ㅂ. 불안에 대하여
나는 불안 덩어리다. 작은 두 손위에 생굴처럼 미끈하고 물컹한 것이 식지 않은 김을 내뿜고 있다. 그것은 불안이다. 이제야 내 안의 불안을 꺼내놓을 수 있다.
이 불안은 어디서 오는 걸까? 시시각각 숨어있던 불안이 예고도 없이 불쑥 고개를 쳐들었다. 그건 있지 않은 일들에 대한 상상이었다. 그 상상이 조그마한 불안을 키웠다. 불안은 점점 디테일해지고 농밀해져 어떤 모양새를 갖춘다. 칙칙폭폭. 칙칙폭폭. 불안이 연기를 뿜으며 길게 늘어진다. 덜컹덜컹 자신을 뽐내며 주위를 휘젓고 다닌다. 정신이 까무룩 해진다.
오랫동안 불안의 기차를 타고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나도 모른다. 단지 스치는 풍경에 눈을 두고 시간을 축내고 있었다. 마음속에는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언제나 가보고 싶은 곳들이 있다. 계절이 없는 나라, 해가 지지 않는 시간, 끝도 없는 사막, 바닥이 보이는 투명한 바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 기차의 더 좋은 앞자리를 향해 나아가는 방법을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당장 안정을 찾아야 하는 나는 입석 표를 가진 사람. 점점 자리에만 민감해지는 사람. 누구 옆에 앉을까. 누가 나를 구원해줄까. 운명의 상대만 기다리는 사람. 그러나 아무도 운명의 상대로 만들려고 하지 않는 사람.
사랑의 터널을 지날 때마다 어딘가 분명 함께 내릴 수 있는 종착역이 있을 거로 생각했다. 그러나 혼자 그린 미래는 암울한 현실만 일깨워줬을 뿐 달라진 건 없다. 누군가는 성격이 안 맞고 또 누군가는 마음이 안 맞았다. 누군가는 내리기 싫다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나와 끝까지 가고 싶지 않다고 했다. 허깨비 같은 사랑은 언제나 현실에 졌다. 시작부터 끝까지 가봐도 붙박인 좌석 소지자와 입석 표를 가진 나는 맞지 않는 사람. 지독한 일상의 반복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아무리 울어도 아무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
아무리 고통스러워도 방법을 찾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는 일들이 있다.
나는 이 모든 불안의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은 옆문을 부수고 나가는 일.
정해진 자리에 누군가 제대로 앉기를 바라는 욕심은 아무 소용이 없다. 내리는 시기도 따로 없다. 언제나 바로 지금.
나는 천천히 일어나 문으로 간다. 오른손에 힘을 주고 문을 열면 현실의 풍경이 빠르게 지나가고 어디선가 살아있는 아카시아 냄새가 난다.
혼자 뛰어내릴 수 있을까?
무섭지만 하고 싶은 일.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나는 달리는 순환 열차 옆문으로 힘껏 뛰어내린다. 그렇게 온몸이 부서지고 난 뒤에야 기차는 멈춘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 홀로 거울 앞에 서 있다.
두 손 위에는 축축한 감촉만 남았다. 거울에 오랫동안 불안으로 찌든 얼굴 하나가 나를 바라본다.
그러나 불안은 변화의 시작이라는 걸 안다. 불안하다는 건 변화하고 싶다는 내면의 또 다른 목소리.
나는 이제 그 목소리를 따라 길고 느린 산책을 시작한다.
@클레멘타인
ㅂ. 불안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