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른지구'와 '고딕지구'의 골목에서 길을 잃고 싶습니다.
여행을 떠나기 전, 이런저런 스페인 여행 책을 읽었다. 그중 정주환의 <나의 스페인행 티켓>이라는 책은 우리의 '바르셀로나' 여행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우리의 여행은 아이들 모르게 준비 중이어서 이 책을 회사로 주문해 놓고는 비밀스럽게 봐야 했다. 아내가 먼저 읽고 가고 싶은 곳을 표시해놓았고, 그다음 내가 봤는데, 신기하게도 아내가 접어 놓은 책 모서리 자리에 나의 포스트잇이 붙었다.
늦은 밤 아이들이 자고 난 후에야 조심스럽게, '바르셀로나에 가면, 거기 고딕지구랑 보른지구 꼭 가보고 싶더라. 사람들이 잘 안 간다는데, 골목골목 돌아보면 좋을 것 같아' 하며 속삭였다.
우리는 7박 9일간의 스페인 여행 중에 바르셀로나에서는 4박 5일을 머물렀다. 숫자로 따져보면 긴 시간인 듯 하지만 여느 여행이 다 그렇듯 여행자에게 충분한 시간이란 없었다. 가우디 투어도 끝났고, FC 바르셀로나의 캄프 누 투어도 했고, 하루를 떼어 몬세라트를 다녀오는 일정도 끝난, 여행의 막바지. 내내 마음 한쪽 허전하던 것을 아내에게 얘기했다.
"나 보른지구 꼭 가보고 싶은데."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꼭 보른지구 뿐일까마는 바르셀로나에서 다른 곳도 아닌 '보른지구'를 꼽은 것은 그 책 때문이었다. 조금 옮겨보자면,
[보른 지구의 시크릿 플레이스]
바르셀로나를 소개한다는 목적으로 이런저런 매체에 바르셀로나 통신원으로 글을 쓰고, 한글 지도를 만들어 배포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아끼고 아꼈던 곳이 보른 지구였다. 왠지 내가 나서서 소문을 내고 싶지는 않은 곳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보른 지구를 다 보지 않고 바르셀로나를 떠나는 여행자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이 생겼다.
보른 지구를 알고 나면 분명 바르셀로나가 조금 더 좋아질 것이다.
<나의 스페인행 티켓> 중.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니, 아이들은 집에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피곤해하고 지루해했다. 여행의 설렘이 자취를 감춘지는 오래였다. 아이들에게 태블릿 PC와 노트북을 쥐어주고는, 늦은 오후 아내와 둘이 길을 나섰다.
숙소가 있던 그라시아 거리를 지나 카탈루냐 광장을 거쳐 람블라스 거리를 걸었다. 람블라스 거리에서 방향을 꺾어 골목을 들어서면,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지나 고딕지구, 보른지구를 만날 수 있다. 그라시아 거리가 화려한 쇼핑의 거리라면 람블라스는 파리의 샹젤리제를 닮은 거리였다. 오가는 사람들이 북적이는 람블라스 거리에서 골목으로 들어선 것뿐인데도 느낌은 달랐다.
오후의 햇살마저 어깨를 맞댄 건물들에 가려져 골목을 비추지 못했고 골목은 어둑어둑했다. 기념품을 팔고 환전을 하고 여행자를 향해 물건을 늘어놓은 큰 상점들이 사라졌다. 둘셋 둘셋 몇몇이 무리를 지어 골목으로 향했다. 람블라스와 그라시아 거리에서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면, 고딕지구와 보른 지구라 이름 붙은 골목에서는 골목을 둘러싼 모든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바닥에 깔린 편석의 울퉁불퉁한 느낌과 휘어져 꺾인 골목의 곡선이 눈에 들어왔다.
손에 쥔 구글맵은 자주 길을 잃었다. 우리의 위치는 계속해서 바뀌고 방향은 갈피를 못 잡았다. 아내와 나는 스마트폰을 넣어두기로 했다. 한참을 걸어보고 마음에 드는 카페에 앉아 크루아상 한 조각 맛본다면 그뿐. 우리가 애초에 스페인에 와서 여행자의 여유를 즐겨보고자 했던 그것을 찾아보기로 했다.
골목은 골목으로 이어졌다. 조금 더 넓은 골목에서 조금 더 좁은 골목을 만났고, 오래 묵은 먼지가 더 깊게 쌓인 길에서는 여행자의 흔적이 사라졌다. 한 뼘 비춘 햇살을 향해 빨래가 걸려 있고, 카탈루냐의 독립을 바라는 깃발마저 빛이 바랜 골목이 계속됐다.
골목을 오가다가 우리는 마침내 허름한 가게에 들어섰다. 생각했던 것처럼 유럽풍 테라스에 멋진 파라솔이 쳐진 카페가 아니었다. 카페라기보다는 동네 빵집과 같았다. 에스프레소 한잔에 1유로, 크루아상 하나에 1유로, 초콜릿이 발라진 크루아상도 1.5유로였다. 영어를 하지 못하는 주인에게 여행자가 아닌 사람들이 인사를 건넸다. 종이봉투에 빵을 가득 담아 가는 사람들의 순서를 기다려 우리는 어렵사리 손가락 주문을 했다.
