아 전화를 했다. 그럼에도 전화를 받지 않아 그녀가 걱정이 되었다. 불이 꺼진 극장 안으로 들어가 휴대폰으로 라이트를 켜고 소대(배우가 대기하는 무대 옆 공간)를 확인했다. 그녀가 배를 잡고 누워 있었다. 나는 너무 놀라 그녀에게 업히라고 소리쳤다. 그녀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자신은 다른 사람들보다 생리통이 심한 편이라고 하면서 지금 이대로 있고 싶다고 했다. 순간 새벽에 연습을 할 때 그녀의 표정이 평소보다 좋지 않아 보였던 걸 떠올렸다. 컨디션이 조금 안 좋은 정도로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바닥에 쓰러져 있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는지는 전혀 몰랐다. 

  나는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대기실로 가서 지갑을 들고 나왔다. 스마트폰으로 공연장 근처에 있는 약국을 검색하며 걷다가 우연히 관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연출님을 만났다. 그는 무대 분장을 하고 어디로 가냐고 물었다. 당황해서 우물쭈물하고 있는 나에게 연출님은 무대분장을 하고 밖으로 나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나는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여 사과를 한 후 다시 대기실로 들어갔다. 아픔을 참으면서 새벽 연습을 함께 하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기실 뒷문을 지나 무대 세트를 옮기는 건물 뒷문으로 극장을 나왔다. 연출님에게는 죄송하지만 머릿속에는 그녀에게 생리통 약을 사다 주어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극장이 조금 외진 곳에 있어서 부근에 약국이 없었다. 근처 편의점에도 약이 없었기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한 정거장을 지나서야 약국을 찾을 수 있었다. 약국을 갔다 오는 동안 지나가는 사람들이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무대 화장을 하고 있는 게 눈에 띄어서 그랬겠지만 나는 괘념치 않았다. 

  약을 들고 그녀가 누웠던 소대로 갔다. 그녀가 없었다. 극장 여기저기를 둘러보다 분장실에서 메이크업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분장실에서 태연한 척 메이크업을 받고 있는 그녀가 대단해 보였다. 생리통 약을 손에 쥐어주자 어디서 났냐고 그녀가 물었다. 프로의식을 들먹거리면서 설교를 할 것 같아 동갑내기 여배우에게 구해왔다고 얼버무렸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메이크업을 해주던 선생님이 놀라는 얼굴을 했다. 

  "어머! 배우님 화장 무너졌어요!"

  약을 구하러 다닐 때 날씨가 더워서 땀으로 화장이 다 지워진 모양이었다. 나는 놀라 무대에서 춤 연습을 해서 그런 것 같다며 둘러댔지만 메이크업 선생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녀는 메이크업 선생님에게 나머지는 자신이 마무리할 테니 대신 내 분장을 리터치 해달라고 했다. 메이크업 선생님의 잔소리를 들으며 다시 메이크업을 받는데 그녀가 분장실 거울을 통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도대체 얼마나 아팠길래 아까 그렇게 누워 있었어?”

  "배를 칼로 계속 찌르는 느낌이었어."

  “칼에 질려본 적 있어?”

  내 물음에 그녀는 말없이 나를 째려보았다. 나는 웃으며 그녀의 시선을 피했지만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도 새벽 연습을 같이 해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그녀가 나와 동갑내기인 여배우에게 물어보았다며 약을 사다 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가 손가락으로 내 이마를 튕기며 연설을 시작했다. 무대분장을 하고 밖으로 나가 돌아다니는 내가 배우로서 프로 의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럼 진정한 프로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고 물었다. 

  "약을 가지고 다녔어야지"

  그녀가 대답했다. 

  그리고 남자 친구로서도 프로가 되어야 한다고 진지하게 말했다. 꼭두새벽부터 '다시'를 외치던 그녀에게 나는 아무런 반박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배우답지 못한 행동을 했지만 후회는 없었다. 배를 움켜잡고 바닥에 누워 있는 그녀를 본 그 순간만큼은 배우보다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니까. 걱정이 돼서 내일은 새벽 연습을 쉬고 공연장에 곧바로 가는 게 어떠냐고 그녀에게 제안했다.

