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28 2022
(커버 이미지 : Martin Luther King National Historical Park에서 역사 사진 전시를 보고 있는 세은이. MLK 부부가 나들이 복장으로 환히 웃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Coca Cola가 태어난 곳 Atlanta, GA"에서 계속
크리스마스 연휴에 9박 10일로 떠나는 미국 동부 로드트립. 총 이동거리 5,100km, 12개 주를 지나는 일정이다. 이 여행을 통해 미국만의 이야기를 보고 올 수 있기를 바라며 먼 길을 나선다.
미국 공휴일 Martin Luther King Jr.'s Day 그리고 우리가 애틀란타에 온 진짜 이유
미국에는 매년 1월 셋째 주 월요일, ‘MLK Day’라는 공휴일이 있다. 학교는 꼭 쉬고, 회사들도 대개는 쉬는 꽤나 큰 휴일이다. 이 날은 마틴 루터 킹 목사(Dr. Martin Luther King Jr. 이하 MLK)를 기념하는, 정확히는 그의 생일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한국인인 나는 MLK에 대해 그저 '인종차별에 저항하였고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암살당해 생을 마감했다.' 정도로만 알고 있다. 한국에서는 그 정도 아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곳 미국에선 휴일로 지정할 만큼 의미가 있는 날이니까 그 유래 정도는 공부해 봐도 되지 않을까. 보통의 미국인에겐 상식일 것이니 내가 궁금하기도 하고, 세은이에게 학교가 쉬는 이유에 대해서도 직접 보여주고 싶다. 보통의 미국 아이들처럼 미국 사회의 상식을 자연스럽게 습득하면 좋을 것 같으니까.
이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 MLK 기념관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정리해서 여행 PPT를 만들어 학교 선생님께 보내 주고 싶기도 하다. 뉴욕에 사는 아이들과 선생님은 아마 책으로만 공부했을 장소이니 우리가 대신 찾아와서 경험을 공유해 주면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아시아에서 온 이방인인 우리가 미국 역사의 중요한 장면들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나의 미국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싶기도 하다. 우리가 미국 사회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는 것, 그래서 미국 사람들조차도 쉽게 가기 어려운 곳에 일부러 다녀왔다는 것을 자랑하고도 싶다.
그런 이유들로 이번 여행 계획을 짤 때부터 MLK의 고향인 애틀란타, 그리고 그의 기념관, 'Martin Luther King Jr. National Historical Park'를 중요 일정으로 넣었다. 일단 찾아가기에 앞서, 나는 MLK의 이야기를 좀 찾아봤다.
애틀란타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MLK. 그는 고등학교를 남들보다 2년 빨리, 15살에 졸업했을 정도로 소문난 수재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선택한 그는 신학대에 진학해서 19세에 대학을 졸업한다. 그 이후, 당시엔 인종 차별이 만연하고 낙후된 애틀란타를 떠나서, 미국 사회/문화/교육의 중심인 북동부 보스턴으로 박사 유학을 떠나게 된다.(1948년 Boston University) 지금도 그렇지만 보스턴은 미국 최고의 교육도시이고 당시 북부는 남부에 비해 인종차별이 노골적이지는 않아서 유학 가는데 적합한 장소였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당시에 애틀란타에 사는 흑인이 혼자 보스턴까지 간다는 건 지금과는 매우 다른 느낌이었을 것이다. 일단 애틀란타에서 보스턴을 가는 건 현재 수준의 안락한 고속도로로도 이동시간이 이틀이나 필요한 엄청나게 먼 길이다. 그 당시는 자동차 기술도, 토목 기술도 지금 같지 않으니 기차나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면서 며칠을 보내야만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대중교통에는 흑인 좌석이 따로 분리되어 있었을 만큼 차별적 시선이 있었을 테니 보스턴까지 가는 1주일 정도가 MLK에게 그리 즐겁고 행복한 시간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해코지를 당할 수 있는 위험한 길이 었겠지. 그 당시 남부 흑인에겐 그런 것이 상식이었을 테니 출발할 때부터 정말 목숨 걸고 떠나는 두려움 섞인 길이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렇게 MLK는 아는 사람이라곤 하나 없는 보스턴에 도착하게 된다. 사시사철 따뜻한 조지아에서 평생을 살아온 20살 어린 소년에게 북부 항구 도시의 혹독한 겨울바람은 얼마나 낯선 느낌이었을까?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이나 바다를 보게 된 건 아닐까? 조지아와 매사추세츠가 같은 나라안에 있기는 해도 기후가 다르고 문화가 다르니 MLK는 이민 온 사람들과 신세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 같다.