좁은 자리에 앉아 커피와 빵을 기다리다가 아내가 물었다.
"왜 우리는 이런 골목을 좋아할까."
"글쎄."
"여행 와서 목적지를 정하고 걷다 보면, 가려는 방향만 눈에 들어오잖아. 얼른 그곳에 가야 하고, 길을 잃지 않으려고 집중하고. 그런데, 골목을 걸어보면, 꼭 골목이 아니더라도 이런 길을 걸어보면, 그렇게 목적지만 두고 걷지는 않잖아. 길도 구경하고, 걷는 것도 조금 느리게 걷고. 목적도 방향도 없이 걷고 보는 것만 즐길 수 있으니까. 우리가 그런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그러게. 서울에서 우리가 종종 시장 구경을 나서는 것도 그런 거겠지. 마트에 가면 필요한 물건을 잘 사서 오겠지만, 시장에 가면 볼 수 있는 것이 마트에는 없잖아. 물건 파는 사람, 물건 고르는 사람, 흥정하는 사람, 인사를 건네는 사람, 그런 시장만의 재미가 있는데 말이야."
여행에 와서 목적 없이 걷는 것이 좋다는 아내의 말에 나는 크게 공감했다. 매일 같이 가야 하는 방향이 정해진 걸음을 걸어야 했고 정해진 시간에 맞춰 길을 나서야 했다. 여행에서마저 그럴 필요는 없었다. 꼭 보아야 할 무엇과 꼭 맛보아야 할 무엇을 지우고 나면 여행의 자유가 드러났다. 일상과는 다른 방향과 시간이 주어졌다.
아내와 지난 여행을 두고 얘기를 할 때가 있다.
우리 그때 갔던 거기는 뭐가 좋았지. 하고.
끄라비에 갔을 때 숙소 앞에서 작은 인형을 두고 팔면서 'Laundry Service'라는 큼지막한 글씨를 붙여놓은 여주인이 있었다. 아침, 저녁으로 오가는 길이면 매번 눈을 마주쳤고, 우리가 세탁물을 맡기고 찾을 때면 팔고 있는 인형 한두 개를 아이들 손에 건넸다. 일상에 지친 딱딱한 눈빛과 수줍은 선한 미소를 아내와 나는 종종 이야기한다.
방콕에서는 숙소 근처 거리에서 옥수수를 구워 팔던 이를 가끔 이야기한다. 옥수수 한 개에 20밧, 1,000원도 안 되는 값에 옥수수 좋아하는 딸아이의 만족을 샀던 일. 더운 날씨에 불에 구운 옥수수를 파는 주인은 딸아이에게 옥수수를 건네며 환한 미소를 가득 담았다.
우리는 그런 타인의 일상을 종종 떠올린다. 소소한 이야기다. 여행의 무엇으로 기억하기에는 별 볼 일 없는 것이고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고딕지구를 갔으면서도 입구에 있던 '바르셀로나 대성당'을 이야기하기보다 눈에 띄지도 않게 밟고 지났던 거리의 느낌을 먼저 떠올리고는 한다. 우리에게 여행은 그런 것이다. 여행지의 랜드마크를 떠올리는 기억보다도 여행에서 가져온 느낌으로 일상을 살아가는 마음 한 뼘 늘려가는 것.
"여행이 일상이고, 일상이 여행인 삶"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너무 어렵다. 다만, 여행에서 대단한 무언가를 보려 하기보다는, 일상에서도 느낄 소소한 무언가를 느끼고 그것을 챙겨 일상으로 가져오는 것. 일상의 소소한 구경을 여행을 떠나지 않은 여행자의 시선으로 세세하게 바라보는 것. 일상과 여행의 경계를 모호하게 하면서 소소하고 작은 행복들로 우리의 삶을 채우고 있다.
그래서인지 얼마 전 읽은, 송은정 작가의 <빼기의 여행>의 마지막 장, 이 부분에는 나의 연필이 깊게 그어졌다.
"어제와 같은 길을 걷는 오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했다면, 어제의 나는 몰랐던 사실을 오늘의 내가 깨달았다면, 그래서 일상의 시야가 한 뼘쯤 넓어졌다면 그것을 여행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여행이 끝난 지 몇 달이 지난 지금,
아내와 나는 바르셀로나를 떠올리며, 이렇게 얘기한다.
"다음에 바르셀로나에 가면, 우리 무얼 할까."
"아무 계획도 정하지 않고, 이삼일쯤 고딕지구, 보른지구를 천천히 걷다가 맘에 드는 카페에 앉아서 책 읽고 커피 마시고 말없이 시간 보내다 오는 거,
나 그거 꼭 해보고 싶어."
우리가 주말이면 하는 그런 것 말이다.
*이글은 아래의 글로부터 연재해오고 있습니다. 함께 읽으신다면, "작가챗쏭"에게 푹 빠지실지도 모릅니다.:)
8편의 '스페인 여행기'를 쓰고 있습니다. 이제 다음주면, 마지막 한편을 끝으로 마무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