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을 고민하다 힘들게 얻어낸 내 선택이었기에 주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평생 힘들게 일을 하며 개미처럼 살았답니다~'라는 사회 시스템에서 벗어나 일상의 웃음을 되찾고 있었다.
마침 일도 재미가 있었다. 100개 지점을 허덕이며 진두지위하다가 1개 지점의 담당자로 있으려니 일이 눈에 훤히 보였다. 업무를 할 때마다 왜 이런 지시가 내려왔는지-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지- 어떤 사람이 고생할지- 전후사정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고 빠르게 파악할 수 있으니 웃음이 났다. 본사와 지점의 입장을 함께 느낄 수 있으니 큰 틀에서 보는 시야가 생겼다. 본사에서와 같은 월급을 받는데 일이 재밌네? 땡큐!
그뿐만인가, 새로운 사람들을 잔뜩 만나면서 인간관계를 많이 경험하게 되었다. 본사에서는 막내로서 팀원들이나 거래처 분들을 제외하면 새로운 사람을 만날 일이 적었다. 우리 팀과 타 팀과의 유연한 관계, 우리 팀과 거래처와의 갑을 관계로 이루어진 만남 속에서 쭈욱 함께 가는 것이었다. 내 업무를 잘 해내면 + 더 많이 하면 인간관계는 자연스레 따라왔다.
반면 지점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사람들이 바뀌었다. 회사 내 발령이 잦았기에 우리 팀도 자주 바뀌었다. 거래처들도 담당자가 바뀌기 부지기수였고, 최고짬밥 지점장님도 해마다 바뀌며 분위기에 적응해야 했다.
언제 바뀔지 모르는 변화는 주기적으로 긴장을 하게 만들었고, 그 틈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직무와 휴일을 지키기 위해 살아남아야 했다.
본사와는 '다른' 어려움 속에서 자연스럽게 '사람'을 배우기 시작했다. 내 위치는 중간 관리자로 소규모의 우리 팀 사람들을 이끌며 지점장님의 의중을 맞추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내가 스트레스를 덜 받으며 일을 해내는 것이 필요했다.
삼박자를 잘 해내기 위해서는 함께 일하는 '사람'이 중요했다. 사람마다 성격이 다 달랐고, 생각이 달랐다. 상사에게 YES 할 때와 팀원들을 서포트 할 때를 융통성 있고 강단 있게 해내야 했다. 사람으로 속상해서 울고 사람으로 환하게 웃었다.사람을 알아가는 경험을 하는데 월급도 주네? 땡큐!
여전히 사람 관계는 가장 어려운 부분이긴 하다. 그런 과정들이 스트레스를 받을 때도 있었다만, 나는 꽤 잘 적응하고 있었다. "재밌게."
그렇다, 내 삶에 여유를 찾았다. 난 지점 체질이었던 것이다.
오홍홍~ 웃음이 생겼다. 차가운 첫인상으로 가까워지기 어렵다는 평을 듣던 나였는데, 어느 순간 서글서글 능글능글 거리는 내공이 조금 늘었다. 시간적 정신적인 여유가 생겨서 그렇기도 하다만, 많은 사람들을 보고 느끼고 부딪히며 익힌 삶의 내공이 나를 성숙하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제 10년 차. 짬도 찰 만큼 찼고, 눈에 훤히 보이는 업무로 시원시원하게 주 4일 근무하고 있는 나에게 '신의 직장'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아이러니하게도 경력을 내려놓으니 삶의 행복이 내게 왔다.
대체 경력이란 뭘까??
꼭 있어 보이는 팀에서 연속성 있는 일을 해야만 경력인 것일까 고민을 했다.
수많은 인간관계 속 유연한 태세, 잦은 발령으로 다져진 적응 갑 제너럴리스트(스페셜리스트, 전문가의 반대)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성적 지표들은 경력이 아니란 말인가.
이직을 하거나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면 업무가 연속되는 경력이 필요하겠다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만들기 쉽지 않다. 회사는 우리를 그렇게 놔두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는 것보다 되고 있는 것을 즐기는 것이 더 쉽지 않을까. 내게 주어진 각각의 경험을 선으로 쭉 연결 지어서 스토리를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어디서든 무엇을 하든 즐거워하며 배울 점을 찾으려 했다. 어떤 것이든 얻는 경험은 있었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풍성해졌다.
부끄럽게도 조선 시대 '사농공상' 제도처럼 사무직 '선비'가 옳다는 편견과 좁은 시야로 둘러싸여 있던 것은 나였다. 내가 정해왔던 직업인 교사, 공무원, 공기업, 대기업의 순서처럼 안정적인 직장만이 전부인 줄 알았던 옹졸한 과거의 나였다. 그만큼 우리나라 사회에서 외줄 타기처럼 떨어지면 안 되는 길인줄 알고 실패할까 걱정해하며 살아왔다.
사회의 공정성을 늘 외치면서 막상 내가 그 끈을 잡고 놓지 않았음을. 사무직을 박차고 나와보니 알겠다. 다양한 직업을 인정할 수 있는 존중의 마음은 내가 경험하니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좋은 대학 나와서 이 월급 받으며 9급 공무원 해?'
'좋은 대학 나와서 타일 바르는 전문가야?'
'연봉 1억을 받는다고 해도 현대차 생산직이랑 안 만날래.'
가끔씩 이슈화되는 말들이 있다. 겉으로는 직업의 평준화를 외치면서 마음속으로는 끊임없는 서열 의식으로 편견과 내려다봄이 자리 잡고 있음을 느끼곤 한다.
내가 현장직이 되니, 관련된 직업군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교사도 하루종일 말하고 서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현장직이었다. 우리가 여행 갈 때 만나는 공항과 역사직원, 쇼핑할 때 마주하는 백화점 마트직원도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올라간 현장직이 있었다.
발령이 잦아 순환 근무가 잦은 직업으로 검사, 공기업 직원, 교사, 영업 사원이 보였다. 전문적인 공대 기술직군은 많은 확률로 현장에 있었다. 약사도 약을 조제하며 대면 업무가 많은 현장직이었다. 고객 대면이 많은 서비스직일수록 현장에서의 사람 경험이 중요했다.
단순히 넘겨가며 무심했던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 새로운 인생 방향의 전환이었다.
모든 직업은 눈에 보이는 연봉과 눈에 보이지 않는 복지,외부적 사회적 시선 속에 불안한 외줄 타기이다. 편협한 세상 속 그 사이의 적절한 간극을 찾으며 내가 너무 말라가지 않도록- 사회와 타협해 나가며 나 자신을 지켜가며 살아가야 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