더구나 적지 않은 학비, 생활비와 고향에 있는 가족들의 기대마저 감당해야 했을 테니 고작 20살짜리 젊은 아이는 그저 살아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일생일대의 큰 업적이라고 해도 될 것 같다.
그런 MLK는 유학 과정 중에 두 살 연상인 Coretta를 만나게 된다. 그녀는 애틀란타 보다 더 깊은 남부인 앨러바마 시골 도시에서 음악 공부를 하러 보스턴에 유학 온 사람이었다. Coretta는 차별 3종 세트 '남부 & 흑인 & 여성'를 고루(?) 갖춘 사람이었으니 유학 과정에서 겪은 고초는 MLK보다 훨씬 심하지 않았을까? 어쨌든 타지에서 만나게 된 MLK와 Coretta는 유학 과정에서 겪는 수많은 고생과 억울함을 공감했을 것이고 서로 기대며 연인이 되고 결혼에 이르게 된다. 공부를 마친 MLK는 아내의 고향 근처(Montgomery, AL) 교회의 초청을 받아 담임목사로 돌아오게 된다. 아마도 교회 사람들은, 옆 동네인 애틀란타에서 나고 자라서 잘난척하는 놈들 많다던 동부 보스턴에서 박사까지 받고 오신 젊은 목사 MLK가 매우 자랑스러웠을 것이다.
1950년대 미국, 특히 남부에서 목사라는 직업이 단순히 종교인으로 정의되지는 않을 것 같다. 비슷한 시기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은 교육이 부족하고 심지어 문맹도 많았기 때문에 억울한 일이 있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교회 목사는 가난한 자들이 직접 찾아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지식인이다. 목사들은 자신의 본업 외에도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을 대신해 글을 읽어주고 설교를 통해 세상 소식을 전해주어야 했고 때로는 억울한 일을 앞장서서 해결해주기도 했다. 어쩌면 그게 목사의 본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남북전쟁은 오래전에 끝났지만 인종 차별은 여전히 남부의 흑인들에 적용되었다. 가난은 반복되고 교육이 쉽게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의 유일한 지식인' MLK는 자연스럽게 사회운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사회 운동가로써 MLK는 인종차별, 노동인권, 교육 문제 등에 대해 지속적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비폭력 활동을 기반으로 많은 진전을 이루어 낸다. 목사로 부임한 이래 수년에 걸쳐 이끌어 온 사회운동의 결과로 '시민 권리 법(Civil Right Act)'이 제정되고, 이를 인정받아 MLK는 196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다. 그때 그의 나이 불과 서른다섯으로 당시 최연소 수상자였다고 한다.
노벨상 수상 이후에도 인권/노동/교육 환경 개선을 위해 활동하던 MLK는, 우리도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1967년 테네시 멤피스에서 노동자 시위를 지지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39살의 젊은 나이로 총에 맞아 사망하게 된다.
MLK의 역사는 그 자체가 미국 현대사를 이루는 큰 조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이야기가 기록된 장소인 MLK 기념관을 찾아간다.
교회 같은 모습의 Martin Luther King Jr. National Historical Park
MLK 기념관(Martin Luther King Jr. National Historical Park)은 애틀란타 시내 중심가에서 멀지 않은, 한적한 주택가에 위치해 있다. 기념관 위치는 그의 생가 및 아버지의 교회 근처이다. 미국 국립공원청인 NPS에서 직접 관리할 정도로 역사/문화적 의미를 인정받은 곳이라 그런지 평일 아침에 찾았는데도 방문온 사람들이 꽤 있다. 입장료는 무료다.
MLK 기념관은 이제껏 내가 다녀본 미국 박물관들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기념관이라기보다는 건물 자체와 조경이 미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 교회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건물 옆에 MLK의 동상이 아닌 마하트마 간디의 동상이 있다는 점도 좀 특이하다.
(MLK는 간디를 존경하고 자주 언급하며 비폭력주의를 실천하며 활동했었다. MLK기념관이 건립될 때 인도의 간디 기념회에서 이 동상과 몇몇 전시물을 선물로 보내주었다고 한다.)