  "죽으면 영원히 쉴 수 있어."

  그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 후로도 우리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연습을 하며 공연을 했다. 그렇게 삼 개월에 걸친 인천시 뮤지컬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공연 쫑파티에는 전 작품의 주인공 선배도 찾아왔다. 그 선배와 인천시 뮤지컬의 주인공 선배들과 함께 어울려 꽤 오랜 시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쫑파티가 마무리될 즈음에 연출님이 술자리에 들렀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그동안 수고했다며 나라는 배우를 알게 돼서 너무 행복했다고 말했다. 이어 다음 작품은 공영방송국에서 주최하는 뮤지컬이라고 했다. 객석도 천오백 석의 큰 규모이기 때문에 오디션 준비를 잘해야 한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열심히 하겠다는 대답을 하고 선배들과도 준비를 잘해 보자며 서로를 응원하며 마무리 지었다. 

  나와 그녀는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일찍 쫑파티 자리에서 나왔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로 가면서 그녀에게 삼 개월 동안 고생 많았다는 말을 했다. 그녀는 내 어깨에 기대어 졸면서 내일부터 연습을 도와주겠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연출님이 말씀했던 오디션을 생각하며 집으로 향했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연습실을 빌려 다시 연습에 매진했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는 그녀의 '다시'를 들어가며 땀을 흘렸다. 보름 후 오디션을 보게 되었다. 항상 그렇듯 많은 배우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후회 없이 준비해 온 전부를 오디션장에서 보여주었지만 안타깝게도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연출님에게서 연락이 왔다. 대한민국에 훌륭한 배우가 많다는 것, 그들과 경쟁해서 이기기 위해서는 더 노력해서 좋은 배우가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너무 아파하지 말라는 말과 함께.

  좌절감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동안 연습을 하고 공연을 하면서 실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나는 풋내기 배우였던 것이다. 문득 지하철에서 그녀가 들려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무용을 하면서 깨닫게 된 것은 예술이라는 것이 죽을 만큼 노력해서 자신이 정상에 올랐다 싶어도 위를 올려다보면 또 다른 정상이 나온다는 것이었다. 정말 내가 예술이라는 것을 너무 쉽게 본 건 아니었을까.

  며칠 후 그녀를 만나서 불합격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녀는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면서 내 어깨를 토닥였다. 자신은 내가 오디션을 본 작품에서 안무 감독을 보좌하는 조안무 겸 무용수로 콜이 왔다는 말에 내 마음은 더욱 복잡해졌다. 

연극 택시안에서 2019(배우 김민호  엄윤아)

 그녀는 초등학교 이학년 때부터 지금까지 십오 년 넘게 무용을 해 온 자신과 같은 대우를 바라지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에겐 안무가로서 뮤지컬계에 진출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지만 거절의 의사를 보냈다는 것이었다. 나는 놀라서 다시 하겠다고 안무 감독님에게 말씀드리라고 설득했지만 그녀는 듣지 않았다. 나와 시간을 보내면서 학교 졸업작품을 올리는 데 열중하고 싶다는 얘기였다. 공연을 하면서도 충분히 졸업작품을 준비할 수 있다고 말해도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무명배우를 만나는 것에 대해 주변의 만류가 심했지만 내가 그냥 좋다고 했다. 그러면서 훌륭한 배우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며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도록 노력해달라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후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내가 오디션에 합격했다면 그녀가 그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무명배우인 나를 만나는 것을 반대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능력 없이 민폐만 끼치는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감독님은 오빠를 못 믿었지만

