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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쉐비 Apr 02. 2023

나는 오늘도 일터를 걷는다

일을 하면 더 걷게 되고, 걸으면 즐거움이 샘솟는다

   오늘은 어디 가서 밥을 먹을까. 부임 초부터 한동안은 점심 도시락을 싸고 다녔다. 그러다 어떤 계기로 아내의 수고도 덜 겸 도시락을 중단하기로 하였다. 벌써 1년 가까이 되었다. 날마다 정처 없이 밖에 나가 밥을 사 먹는다는 것이 처음에는 다소 어색하고 불편하였다. 그렇다고 스트레스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언제부터인가 비록 어느 낯선 식당에 가서 혼밥을 할지언정 밖으로 나가는 것은 차라리 즐거운 고민거리로 변하였다. 얼른 먹고 나가 걸을 생각에 설렘과 기대와 호기심이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 참에 익숙한 세상을 구석구석 다시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 때문이다. 건물, 골목, 산책로, 각종 수목과 화초, 흐르는 물, 사람들, 먹거리, 추억의 편린 등 끝이 없다. 거기에는 항상 어떤 형태로든 새로운 면모가 깃들어 있다는 기대와 확신이 있다. 걷는 동안은 채굴하듯 기쁨과 쾌감을 느끼며 세상의 아름다움과 삶의 경이로움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젊었을 때의 혼밥은 문제가 있는 것이지만, 지금 나에게는 당장 어디로 튈지 구상을 마무리하는 시간이다.




   매일 같은 집, 혹은 같은 메뉴만을 먹을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맛이 시원찮거나 분위기가 마음에 안 드는 집을 두 번 갈 일도 없다. 뭔가 매력이 있는 집이면 가끔 직원들과 같이 가서 먹기도 한다. 지긋해진 나이에 함께 일하는 식구들과 외식하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시간은 즐겁다. 자연스레 서로 간의 생각을 교환하고 확인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돼 좋다. 위로와 격려 차원에서 가끔씩 그렇게 한턱내는 일은 확실히 필요하고 유익하다. 자주 할 까지야 없지만, 점심시간을 빌어 종종 그런 자리 만들 필요는 있어 보인다. 퇴근 시 운전을 해야 하므로 술을 곁들인 저녁 회식은 아예 하지 않기로 하였다. 허심탄회하게 소통하고 단합을 다지는 기회는 사실 점심시간 밖에는 없다. 




   날마다 가는 곳이 다양해지고 지리적 범위도 넓어졌다. 입맛이 까다롭지 않아서 일단은 메뉴를 미리 정하고 길을 나선다. 도중에 괜찮아 보이는 집이 있으면 곧바로 들어가 서슴없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일도 자주 생긴다. 예전에는 전혀 그러지 않았는데 사뭇 바뀌어 있는 나를 그런 순간에 발견하곤 한다. '일찍이 그랬다면 나의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몰라... 아쉽다.^^' 당초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궤도 이탈은 날 것 같은 쾌감을 가져다주는 때가 많다. 뼈해장국, 팥죽, 칼국수, 수제비, 옹심이, 설렁탕, 추어탕, 염소탕, 갈비탕, 돼지불고기 짜글이, 중국집, 청국장, 매생이 굴국밥, 순댓국, 쓰시, 물회, 메밀국수, 생선구이, 파스타 등등 즐기는 목록이 나날이 늘어난다. 날마다 메뉴를 바꿔 먹는 점심은 혼자서 떠나는 맛집기행과 다름이 없는 신나는 시간이다. 뭔가 새로운 맛, 색다른 집이 어디엔가 또 있을 텐데. 끝없는 호기심은 자꾸만 가보지 않은 곳으로 향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보폭이 더 먼 곳까지 확장된다.




   지난달, 인근의 가정의학과 병원에 갔다가 뜻밖의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고지혈증 약이 떨어져서 처방전 하나 받으러 갔던 날이다. 부탁하듯 말하면 그냥 발급해 줄 줄 알았다. 그런데 안 된다고 했다! 의사 선생님은 옆에 나를 앉혀놓고서는 약을 그렇게 무턱대고 먹으면 안 된다고 타이르듯 말했다. 우선 검사를 해보고 결과가 좋으면 굳이 안 먹어도 되지 않겠냐며 나의 대답을 재촉하듯 기다렸다. 너무나 당연한 소리여서 순간 대답하기가 멋쩍었다. 잠시 후, 혈액검사 결과가 아주 좋게 나왔다고 알려주었다. 수치가 정상 범위로 돌아와 있다는 것이었다. 전혀 예상하지 않았고 약을 계속 먹을 생각만 하고 있었기에 그것은 나에게 의외의 놀라운 뉴스였다. 그동안 처방 약 외에도 양파즙과 오메가 3을 꾸준히 먹은 일이 떠올랐다. 특히 매일같이 꾸준히 걸었던 덕분이 크지 않았을까 하고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사를 하고 그 추이를 지켜보자는 말에 흔쾌히 대답을 해주었다. 평생 먹어야 하는 줄 알고 꼬박꼬박 때를 맞춰 복용해 온 치료약이었는데 더 이상 먹지 않아도 된다니. 먹는 약을 하나 줄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이날 의사 선생님의 담담한 판정은 내가 더욱 열심히 걷는 촉매제가 되었다.




   일하면서 가급적 많이 걸으려고 한다. 지상이든, 지하주차장이든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육안으로 시설물을 점검하는 일은 매일 반복하는 일과의 필수 코스다. 단지 안에서 걷는 걸음이 3,000보 남짓 되는 적은 양이어서 항상 아쉽다. 특히 지하주차장 천장에서 누수되는 곳은 없는지 점검하는 일도 빼놓지 않는다. 얼마 전, 천장에서 회백색 물이 차 지붕에 떨어져 얼룩이 졌다며 손해배상을 요구한 민원인의 사례는 경각심을 높여주었다. 일을 하며 걷는 시간의 비중이 늘었고 상당해졌다. 일주일간 걸은 시간과 거리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 앱(App.)을 열어보면 뿌듯하다. 하루 8 천보를 목표로 했는데, 요즘은 1만 보도 훌쩍 넘는 날이 많아졌다. 스마트폰의 앱을 열고 기록을 확인하는 순간은 유쾌하다. 색종이 휘날리고 동시에 휘파람 소리 섞여 울려 퍼지는 환호성 소리에 기분이 째진다. '그래, 바로 이 맛이야^^' 매일 그렇게 축제 같은 기분을 느끼며 마무리할 수 있어서 참 좋다. 뿌듯하다.




   걷기로 말하자면, 이탈리아의 은퇴한 기자 출신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를 잊을 수 없다. 베네치아의 마르코 광장을 출발하여 중국의 시안까지 12,000km를 걸으며 그가 썼던 기행문을 인상 깊게 읽은 건 꽤 오래전의 일이다. 걷는 것의 완벽한 행복감을 길고 긴 여정 속에 담아 썼던 그의 책 제목처럼 일터에서 역시 '나는 걷는다'. 오늘도 어제처럼, 내일도 또한 그렇게 일하며 걸을 것이다. 걸으면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를 이제 잘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일은 수단이나 도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걷지 않으면 밋밋한 일상에 아무런 일도, 흥(興)도 일어나지 않는다. 세상의 아름다움과 기쁨과 경이로움은 도처의 익숙한 것, 사소한 것 속에 깃들어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저 앉아만 있을 수야 있겠는가. 더구나 이제 막 봄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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