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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선들 seondeul Dec 23. 2021

결산 스물아홉

노란 방의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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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산 스물아홉 _ 노란 방의 2021




1월부터 12월까지

눈 쓸다 끝난 겨울이 천 년 전 같은데 어느새 다시 눈을 쓰는 계절이 왔다. 한 장씩 뜯던 달력도 얇아지더니 남은 장수가 훌훌하다. 결산 스물다섯, 여섯, 일곱, 여덟에 이어 아홉에 오기까지 시간이 습자지 같다. 이쯤 되니 연말이 다가오면 결산 해야지 생각이 든다. 도대체 뭘 쓰지, 올해는 한 게 없는데, 뭐했니. 중얼 중얼. 다이어리와 사진첩을 훑어보니 이게 다 올해야? 싶다.      


길지 않다 생각하며, 주어진 평화를 소중하게 여긴 지도 몇 년이 지났다. 이젠 이게 내 모습이란 걸 조금은 알게 되었다. 깊은 행복에 끼는 구름 같이, 남겨진 두려움은 불청객 같았다. 성장한 지금은 행복과 두려움, 기쁨과 슬픔을 함께 버무려서 수영할 수 있다.      







아무 생각이 없는 상태를 인정하게 되었고, 호흡 소리를 들으며, 눈을 쓸 듯 뇌 속에 쌓인 먼지들을 쓸어낼 수 있게 되었다. 일상의 무게 추가 기울 때, 다시 중심을 잡는 법을 여러 개 만들어 두었다. 책과 잠, 떡볶이, 고양이, 가족과의 저녁시간, 산책. 여기에 더해 올해 추가된 항목은 요가와 등산, 따뜻한 차. 이런 것들이 평안하지 않은 날의 나를 지탱해 줄 것이다.      


올해는 2권의 다이어리, 69개의 일기를 썼고, 20개의 영상을 만들었다. 2번의 특강을 했고, 66권의 책을 사고, 90권의 책을 읽었다. 계절 마다 엮은 일기가 3편, 읽은 책들을 짧게 정리한 독서노트가 4편, 계절 사이마다 화실에서 있었던 일을 담은 소식지가 4편이다.       






잘 때 제일 착한 버터

여전히 좋은 것 첫 번째, 해리포터. 일러스트 판으로 읽어도 재밌더라. 서바이벌 프로그램. 모든 종류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나의 밥 친구. 시집. 이혜미 시인의 <빛의 자격을 얻어>가 특히 좋았다.


고양이의 털 냄새. 자고 있는 버터에게 몰래 다가가 맡는 정수리 털 냄새는 잘 말린 빨래를 고소하게 구운 냄새가 난다. 그 냄새를 얻기 위해 하루에도 몇 번 씩 엄청 비굴하게 친한 척을 한다. 정수리 냄새 킁킁, 배에 귀를 대고 그릉 거리는 소리 듣기. 영양제 링거랑 효과가 비슷하다. 그리고 초당 옥수수. 옥수수 싫어파 인간이었는데 초당 옥수수 때문에 여름을 기다린다. 짧은 철을 기다렸다가 잽싸게 두 박스씩 조진다.   





   


새롭게 좋은 것. 매일 뜯는 일력 달력. 하루하루 얇아지는 달력을 보며 빠르게 지나는 시간을 실감한다. 하루에 한 장 씩 뜯는 게 이렇게 깊은 성취감을 줄 일인가. 내년을 위해 넘기는 일력을 미리 사 두었다. 잘 넘겨보자.


얼죽아 회원, 강등되다. 소화가 잘 되지 않는 탓에 커피와 생이별하는 기간이 있었다. 따뜻한 커피까지 품었는데, 이제는 따뜻한 차가 좋다. 펄펄 끓는 물에 작두콩 한 조각을 넣어서 하루 종일 우려먹기. 맹물은 비리고, 비염에 좋다하니 마셨는데 이제는 습관이 되었다. 최근에는 생강차에 빠졌다. 엄마가 만들어 준 걸 보약처럼 마신다. 뜨거운 물을 텀블러에 따른 후에, 쇠숟가락을 담가둔다. 생강청을 뜨거운 수저로 한 숟갈 가득 푹 떠서 휘휘 저어준다. 손발에 파로 피가 돌아 따뜻해져서 저절로 노곤해진다. 저녁을 먹고 다 치운 후에 한 잔 하는 기쁨이 크다. 줄어가는 유리병을 보고 얼굴이 생강색이 되었더니, 엄마가 시간을 내어 또 만들어 주셨다. 오예!






필라테스와 요가
여름부터 겨울까지 등산

그리고 요가. 일주일에 세 번, 기운 나면 네 번까지 빠지지 않고 꾸준히 가는 중이다. 요새는 요가가 일상의 튼튼한 축이다. 3년 반 배운 필라테스와 새벽에 갔던 헬스, 홈 짐을 지나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종이인간 개미 할머니인 내가, 운동인의 대열에 낀 게 소름 돋게 어색해서 쭈뼛거리게 된다. 이제야 보통 사람만큼 체력이 된다.      


일기를 보면 요가의 내용이 많았다. 오늘도 안 되던 동작들이 신기하게 되어 기뻐서 집까지 둥둥 떠왔지만, 그 기분을 또 금방 잊고자 했다. 매트에서 느낀 기분은 모두 거기에 놓고 다시 또 나아 가야하니까.     

