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2022
(커버 이미지 : 화창한 여름날 미국 회사의 가족 동반 야유회. 잔디밭에서 세은이와 헤이니의 줄다리기 한판.)
*뉴욕시티(NYC)로 표기하지 않은 "뉴욕"은 뉴욕 주(NYS)를 의미하며 대도시가 아닌 교외지역입니다.
한국 회사도 안 하는 가족동반 야유회를 미국 회사에서 한다고?
평화롭게 일을 하고 있던 어느 날, 매니저 Yuanjing이 제목에 RSVP(회신 필수)를 달아서 메일을 한통 보내왔다. 파트너 회사에서는 매년 여름에 직원 야유회(Company Picnic)를 했었는데 코비드 끝나고 드디어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다며 나보고 참석 여부를 알려달라고 한다. 그리고 가족 초청 행사니까 아내와 세은이가 꼭 같이 오면 좋겠다고 하면서 참석 인원수를 알려달란다. 첨부파일을 열어보니 장소와 대략의 일정이 적혀있다. 장소는 집에서 1시간 정도 떨어진 농장의 야외 연회장인데 점심도 주고 아이들 게임도 있고 자유롭게 농장 구경도 할 수 있다. 날짜각 주말도 아니고 금요일 오후에 하니 굳이 가지 않을 이유는 없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사실 나는 회사 야유회는 사라져야 하는 옛날 악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한국의 회사 야유회는 개인의 참여뿐만 아니라 즐거움까지 강요하는 자리가 아니던가. 게다가 가족까지 강제로 불려 와서 내가 욕하던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게 된다면? 그건 정말 최악이다. 다행히도 우리 회사(=한국 본사)는 팀 단위로 야유회 또는 체육대회 하는 것을 인사지침으로 금지하고 있어서 10년 넘게 이 회사를 다닐 수 있었다. 그래도 나름 규모 있는 회사답게 일과 가정을 분리해주고 있다. 그런데 미국 회사인데 한국도 안 하는 야유회를 한다고? 그것도 가족을 다 불러서? 미국에선 회사와 개인은 그저 '비즈니스 관계'이고 저녁 회식조차 하지 않는 관계 아닌가? (실제 나는 파트너들과 지금껏 회사 밖에서 식사를 해 본 적이 없다.)
음... 한국에서라면 당연히 안 가겠지만 미국에선 약간 뜻밖이라 역으로 흥미가 생긴다. 의무 참석도 아니고 가족을 강제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가고 싶고 가족도 데려가고 싶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의 회사 밖 모습도 궁금하긴 하다. 일하는 모습 외에는 본 적이 없으니까. 그리고 내년 이맘때에는 우리가 한국에 돌아가야 하니 더더욱 궁금하다.
집에 와서 아내와 세은이에게 회사 야유회 가야 한다고 얘기했다. 사실 이런 미국 회사 이벤트에 참석하는 게 관광지에 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경험이지 않나? 세은이에게 아빠의 미국 회사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니까. 아내에게도 내가 사람들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기도 하다. 얼마 전에 회사에서 했던 자발적 자기소개, 'Halftime show' 발표에 대한 회사 사람들 반응을 아내는 반신반의하고 있으니까.
'이번 기회에 남편님의 업적을 직접 눈 크게 뜨고 보라고!'
Jason도 1년에 한 번뿐인 행사이고 오랜만에 재개된 것이니 꼭 참석해 달라고 주재원들에게 메일을 보냈다. 그런데 주재원 단톡방엔 불만이 가득해지기 시작했다.
'한국도 안 하는 걸 왜 한대요? 미국도 은근한 꼰대 문화가 있네요.'
'야유회 안 가고 사무실에서 일한다고 하면 제이슨한테 찍히겠죠? 전임자들은 다 갔대요?'
'여기 먼 곳이라서 행사 끝나고 집에 가면 평소보다 더 늦겠네요. 골프장 가야 되는데'
'파트너 중에 아는 사람도 없는데 가족을 왜 부르나요? 누구 가족 데려오시는 분 있어요?'
파트너들과 '친분을 쌓지 못했던 주재원들'은 이런 행사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 가족을 데려오기는커녕 자신 스스로도 참석조차 하기 싫어했는데, 여러 대화가 오고 간 끝에 결국 주재원들은 본인들만 짧게 참석하는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는 것 같았다. 수동적인 그들의 태도는 이해가 되지만 참 아쉽다.