기념관 내부도 보통의 교회 느낌이다. 미국 박물관을 가면 시청각실부터 가서 관련 영상을 보고 관람을 시작하는 게 일반적인데 MLK 기념관은 이 시청각실이 오래된 예배당 같은 느낌을 준다. 일반적인 시청각실은 영화관처럼 만들어지기 때문에 바닥이 경사지고 푹신하고 편한 좌석이 기본인데, MLK 기념관은 바닥이 평평하고 삐그덕 대는 딱딱한 나무 교회 의자가 빽빽하게 놓여있다.
내가 미리 공부했던 내용들을 영상으로 확인하는 동안, 마치 엄마 따라 주말 예배에 참석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모르는 사람들과 어깨를 맞대고 앉아 삐걱거리는 나무 의자 소리를 들으며 작은 화면으로 MLK의 영상을 보고 있다. 환기가 썩 잘 되지 않아 공기 중에 떠다니는 먼지까지도 눈에 들어온다. 낡고 오래된 시골 교회에 들어온 느낌 그대로다.
만약 이 모든 불편함이 MLK 시대의 교회를 재현하고자 했던 거라면, 이건 지나치게 세밀하다. 반대로 그런 의도가 아니라면, 이 공간은 MLK의 명성에 비해 너무도 낡은 것이다. 나는 MLK의 시대를 체험하게 하기 위한 의도된 연출이기를 바랐다. 이 낡고 오래됨이 연출된 게 아니라 그저 현실의 모습인 것이라면 현재의 미국 사회는 그들 스스로가 지켜야 하는 소중한 가치를 홀대하고 있는 것이니까... 제발 그런것이 아니길.
기념관 내부엔 MLK가 활동하던 시절의 사진을 볼 수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핍박받던 흑인들, 거리로 나선 시위대의 모습 등 다양한 기록을 볼 수 있었는데, KKK단에 의해 살해되어 나무에 목 매달린 흑인 청년의 시신 사진도 놀랐지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전시하고 있는 것 역시나 꽤나 충격적이다.
또 하나 눈에 들어온 사진은, 아이들이 인종 구분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 시기가 1954년으로 되어있는데 불과 100년도 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 놀랍기도 하다. MLK가 암살당한 건 1968년이니까, 학교에서 인종 통합 정책을 시작하고 15년이 지난 후에서도 인종차별에 대한 문제는 여전히 사회 문제로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5년이면 사진 속 꼬마들이 결혼해서 가정도 꾸렸을 법한 시간이지만, 한번 뿌리내린 차별 문화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우리가 MLK에 대해 떠올리게 되는, 'I have a dream...'으로 시작되는 구절로 유명한 그의 연설문과 당시 사진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연설은 인권과 노동 관련 미국 전국 단위 대규모 시위였던 1963년 'The March on Washington'의 한 장면이다. 남북전쟁 중 1863년에 노예 해방 선언을 했지만 100년이 지나도록 흑인들은 진정한 자유인이 아니었고 법적으로도 그들의 자유는 상당 부분 제한받고 있었다. 그러기에 노예 해방을 선언한 링컨 대통령 기념관 앞 연단에 선 MLK가 자신의 꿈을 연설하던 모습은 미국 현대사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 되었다.
연설에서 언급한 몇 가지 꿈 중, '저의 네 아이들이 피부색이 아닌 인격으로 평가받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을 갖고 있습니다.'라는 소박한 꿈은 곱씹어 보면 그 당시 일상에 깊게 뿌리내린 인종차별의 폐해를 짐작케 한다. MLK의 이 소박한 꿈은 그가 이 연설을 하기 10여 년 전에 이미 '법적으로 허용'은 되었던 것이기 때문이다. 이날의 시위와 MLK의 연설은 당시에도 굉장한 화제가 되었고, 이듬해 시민 권리법이 통과되었으며 MLK는 그 업적으로 노벨평화상을 받게 된다.
기념관 옆 MLK와 Coretta King의 묘지
MLK 기념관을 나와서 바로 맞은편 길(Auburn Ave. NE) 하나를 건너면 또 다른 MLK의 기념관인 'Freedom Hall'이 있다. MLK 기념관이 당시 사회상과 사회 운동가로써의 그의 행적에 관련된 곳이라면 Freedom Hall은 MLK라는 사람에 대한 기념관이다.