 

잘 되진 않지만 비교하지 않는 법도 배웠다. 스스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세요. 평생 할 것이니 조급하지 말자는 마음으로 그냥 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호흡을 통해 생각을 비울 수 있는 것도 멋진 일이다. 주로 등산을 하며 그걸 연습한다. 뭐 맡겨 놓은 게 있다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등산을 간다. 이것도 올해 든 습관이다. 같은 길을 여러 번 간다는 건 시적인 일이다.      


그리고 요가 옷, 너무 예쁜 게 많아서 현기증 난다. 이런 이야기 끝에 나와서 신빙성이 떨어지지만 정말로 옷 욕심이 없는 편이라 얻어 입는다. 초등학생 때부터 옷을 물려 주던 언니와 여러 지인들이 박스 채로 보내주면, 뜯어서 마음에 드는 것을 입은 지 몇 년이다. 충분히 멋지고 마음에 들었고, 환경을 생각하면 그게 덜 죄책감 들었다. 계절마다 옷을 사지 않은 지 몇 년이 흘렀는데 요가 옷에 눈이 돌아 반년 간 일고여덟 벌 샀다. 이제 그만 살 예정. 진짜로!     

     






100층짜리 집, 젤리과슈와 종이접기도 있다. 하트 종이접기는 깊게 중독되어 수련을 하듯 바구니 하나에 가득 차게 접었다. 좋아하는 것을 함께 좋아하고 싶어서 필름 카메라와 책을 나눴다. 더 큰 마음도 받았다.     


지나간 수많은 인연들도 생각난다. 끊어질 듯 이어진 사람들과, 이어질 듯 끊어져 버린 사람들. 아쉽기도 했고 시원하기도 했다. 남은 생애에도 그대로 있어줄 것만 같은 조각들도 있다. 곧 6주년인 화실도 찾아주시는 분들에게 감사한 마음이다. 특히 길고 깊게 이어오는 학생들은 내가 이 일을 하며 행복한 이유에 큰 지분을 갖고 있다. 쬐끔 긁히더라도 더 열어두고, 받은 것을 넘어 베푸는 인간으로 성장하게 해주셨다.  


     





고양이들과의 인연도 깊다. 마당 있는 집에 온지 이제 곧 여섯 해. 길냥이로 태어나 마당냥이 되어 함께한 고양이들이 13마리다. 그 중 두 마리는 오래 전 고양이 나라로 돌아갔고, 작년과 올해에 두 마리의 고양이들이 함께 돌아갔다. 이년 반 만에 돌아온 고양이도 있다. 며칠 째 어안이 벙벙하다. 죽었다 생각했는데, 살아줘서 너무 고마워서 보고 눈물이 났다. 이렇게 엮여 사는 것도 신기하고 슬프고 감사하다.







버지니아 울프의 정원과 일기. 캐롤라인 냅, 시인들, 안산과 김연경. 스우파 스걸파. 노는 언니와 골때녀. 넷플릭스의 앤, 문명특급. 초등학생 때부터 이어온 팬 권윤덕 작가. 멋진 나의 친구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엄마. 힘을 주는 여성들 덕분에 올 한해가 빛났다. 각자의 이유 때문에 중심에서 멀어지거나, 뛰고 있지만 뒤처지더라도 서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나아갈 믿음이 생길 것이다. 그 믿음에 실오라기 같은 힘을 보태본다.                 






밤새워 이야기하다가 영화 3편이 지나간 제주도.

비 오는 날의 김창열 미술관

여름의 원주, 그리고 뮤지엄 산.  

나의 존재가 딱히 유용하지 않았던 친구네 밭.

살고 싶어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한 속초.

무화과 치즈 빵에 침 줄줄 흘렸던 구례의 빵집.

영원한 지평선에서 헤엄쳤던 포항.

모든 게 평화로웠던 부산.

부산시립 미술관의 이우환 작품들과 내츄럴 와인.

마지막이야, 하며 끝까지 즐긴 옥상 파티.      


모두 금방 지나간 일 같다. 서른을 앞두고 마지막 이십대의 한 해를 결산하며 덤덤한 마음이다. 설레고 괴롭고 했던 기분은 오래 지나온 날의 한 지점처럼 자연스러운 상태가 되었다. 굽이치는 그래프를 지나 얻게 된 덤덤한 횡보 또한 흐려지며 내부로 녹아질 것을 안다.       






봄의 찔레꽃과 겨울의 별

2021이라는 숫자가 익기도 전에 끝이 났다. 2022라는 숫자는 2도 부자에 곡선도 많고, 모양이 예쁘니까 좀 더 부드럽게 쌓일 것만 같은 막연한 기대를 가져본다. 새로운 고민들을 지고, 삶의 변곡점 앞에 서 있다. 잘 해나갈 거란 믿음이 지난 날 들의 나로 인해 생겼다.      


며칠 전, 19살의 겨울에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서른이 되는 크리스마스 날, 뉴욕의 트리 밑에서 맥주를 마시자고. 뉴욕도 아니고 약속했던 사람도 인연이 다 했지만, 지나온 이십대를 기념하고 싶다. 가족과 좋아하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와인 한 잔과 함께 나누려 한다. 오래오래, 또 깊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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