나는 짤막하게 "가족과 같이 가요."라고 남겼는데 예상대로 답을 주는 사람은 없었다. 야유회에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 우리가 혼자될 것은 아내도 나도 이미 예상했던 일이다. 우리는 '친분 있는 가족'이 아니니 가야 할 필요는 없는 거겠지. 괜찮다. 그래도 우리는 간다. 나의 미국 생활은 한국 친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다음날, 헤이니 아빠가 개인톡으로 헤이니네도 다 같이 가고 싶어 한다며 연락을 주셨다. 야유회에서 혼자 있을 세은이가 걱정되긴 했는데 잘 되었다. 주재원들 분위기가 달가워 않는 것이어서 헤이니 아빠에게 내가 먼저 물어보지는 않았던 건데, 이렇게 같이 가주시니 고마운 생각이 든다.
나는 Yuanjing에게 나는 가족까지 3명이 참석할 거라고 메일 회신을 보냈다. 오후에 어른들 게임인 소프트볼도 하고 싶다고 보냈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야지.
금요일 오후에 부담 없이 즐기는 하루, 동료들의 회사 밖 모습
금요일은 원래 사무실 출근일이지만 Jason이 이번 주는 재택근무로 변경해 주었다. 가족 행사니까 Jason도 최대한 협조하는 모습이다. 세은이는 오전 내내 엄마와 숙제하고, 나는 일하다가 11시 30분쯤 출발했다. 집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농장이다. 넓은 농장 한가운데 있는 미국 시골 헛간 느낌의 파빌리온이 행사장이고, 행사장 오른쪽엔 케이터링으로 점심이 준비되고 있다. 파빌리온 주변으론 운동장, 야구장, 아이들 놀이터도 있다. 내가 사람들과 인사하는 사이 세은이와 아내는 저 멀리 구경 다니고 있다. 세은이가 놀이터에서 다른 아이들과 뭔가 대화를 나누고 있네. 보기 좋다.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서 행사 준비를 하고 있던 Yuanjing을 만났다. 회사에서는 똑 부러진 매니저지만 집에서는 젊은 엄마인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이제 겨우 아기 티를 벗어난 3살짜리 Annabelle을 우리에게 인사시켜 주었다.
시간이 되어 파빌리온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부서별 리더들이 간단히 인사하는 것으로 야유회가 시작된다. 다들 코비드 때문에 한동안 중단된 것들이 이제는 다시 재개되는 것에 크게 의미를 두는 것 같았다. 인사의 마지막엔 오늘 행사를 준비한 사람들을 소개했는데, 그중에 Yuanjing이 있어서 있는 힘껏 박수를 쳐주었다. 행사 시작 전에 '팀장님 한 말씀' 이런 건 한국이랑 비슷하다. 조직생활이란 어디나 똑같나 보다.
연회장에서 준비한 케이터링으로 점심 식사부터 시작하는데 BBQ 종류도 많고 굉장히 먹음직스럽다. 헤이니랑 세은이는 지들끼리 핫도그 만들어 먹는다며 소시지를 여러 개 담아 오더니 벌써 같이 앉아있다. 식사 줄에 서서 사람들과 인사도 했는데 다들 Halftime show 발표 잘 봤다며 고맙다고 한다. 옆에 있는 아내에게 내 얘기를 여러 번 했다며 소개해 주는 사람도 있었다. 이 남편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쉽게 믿지 않았던 아내는 이 상황을 보고 어리둥절한다. '진짜 이 정도였다고?' '보았느냐. 이것이 너의 남편님이시다.'
나는 그저 사람들이 할 수 있는 Small talk의 화두를 먼저 던져준 것뿐이다. 의도했던 대로 사람들이 편하게 말 걸어주니 나도 맘이 편하다. 이런 자리에선 그런 노력이 확실히 효과가 있네.