MLK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주의를 흑인 인권 운동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으로 생각하고 실천했다. 그 때문에 때때로 급진적인 흑인 인권 집단에서는 MLK를 미적지근 온건파로 매도하기도 했지만 혁명 같은 극단적인 방법이 가능하지 않다면 MLK의 행보가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평화주의자라는 말은 겁쟁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혁명가에 못지않은 강한 인내와 끈기를 갖추고 있어야 가능한 삶의 자세이기에 MLK에는 굳은 다짐이 필요했을 것이다. Freedom Hall의 입구엔 비폭력 활동가의 구체적인 행동 원칙 6개가 벽에 새겨져 있었다.
MLK 기념관이 당시의 사회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Freedom Hall은 MLK 개인의 역사에 좀 더 치중되어 있는 것 같다. 어릴 적 생활과 보통 청년으로써의 삶, 목사 시절의 소박한 모습등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나는 정말 앳되고 해맑은 표정을 짓고 있는 MLK의 대학 졸업 사진을 한참 보았는데, 그저 20살 된 어린아이의 모습이라 그의 비극적 최후가 오버랩되면서 서글픈 감정이 느껴졌다. 그런데 바로 한 발짝 옆에는 목사가 된 MLK가 시위 도중 구속되어 찍게 된 첫 머그샷이 전시되어 있었다. 졸업사진에서 친구와 함께 밝게 웃던 청년은 불과 몇 년 지나지 않아 신념으로 가득 찬 눈빛을 이글 거리는 사회운동가가 되어있었다.
서울 전태일 기념관에서도 느꼈던 감정인데, 내가 두 사진을 번갈아 보며 느낀 건, 이 사람은 이런 상황에 놓이지 않았다면 그저 보통 사람으로 개인의 행복을 이루며 살아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그가 속한 사회가 MLK를 투사로 만들었고 다시는 한 개인의 삶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끔 만들었다. 그 덕에 많은 사람들은 자유를 얻고 정의 속에 살게 되었지만 정작 MLK 본인은 너무도 짧은 시간을 살다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한국의 전태일,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삶과 MLK의 행적이 오버랩되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 외에도 MLK가 받은 노벨상과 대통령 자유훈장 및 각종 훈장들도 직접 볼 수 있다. 참고로 노벨상은 생전에, 대통령 자유훈장은 사후에 받은 것이다. 1960~70년대 미국 내 정치 상황에서는, 아무리 노벨 평화상 수상자라고 해도 '체제 전복을 꾀하던 빨갱이 깜둥이 흑인'에게 훈장은 가당치도 않았기 때문에 이 자유훈장은 MLK 사후 10년 가까이 되어서야 수여될 수 있었다. (MLK day가 공휴일로 지정된 것도 그의 사망 후 15년이 지난 1983년부터다.)
Freedom Hall에 기록된 MLK의 장례식 장면들도 눈길을 끈다. 테네시 멤피스에서 암살당한 MLK의 시신은, 5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해 애틀랜타로 돌아왔고 그가 마지막까지 목사로 있었던 아버지의 교회(Ebenezer Baptist Church)에서 장례식이 치러졌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살았던 그의 관은 가난한 남부 흑인들의 오랜 방식 그대로, 노새가 끄는 낡은 수레에 실렸다. 전시된 사진 속 그의 장례 행렬에는 국가 차원의 의전이나 장식은 보이지 않고 대신 그 뒤를 십만 명이 넘는 보통 사람들이 따랐다고 한다. 장례에 실제로 사용된 수레 또한 전시되어 있는데, 지나치게 낡고 허름한 모습에서 오히려 범접하기 어려운 권위가 느껴졌다.
장례식 관련해서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사진은 남편을 떠나보낸 아내 Coretta의 얼굴이다. 잡지 표지로 실린 한 장의 사진. 장례식에 참석해 얼굴을 베일로 가린 채 눈을 감고 있는 모습에는 깊은 슬픔,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체념, 홀로 남겨진 것에 대한 두려움, 평범한 가장이 아닌 위대한 사회운동가의 삶을 선택한 남편에 대한 원망 등 복잡한 감정이 담겨 있는 것만 같다. 그 표정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 전해져 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MLK 기념공원이 개인이나 특정 재단의 소유가 아니라 NPS가 관리하는 연방 정부 소속 공간인 것은 그의 업적과 사상이 미국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받아들여졌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MLK는 그 당시 집권 세력의 시선에서 보면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냉전시대에는 공산주의자라는 누명도 쓰고 끊임없는 감시와 압박을 받았다.
