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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지현 Mar 04. 2024

다꾸를 만난 날

첫 만남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6공 다이어리에 단단하게 물려 있는 여섯 개의 철제 링 부분을 열어젖혔다. 스크랩 다꾸(다이어리 꾸미기)를 할 때에는 제본 다이어리도 좋지만, 역시 펀치로 구멍을 뚫어 내 마음대로 종이들을 꽂아 넣을 수 있는 6공 다이어리가 좋을 것 같다.


이 6공 다이어리는 얼마 전 온라인의 텐바이텐 문구사에서 구입한 것으로, 뒷표지에 해당하는 부분이 투명 아크릴 판으로 재단되어 있어 보통 다이어리들보다 가격이 비쌌다.


그럼에도 결제 버튼을 눌렀던 것은 내가 다꾸를 취미 생활로 결정한 후 첫 다이어리로 들일 만큼 예뻤기 때문이다. 예쁘다? 지갑이 열린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문구에 이 정도 돈을 써도 되는가?


마음에 잠시 흔들림이 있었지만, 다이어리가 예쁘니 금세 불었던 의문의 바람은 다시 사그러든다.


사실, 이전까지 나는 문구나 스티커, 다이어리에 깊이 관심을 가져본 적 없다. 예쁜 문구란 어릴 때 갖고 놀던 잠깐의 유희. 서점에 가면 한 쪽에 진열되어 있는 귀여운 것들, 하지만 내게 필요하지는 않은 선상에 있는 어떤 것들. 그저 그 뿐인 것들이었다.


...... 일단 복잡한 생각들은 뒤로 미뤄 놓자.


흥얼거리며 디자인이 되어 있는 아름다운 페이지들을 넘겨 감상한 후, 가장 앞 페이지 한 장을 진중하게 쳐다보고 조심스럽게 링에서 떼어냈다.


하얀 책상 위에 다이어리에서 떼어낸 종이 한 장을 내려놓곤, 홍대 소품샵에서 구입해 온 엽서 한 장과 스티커들을 몇 장 조심스럽게 옆에 내려놓았다.


끝이 구부러진 날카로운 핀셋 한 개와 갖고 있는 마스킹 테이프들, 그리고 기록을 위한 검정색 펜 하나도 꺼냈다. 이렇게 다이어리를 꾸밀 준비를 마쳤다.


살짝,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빼꼼 열린 방문 너머를 쳐다보았다. 네 살배기 아이는 저 쪽 방에서 자고 있다.


이제부터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다.




그러니까, 이건 내 생일 즈음에 생긴 일이다.


"은영아. 난 요즘 '다꾸'라는 거에 빠져 있다."


몇 개월 만에 만난 친구 박진희가 내게 그렇게 말하며 제 다이어리를 보여주었다.


딱 봐도 심상치 않게 꾸며진, 다이어리라고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예술 작품처럼 생긴 그 무엇. 나는 내게 건네진 그 '작품 덩어리' 같은 것을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다꾸' 가 뭔데?"

"엉, 말 그대로야. '다이어리를 꾸미는' 거."

"그거 어릴 때 한참 하던 거잖아."

"그치. 근데 요즘 완전 핫해. 아니지. 핫한 지도 꽤 됐지."


그녀는 기대감에 찬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이제 내 감상을 들려줘야 할 차례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그녀의 다이어리로 내 시선을 내렸다.


진희가 하고 있던 것은 바로 빈티지 다꾸. 조금 오래돼 보이는 옛날 종이들과 레이스, 압화와 같은 서정적인 장식물들이 그녀가 준 종이 위를 빼곡히 채우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나는 정직하게 감탄했다.


"우와. 진짜 예쁘다."

"그렇지? 이게 하다 보면 끝이 없어. 나 요즘 집에서 커피로 견출지 염색도 하고, 수제 종이도 만든다. 이거 한다고."

"대단한데."

"그래서 말인데."


진희가 들고 왔던 쇼핑백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냈다.


"이건 일단 내 취향으로 들고 온 다꾸 물품들인데, 너도 한 번 해보라고."

"어?"

"스트레스 좀 풀었음 해서. 이거 보기보다 엄청 맺힌 것들이 좀 풀리거든."


진희가 내게 준 것은 간단하게 꾸며진 6공 다이어리와, 알파벳, 압화 스티커들. 반짝이 스티커들, 그리고 스스로 직접 꾸며준 수제 봉투였다.


어리벙벙해 있는 나에게 진희가 설명을 덧붙였다.


"일단은 네 취향을 모르니까 대충 챙겼는데, 집에 가서 한 번 검색해 봐봐. 넌 빈티지 말고 다른 장르가 더 끌릴 수도 있거든. 너하고 나하고 취향이 좀 다르긴 하잖아."

"그건 그래."


'장르' 가 무엇인지, '취향' 이 무엇인지. 자세히 물어본 바로는 이 '다꾸'라는 것에도 꾸미는 스타일이 다양하게 있는 모양이었다.


당시의 나는 육아에 지친 지 꽤 오래 된 상태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육아를 힘들어하는 '스스로에게' 지쳐 있었다.


원래부터가 민감하고 예민한 기질로 태어나, 매일 약으로 어느 정도를 잠재워 놓지 않으면 내 내면의 통제할 수 없는 짐승이 발버둥쳐 누군가를 해할 것 같은 불안감에 휩싸여 버리곤 하는 것이었다.


어쨌든, 생일이라고 나를 생각해 선물을 준비했을 진희가 고마워 나는 웃었다.


"고마워. 집에 가서 꼭 검색해 볼게."

"진짜 해봐, 너하고 잘 맞을 것 같아."

"오키."


그렇게 집에 돌아가서 나는 친구가 준 다이어리에 최선을 다해 꾸미기를 해 보았다.

그러나 첫 작품은 역시 첫 작품인 법. 만족할만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고, 두어 번 더 꾸미기를 해 봤지만 뭔가가 부족했다.


뭐가 부족하지?


그렇게 나는 아이가 자는 시간, 어린이집에 등원한 시간 등 비는 시간을 활용해 '다꾸' 라는 검색어로 인터넷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깨달았다.


세상엔 정말 종이 위에 많은 걸 적고 그리고 붙이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사람들이 그 내용을 공유하고 있다는 걸.


미술학원을 다녀본 적은 없다. 하지만 자신 있는 분야가 있다면, 뭔가를 예쁘게 만들어보는 거다. 종이 위에 나만의 세상을 꾸며보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마음 속에 움트는 게 느껴졌다.


진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장 집을 살 여력은 없어. 가구를 살 돈도 없어. 하고 싶은 건 너무 많은데, 현실의 벽은 높아. 근데 이 종이 하나에만큼은, 이 작은 종이 안에서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그렇게 생각해서 다꾸를 하게 된 것 같아."


아이의 글자 포스터가 점령한 벽면, 매일매일 아니 매 시간 매 시간을 치워도 계속해서 어지러워지는, 신혼 때와는 너무나 달라진 집 안. 나는 진희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내 시간과 공간을 갖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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