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스페인 여행 8편의 마무리, 우리는 '천천히' 여행했을까
에필로그, Despactio
스페인 여행 이야기 8편을 마무리합니다.
우리는 '천천히' 여행했을까요.
바르셀로나 공항을 날아오른 비행기는 이베리아 반도와 멀어진다. 사람들은 비행기 창에 코를 박고 사진을 찍느라 정신없다. 복도 쪽에 앉은 나는 옆 좌석에 양해를 구하고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말로만 듣던 ‘피레네 산맥’쯤 되려나. 그럼 저쯤은 프랑스려나. 하얗게 눈 덮인 산들이 이어진다.
이렇게 우리 가족의 첫 유럽여행이 끝나가는구나.
나는 ‘여행을 한다’는 말을 종종 ‘자유를 얻는다’로 읽고는 한다. 아니 그렇게 읽고 싶어 한다. 하지만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는 가족 여행이 어디 그럴까. 다음 목적지를 향해 길을 찾아야 하고 때에 맞춰 식당을 골라야 한다. 지루해하지는 않는지 나만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눈치를 보느라 피곤함이 계속된다. 아이들이 자면 숙소 근처의 펍이라도 찾아 가 맥주 한잔 하는 낭만을 꿈꾸지만 현실은 아이들보다 먼저 곯아떨어져 있다.
엄청난 검색과 비교와 고심을 거듭하여 골라 놓은 바르셀로나 호텔에서는 이층 침대 위에서 누가 잘 것인가에 아이들이 목숨을 걸었다. 큰아이가 위에서 자면 자기는 떨어질 것 같아 무섭다면서 (잠버릇 심한) 동생을 위로 보내지 않는다고 삐졌다. 둘째 아이가 질 리 없다.
구글 맵을 뒤져가며 trip adviser가 골라 준 식당을 간신히 찾아 식사를 하고 나왔더니 아이들은 오가며 봤던 KFC의 5유로짜리 ‘mega box'를 사준다고 했는데 왜 안 사주냐고 투덜거린다.
프라도 미술관은 두 시간도 있지를 못했다. 이 세계적인 미술관을 샅샅이 살펴보고 한 작품 한 작품 오래 머물러서 눈에 담아 마음에 새겨 넣겠다는 나의 계획은 계획일 뿐이었다. 재미없다며 입이 삐죽 나온 둘째 아이는 결국에는 머리가 아프다며 보챘다.
이 모든 이야기가 대여섯 살 아이들과 떠난 여행 이야기가 아니다. 열네 살, 열한 살 되는 제법 큰 아이들과의 여행인데도 그랬다. 아이들은 아이들이었으니까. 그래도 아내와 나는 이만하면 만족한 여행이라고 생각한다.
노트북에 아이들이 정주행 하고 싶어 하던 ‘스카이 캐슬’ 드라마를 담은 USB를 던져주고는 아내와 나는 우리가 마치 마드리드에 또는 바르셀로나에 사는 사람처럼 잠시 밤거리를 쏘다니기도 했다. 마트에 들러 저녁거리를 사 오기도 했고 ZARA며 MANGO와 같은 옷가게에 들러 잔뜩 쇼핑도 하면서. 서울의 집에서 잠시 마실 나온 것처럼 돌아다녔다. 아이들이 ‘엄마, 아빠 언제 와’ 하며 카톡으로 전화를 했지만, 그래도 이런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졌다니. 다 컸네 다 컸어하는 말은 후렴구.
집으로 가는 헬싱키행 비행기 안이다.
아내와 아이들을 저 앞에 나란히 붙여 앉히고는 나는 네 시간쯤 비행기 안의 자유를 얻었다. 내가 쓰는 글을 단 한 글자도 곁눈질할 수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책을 읽고 몇 글자 적는다.
이제 이 여행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벌써부터 불 켜진 초저녁 람블라스 거리가 그립다.
어릴 적 부루마블을 하다 보면, 좀처럼 얻어걸리지 않던 도시가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였다. 부루마블에서는 매번 나의 주사위를 외면하던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 카드를 두 발로 다 밟고 온 것 같아서, 우리는 또 오자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다음에 오면 맛 좋은 하몽을 더 먹을 것이고, 아내에게 선물하지 못한 LUPO 가방을 500유로 턱 하니 내면서 ‘내가 쏠게’ 해야겠다. FC 바르셀로나의 경기일정을 맞춰 캄프 누에 가고 고딕지구와 보른지구에서는 밤공기를 쐬어 보련다. 벙커의 야경도 보고 구엘공원에는 일찍 가서 일출을 기다리기도 해야겠다. 사나흘 정도 더 있다면 다 해보지 않았을까.
여행을 하면서 아내와 한 이 이야기.
“직장 생활하면서 일주일 휴가 낸 건 이번이 처음이었던 것 같아. 다음에 또 이런 기회가 쉽게 오지는 않겠지만 꼭 시간을 내서 바르셀로나에 다시 오자.”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쉽게 그러지 못할 것이다.
가보지 않은 나라와 가고 싶은 도시가 구글 안에 가득한데 거닐어 본 람블라스에서의 익숙함을 찾아 다시 오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끄라비가 그랬고 후쿠오카가 그랬으며 세부와 나의 이스탄불도 그러했다. 그렇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지나간 도시의 목록 속으로 자리하지 않을까 싶다. 목록을 펼쳐 들면 여행을 하면서 들었던 음악과 도시의 풍경과 불빛만이 기억나겠지.
그래서 '또 오겠다'는 말은 더는 오지 못할 도시와의 아쉬운 작별의 인사인가 보다. 졸업식을 하며 친구들과 나누는 ‘언제 또 보자’ 하는 빈말 인사의 여행 버전.
우리 가족은 여행을 할 때 주제곡 같은 노래를 하나씩 정한다. 나름 여행을 오래 기억하는 방법인데, 여행을 하면서 반복해서 들었던 노래가 주제곡처럼 생기는 것이다. 지난 여행을 생각하면서 그때 들었던 노래를 떠올리기도 하고, 노래를 들으며 그때의 여행을 생각하기도 한다. 톨레도로 가는 차를 운전하며 크게 틀어놓고 흥얼거리기도 하고 숙소에서는 가져 간 블루투스 스피커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들었던 노래가 있다.
Lusi Ponsi라는 스페인 가수의 ‘Despactio'라는 노래. 스페인어로 “천천히”
우리는 ‘천천히’ 여행했을까.
※아래로부터 이어 온 8편의 스페인 여행 이야기를 이것으로 마무리합니다. 그간 잘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좋은 여행 이야기로 다시 찾아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