  나는 오빠 믿는다. ㅋㅋㅋ

  지금 이 모습이 오빠의

  목적지가 아니라

  정거장이라는 거    


  그녀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메시지를 읽자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아까보다 더 많은 눈물이 났다. 옆에 앉은 사람이 측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얼른 눈물을 훔치고 버스에서 내려 지하철로 갈아탔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부터 더 독한 마음을 먹고 연습을 했다. 그녀는 그런 내 곁에서 항상 응원을 해주었다. 그 연습 시간들 덕분에 당시 꽤 인기가 있던 뮤지컬 오디션에 합격해서 멀티맨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그전에 몇 번이나 관람했을 정도로 감동 깊게 본 작품이었다. 두 번이나 오디션을 봤다가 떨어졌었는데 세 번째 오디션을 보고 나서야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 누구보다 기뻐해 주었다. 배우로서 멀티 역을 경험해 본 적이 없었던 터라 개인적으로는 큰 도전이었지만 이런 기회가 온 것이 너무 행복했다. 공연을 하면서도 그녀는 몇 번이나 관람을 하러 와 주었다. 

  프로정신을 강조하는 그녀의 메소드에 영향을 받아서였을까. 공연을 하면서 일체 술자리를 갖지 않았다. 내일 올 관객들에게 최상의 컨디션으로 공연을 싶었다. 하루는 공연이 끝나고 남자 배우들끼리 술자리가 잡혔는데 나는 술은 마시지 않고 얼굴만 잠깐 비치고 귀가했다. 다음날 극장에 오자 몇몇 배우들이 숙취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들 평소보다 컨디션이 좋지 못했고 합도 맞지 않았다.  극이 감동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에 관객들은 만족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아쉬운 공연이었다. 공연이라는 것이 혼자 열심히 한다고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오자 로비에 앉아 있던 한 중년 아저씨가 본인이 암환자라며 내게 악수를 청했다. 지금 암 치료를 받고 있는데 오늘 공연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졌다며 꼭 더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좋은 공연을 보여주어서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로비를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전날 술을 마시지 않은 게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대라는 것이 절대 가벼운 마음으로 쉽게 설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그 이야기를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그녀는 프로는 돈을 받는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며 그 깨달음을 절대 잊지 말라고 했다.

  그렇게 한 시즌을 행복하게 공연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배우 페이가 입금이 되지 않았다. 대표는 미안하다며 배우들에게 기다려 줄 것을 호소했지만 결국은 시즌이 끝날 때까지 돈은 들어오지 않았다.  나에겐 돈보다 무대에 설 수 있는 것 자체가 소중했다. 배우에게 돈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믿었다. 반면 그녀는 프로라면 돈을 받는 것이 당연한 권리라고. 그러나 대표에게 연락을 해 봐도 지금은 힘들어서 줄 수 없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화가 났지만 일개 배우인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문득 대학로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모교 선배의 일화를 떠올렸다. 그도 공연을 한 후에 배우 페이를 받지 못하자 자기 공연이 없는 날 객석에 앉아 있다가 공연 중간에 무대에 올라가 돈을 내놓으라며 드러누웠다는 것이다. 그렇게까지 하고 나서야 밀린 페이를 받아냈다고 한다.

  며칠 후 페이가 밀린 대표가 하는 다른 공연을 수소문해서 관객으로 잠입해 들어갔다. 나도 모교 선배처럼 공연 중간에 무대에 올라가서 돈을 내놓으라고 깽판을 칠 심산이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페이를 받아내야 했다. 몇 달 동안 페이를 받지 못해 통장의 잔고가 바닥이었다.

  공연이 시작되면서 나는 묵묵히 공연을 관람했다. 배우들을 보니 학교를 갓 졸업한 것 같은 어린 배우들이었다.  

  '저들에게 오늘 무대가 얼마나 소중할까.'

  순간적으로 과거,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시절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분명 오늘의 공연은 그 자체로 그들에겐 몹시 값진 시간일 터였다. 그리고 내게 악수를 청했던 암환자 관객도 생각났다. 내가 그 공연을 망쳐도 될지 관람하는 내내 고민했다. 뛰쳐나갈 타이밍을 재면서도 무대 위의 배우들이 공연을 하면서 행복해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연 중간이 돼서도 결심을 하지 못했다. 결국 나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극장을 나왔다. 배우라는 게 연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는데 살면서 별짓을 다 해본다 싶었다. 그럼에도 그 어린 친구들의 행복한 미소가 잊히지 않았다.

