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라라라라라~~~ 6시 40분, 휴대폰 알람이 울려댄다. 아이가 깰까 봐 얼른 알람을 꺼버린다.
나는 일어날 수 있다... 나는 일어날 수 있다... 나는 늦잠자지 않는다.... 나는 일어날 수 있다... 이 말을 마음속으로 한 오십 번쯤 불경을 외듯 중얼거린다. 염주만 있으면 딱인데...
하얀 가래떡을 노릇 바삭하게 굽고 찍어먹을 꿀과 케첩소스를 식탁에 올린다. 앞접시 세 개와, 포크 세 개 그리고 오렌지를 까 접시에 담아 놓는다. 가족들에게 아침의 완성을 알리고 나는 화장실로 가 세수를 한다. 매일 들여다보는 욕실 거울 안에 익숙한 여자가 들어있다. 적어도 하루 세 번 저 여자를 본다.
인간은 매일 거울이라는 것을 본다. 그리고 거울 안의 나를 보는 것만큼 수많은 타인들도 본다.
우리의 뇌에는 거울 뉴런이라는 것이 있다. 그래서 타인의 행동이나 말투를 모방하기도 하고 공감을 하기도 한다. 타인의 경험을 나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타인이 느끼는 감정을 함께 느낄 수 있다. 가령 누군가가 거실에 놓인 레고를 밟는 모습을 보았다면,그 통증을 공감하는 사람은 아마도 레고를 밟아본 적이 있는 사람일 것이다. 아, 나 저런 적 있어. 진짜 아픈데! 하고.
인간은 수시로 타인과 나를 비교하고, 참조하고,모방하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자기를 인지한다. 그래서 인간에게 가장 큰 고통은 <배재>가 된다. 감옥에 독방이 있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거울뉴런은 말 그대로 타인에게 나를 <비춰보는> 역할을 한다. 우리가 바라보는 타인은 그러므로 타인 그 자체가 아니라 <내 모습을 비춘 타인>이다. 타인을 자기 기준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타인의 평가를 신경 쓸 필요 없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들은 내게서 자기 자신을 비춰볼 뿐, 나 자체를 바라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타인의 거울인 것처럼타인도 나의 거울이다. 그것을 정신분석에서는 <빈화면>에 라캉은 <커튼>에 비유했다.
무의식의 반영
가장 친한 친구나 배우자는
무의식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아주 친한 친구나 배우자는 그들을 선택한 사람의 무의식의 반영이다. 내게 필요한 것을 가진 사람을 선택한다는 것, 그것은 그 사람의 있는 그대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필요한 것을 선택하는 과정이다. 그래서 에리히 프롬은 사랑에 대해 설명하기를, 타인을 사랑하는 것은자기를 사랑하는 일이라고 했다. 다시 말해 진짜 사랑은, 타인을 통해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모두 걷어낸 그 사람 자체를 수용하는 일이라고 했다. (거울뉴런을 장착한 인간에게는 이상적인 얘기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떤 부모는 자기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가 이루어주기를 바라고 자녀가 그래주지 않을 때
미워하거나 죄책감을 주거나 속상해한다. 자녀를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녀를 통해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남성은 아내를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아내를 통해 나를 사랑한다. 칭찬, 격려, 응원, 지지, 사랑을 바라고 따듯한 식사, 돌봄, 게다가 자기를 무시하지 않을 만한 직업도 가지기를 바란다. 여성 또한 마찬가지다. 남편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한 남편으로 본다. 재력, 외모, 다정함, 아빠처럼 수용하고 감싸주기를 바란다.
많은 바라봄의 중심에는 자기 사랑이 있다. 타인 사랑이 아닌 그것.
사랑의 작동은 그런 무의식적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누군가를 알고 싶다면 (혹은 나를 알고 싶다면) 가장 가까운 친구와 배우자를 보면 된다. 그리고 질문해 보자.그 친구의 어떤 점이 제일 좋은지? 배우자의 어떤 점이 제일 좋은지? 그 좋은 점이 바로 무의식적인 요구이다.
내향적인 사람이 외향적인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건 그 사람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필요한 외향성을 사랑하는 것이다. 외향성이 필요한 것은 내향인의 무의식적인 요구이다. 그 요구를 인지하고 스스로 채우는 것이무의식적인 요구를 충족시키는 일이다. 스스로를 채울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타인을 사랑할 준비가 된다. 사랑에는 그래서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