식사를 다 하고 나니 아이들이 참여하는 게임 시간이 되었다. 혼자 왔으면 뻘쭘해서 안 한다고 했을 법한 세은이도 헤이니가 옆에 있으니 적극적으로 앞장선다. 덕분에 엄마들도 아빠들도 마음이 느긋하다. 엄마와 어린이들은 게임을 하러 가고, 좀 큰 아이들과 어른들은 소프트 볼을 하러 간다. 소프트 볼이라서 특별한 건 없고 푹신한 공(다치면 안 되니까)으로 하는 어릴 때 많이 했던 설렁설렁한 동네 야구다. 잘하는 사람, 못 하는 사람 섞여있고 수비 위치, 타격 자세 등 제대로 된 게 별로 없어도 그냥 한다. 다 같이 야구 한게임 하는 거에 큰 의미가 있나. 내 앞자리 큐브에 앉는 Yasiel은 왜소해 보이는 체격과는 다르게 엄청난 외야 수비 능력을 보여줘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내가 소프트 볼을 하러 간 사이 세은이도 헤이니와 여러 가지 게임을 하고 선물도 받아 왔다. 엄마들끼리 나무 밑에서 햇빛을 피하며 대화 나누는 모습이 학교의 Back to School 피크닉과 비슷한 느낌도 든다. 아내는 여기서도 한국인 엄마를 한 명 만나 연락처를 주고받았다는데, 남편이 3개월 전에 파트너 사에 취직해서 오신 분이라고 했다. 미국에선 이런 곳들을 다니면서 인맥도 친분도 키우게 되나 보다. 역시 잘 왔네.
같은 시간, 같은 장소 하지만 서로 다른 모습
헤이니네와 우리가 사람들도 만나고 여러 가지 게임을 하고 있는 동안, 가족을 데려오지 않은 주재원들은 회사에서 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사람들끼리 모여 있었다. 행사의 대부분이 아이들 위주였으니 어른들끼리는 할 일은 많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한국 사람들 여러 명이 모여있으면 보통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아무도 말 걸지 않는다. 파트너들이 볼 때는 한국인들끼리 동그랗게 모여있는 것 그 자체가 진입장벽이다.
잔디밭 구석에 10여 명의 주재원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담배 피우는 모습은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Jason도 그 모습이 신경 쓰였는지 다른 데 가지 않고 주재원들과 계속 자리를 같이 하고 있었다. 주재원들은 차라리 외로울지언정 Jason과 함께 있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을 텐데... 한국 사람들끼리 있으니 이런 시간, 이런 장소에서도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그대로 보인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야유회가 끝날 때까지 주재원들은 몇 시간을 그렇게 있어야 했다.
가족을 데려오는 것보다는 그렇게 하루를 보내는 게 더 나았던 걸까? 회사 야유회는 한국 본사로 돌아가면 할 수 없는 경험인데. 그것도 미국에 있는 동안 단 한번 할 수 있는 행사였는데. 주재원들이 사람들과 서먹해하고 어색한 것은 이해하지만 이 아까운 기회를 기회라고 느끼지도 못하는 것 같다. 내가 다 씁쓸하다.
회사 야유회가 내용 자체가 특별하진 않지만 나에겐 특별한 느낌이었다. 개인적인 분위기인 미국 회사에서 사람들의 회사 밖 모습을 볼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고 생각한다. 회사가 직원들에게 이런 추억을 만들어 주니 고마운 마음도 있고 아이에게 아빠가 회사 사람들과 잘 지내고 있음을 보여줄 수 있으니 그 또한 좋다.
만약 한국 본사에서 오늘과 똑같은 행사를 한다면 과연 갈 마음이 들까? 본사 리더들의 평소 모습을 생각하면 미국 야유회와 같은 분위기가 될 가능성은 0%라고 본다. 회식이 많은 한국 회사는 역시 야유회까지는 필요 없는 것 같다. 밥 같이 먹고 술 같이 먹는 한국 회사에서는 상사들의 회사 밖 모습은 별로 궁금하지 않다.
야유회가 끝나고 주재원들 단톡방에선 오늘 하루가 싱겁게 지나간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Jason에게 이런 형태로 한국 주재원들만의 가족모임을, 그것도 골프장에서 하자고 말을 붙여봤다고 한다. 그러면서 Jason의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며 좋아하고 기대하는 눈치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 한국 회사 야유회, 그것도 골프장... 최악의 조합이구나.'
미국이라도 한국 사람들이 모이면 한국이 된다. 좋은 것은 담아가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흘려보내자.
Fondly,
C.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