  '잘한 거야.'

  스스로에게 위로를 했지만 통장 잔고는 그대로였다. 풀이 죽은 채 집으로 가고 있는데 잠깐 보자며 그녀에게서 연락이 왔다. 조금 늦은 시간이었지만 나도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녀의 집 근처에 있는 역 앞으로 가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나타났다.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졸업작품 연습을 하다 발목을 접질렸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녀를 업고 집 쪽으로 향했다. 그녀는 쑥스러워하면서도 크게 싫지는 않은 것 같았다. 업고 가면서 오늘 있었던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러자 뒤에서 살짝 목을 졸랐다

  "그럼 그렇지!"

  그녀는 웃으면서 나는 다시 태어나도 그 모교 선배처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지만 이 험난한 세상에 나처럼 착하게 살면 이용만 당할 거라며 강해져야 한다고 투덜거렸다.    

  "남의 등에 업혀서 말은 잘한다? 내가 착한 사람이니까 너 업어주지."

  "프로 남자 친구는 원래 이렇게 하는 거야!"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하게 목을 조르던 그녀는 집 근처에 도착해서도 한 바퀴 더 돌 것을 주문했다. 목표를 이루지 못한 벌의 의미도 있지만 오늘을 잊지 말자는 의미도 있다면서. 집 근처 동네를 한 바퀴 더 돌았다. 목표를 달성한 우리는 집 앞에 있는 계단에 앉았다. 

  "살을 좀 빼는 게..."

  "오빠. 나 요즘  졸업작품 때문에 예민해."

  낄낄거리며 웃었지만 그녀는 조용히 하라며 내 멱살을 잡았다. 나는 웃음을 멈추고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근처 가정집에서 음악 소리가 들렸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 같았다. 자세히 들어보니 내가 좋아하는 클래식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이라는 곡이었다. 그녀가 내 어깨에 기대더니 말했다

  "조용히 하니까 좋잖아."

  우리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 곡을 들었다. 순간 그녀와 지하철에 앉아 인천을 왔다 갔다 하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세월이 빠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그 기억들이 반년 전의 일이었던 것이다.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쯤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을 해 보았다.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녀를 만나서 참 다행이다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물었다.

  "그거  알아?"

  "뭐를?"

  그녀는 말을 끊고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몇 번이나 보채자 인천에서 했던 뮤지컬에 투입될 무용수가 원래는 자신이 아닌 다른 선배였다는 것이었다. 집도 인천에서 가깝고 성격도 사교성이 넘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사교성이 넘치고 인천에서 가까이 사는 사람이라면 그 작품을 하기엔 좋았겠지만 나와는 연인으로까지 발전할 가능성이 없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내가 웃으면서 물었다

  "우리 사이엔 뭔가 있다고 바보야."

  "그런가... 모르겠네."

  나는 아까보다 더 크게 웃으면서 대답했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선배가 연습을 하다 발목을 다쳐서 한 달 정도 쉬어야 했는데 한 달이 지나도 완치가 되지 않아서 자신이 대타로 투입됐다는 얘기였다. 무용계를 떠나려고 마음먹고 있던 자신을 그 선배가 반 강제로 그곳에 투입시켰다는 것이었다.

  "무용을 그만두려고 했어?"

  내 질문에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녀는 다시 한번 내 멱살을 잡으며 말했다.

  "이 바보 온달은 언제까지 나를 평강공주로 살게 할 거야? 일일이 다 가르쳐 줘야 돼?"

  그녀는 나와 연애를 하며 평강공주로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아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언제쯤 바보 온달이 훌륭한 장군이 될 건지 답답해하며 설교를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그녀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뭔가 있다는 거지?"

  "이제야 알아먹네."

  그녀는 웃으며 내 어깨에 기댔다. 우리는 다시 아무 말 없이 가정집에서 흘러나오는 제목 미상의 클래식 음악을 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용기를 내서 그 공기의 고요함을 깼다.

  "그거  알아?"

  "뭐를?"

  호기심 가득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녀에게 말했다.

  "내 인생에서 누구보다 너를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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