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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루비 Nov 24. 2023

살가운 살구 님

살구 님은 일흔아홉으로 수영반에서 나이가 가장 많다. 쉰넷에 처음 수영을 배웠고, 지금의 수영장에 다닌 지도 10년이 넘었다. 수영장까지 가려면 느린 걸음으로 15분쯤 오르막길을 걸어 마을버스를 타고 일곱 정거장을 지나야 한다. 한때는 셔틀버스가 집 근처까지 왔으나 코로나 이후 운행되지 않는다. 땀이 질질 흐르는 여름이나 눈이 꽝꽝 얼어붙은 날이면 더 고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럼에도 좀처럼 빠지지 않는데, 수영장에 가지 않으면 하루가 너무 길기 때문이다.


수영장에 도착하면 천천히 옷을 벗고 샤워를 한 뒤 약간 늘어져 주름이 잡히는, 아들이 온라인쇼핑몰에서 구매해 준 알록달록한 수영복을 입고 꼬불꼬불한 은빛 파마머리에 수영모를 쓴다. 아홉 시 정각이 되면 호루라기가 울리고, 준비체조가 시작된다. 살구 님은 사람들 사이에 구부정하게 서서 체조를 따라 한다. 마지막 순서인 ‘피티체조’는, 가만히 선 채 팔만 위아래로 춤을 추듯 팔랑거린다.


깊게 팬 주름 사이로 빛나는 까만 눈동자,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살구 님은 살갑고 장난기가 많다. 낯선 이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고, 친한 회원들에게 시답잖은 농담을 건넨다. 머루 님에게, 잠영을 잘하니 멍게 따러 가자고 조르고, 매실 님을 ‘엄마’라고 불러 타박을 듣는다. 딸기 님 등을 주무르다 냉이 님 등에 업히기도 한다. 살구 님의 농담에 누군가는 퉁을 놓다가도 형님 진짜 못 말린다며 같이 웃어젖힌다. 때때로 썰렁하거나 지루할 뻔한 순간에도 살구 님 덕에 온기가 감돈다. 어느 날 ‘걸어가기’ 시간에, 살구 님은 어깨춤을 덩실거리며 “울긋불긋 꽃대궐...”을 흥얼거린다. 울긋불긋한 수영복을 입은, 복숭아꽃, 살구꽃 같은 이들은 킥킥 웃으며 덩달아 흥에 겨워진다.  


살구 님은 힘차게 수영을 한다. 오른쪽 무릎이랑 허리가 아프지만 물에서만은 통증을 덜 느낀다. 살구 님은 특히 접영을 좋아하고 자세도 그럴싸하다. 힘에 부쳐 종종 쉬다가도 접영 순서가 되면 눈을 반짝인다. 누군가 “접영 선수!” 하고 살구 님을 부르면, 살구 님은 냅다 물속으로 뛰어든다.


살구 님 댁과 방향이 같아서 나는 살구 님을 가끔 태워 드린다. 살구 님은 그 보답으로 쑥떡과 인절미, 한방 소화제와 관절에 좋은 엑기스, 사탕이랑 초코볼 같은 것을 건넨다. 아유, 괜찮아요. 먹어. 맛있어. 살구 님은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국에서 태어나 세 살 무렵 압록강을 건넜다는, 소설 같은 이야기, 자식들이 공부를 잘했고 남편과 몇 년 전 사별했다는 이야기. 지금이 제일 편안하고 홀가분하다거나, 꿈에 돌아가신 지인들이 나오는 걸 보니 갈 때가 됐나 보다, 지금 가도 여한이 없다거나... 무슨 소리세요? 오래오래 수영 하셔야죠. 어느덧 목적지에 다다르면 살구 님은 “좋~은 하루”를 보내라는 덕담을 남기고 천천히 내린다. 작은 배낭을 멘 채 반려견 기쁨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싸묵싸묵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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