그로부터 시간이 한참 흘러, 대통령이 된 조지아 주지사 지미 카터는 1980년에 MLK 기념공원을 NPS 산하에 두는 법안에 서명하게 된다. 이것은 단순히 공원 하나 만드는 것이 아니라 MLK가 지향했던 방향이 옳은 길이었음을 국가의 이름으로 인정하는 선택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같은 조지아에서 정치인으로 성장한 지미 카터에게, MLK를 중심으로 한 남부의 인권/노동/교육 문제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현실이었을 것이다. 그 오랜 갈등의 맥락을 이해한 지미 카터이기에 할 수 있었던 판단이 아닐까 싶다.
MLK 기념관은 교회라서 그런지 기념품을 파는 곳이 없고 Freedom Hall 1층에 Bookstore가 있다. 아내의 필수 컬렉션인 자석과 기념품 몇 개를 사고 밖으로 나와 MLK와 Coretta King의 묘지 주변에 잠시 머물렀다.
Freedom Hall 앞에 길게 조성된 Reflecting Pool 위에 놓인 킹 목사 부부의 묘는, 그들이 살아온 삶의 굴곡과는 대조적으로 굉장히 평화로운 인상을 준다. MLK의 묘에는 '마침내 자유로워졌다 (I'm free at last. MLK의 연설문에서 발췌한 것)'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 문장은 그가 평생 짊어졌던 사회적 억압에서의 해방뿐 아니라, 한 개인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무거운 과업을 내려놓았다는 의미로도 읽힌다. 그의 아내인 Coretta가 선택했을 이 문장, 그리고 장례식 사진 속 그녀의 표정을 함께 떠올려 보면 그 짧은 문장 안에 그녀가 가졌을 회한의 깊이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모든 관람을 마치고 다시 길을 건너서 MLK기념관 뒤편에 있는 주차장으로 간다. 후문에서 주차장으로 이어진 길은 'Civil Rights Walk of Fame'이라는 이름으로 인권 개선을 위해 노력한 전 세계 운동가들 이름을 바닥에 새겨둔 작은 산책길이다. 아는 이름을 찾아보며 세은이랑 천천히 걷고 있는데 한글로 쓰인 '도산' 안창호가 있는 게 아닌가?! 일제치하 한인 이주민들의 삶에 대해 고민하고 조국의 독립에 일생을 바친 안창호 선생의 이름을 여기서 보게 된 게 반갑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세은이에게도 작은 즐거움을 주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MLK 기념관이지만, 이 일대가 제법 규모 있는 관광지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외진 곳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낡은 주택가에 둘러싸여 너무나도 한적한 분위기에서는 우리처럼 남들 눈에 확 띄는 아시아인 가족은 잠시 길에 서 있는 것조차 부담스럽다. 어쩌면 그저께 주차장에서 봉변을 당할 뻔한 일 때문에 괜히 겁먹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공연히 가족을 데리고 모험을 할 필요는 없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뭔가 아이러니하지만 아름다운 사연의 기념관을 나와 애틀란타의 현실로 돌아오니 어쩔 수 없다. 우리는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서둘러 차에 올라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애틀란타를 떠나 여름나라로, Tampa, Florida
2박 3일간 머물렀던 애틀란타를 떠나 8시간 거리에 있는 플로리다 서쪽 해안의 도시 탬파(Tampa, FL)로 향한다. 우리에겐 겨울마다 추위를 피해 찾아오는 플로리다 로드 트립이 벌써 세 번째이다. 애틀란타 H-mart에서 점심 먹고 출발해서 쉬지 않고 계속 달려서 단숨에 플로리다 경계를 넘었다.
주유를 위해 우연히 들른 도시(Lake City)에서 진짜 남부 스타일 식사를 했다. (플로리다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남쪽에 있는 곳이지만 소위 일컫는 '남부'는 플로리다 주의 북부 지역만 해당한다.)
열심히 운전한 덕에 너무 늦지 않게 탬파 시내에 들어섰다. 지도로 봤을 땐 호수와 바다가 많은 예쁜 도시인데 밤이 되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게 너무 아쉽다. 그 마음을 달래주는지, 바다를 가로지르는 긴 다리를 건널 때 달빛이 물 위에 반사되어 비치면서 우리를 반겨주는 듯했다.
우리는 이번 겨울, 또다시 여름나라에 도착했다.
"Florida West Coast Tempa에서 만난 Salvador Dali Museum"로 계속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