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사량 17화
이선정作 통영 인상 oil on canvas
노곤한 햇빛이 보건지소 앞바다를 가르고 야트막한 뒷산 줄기로 넘어가는 사월의 하루. 십여 일 남은 사량도 시간에 서툴렀던 기억 하나둘 마음속에 가라앉는다.
시내 보험회사 사랑의 꽃씨 나누기 행사에서 얻어온 상추, 쑥갓 몇 봉지 심는데 김 선생이 우리 섬 생활 끝나기 전에 맛이나 보겠냐며 핀잔을 준다.
보건지소 앞 잡초 무성한 자그마한 공터. 기름집 안타네서 호미 빌려 잡초 솎아내고 돌덩이 가려내니 뭐하냐며 모두 한 마디씩이다.
어차피 먹어보지도 못하고 섬을 떠날 텐데 웬 쓸데없는 일이냐는 말들. 내 조그마한 옥답이라 생각하며 호미로 밭을 간다. 새로 오실 선생님들을 위해 씨 뿌린 날들. 굳이 내가 먹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상추 두 칸, 쑥갓 한 칸 뿌린 뒤 지서 정 순경에게 남은 씨앗 몇 봉지 드리니 마음이 풍요로워진다.
매일매일 물 주고 새 생명 기다리는 흥분된 마음. 기대에 들떠 하루하루를 보낸다. 이주쯤 지나 떡잎 나오고. 기운 좋은 놈 커다랗게 팔 벌리며 삼 센티미터 정도 쑥 커버리고. 힘 약한 놈은 그 반에도 못 미쳐 옆으로 누우려 한다.
삼 주 전 심었던 상추 이파리는 계속되는 가뭄 뒤끝으로 비실비실 스러진다. 안타까운 마음에 옥수를 뿌려대니 옆 칸에 뿌려놓은 쑥갓만이 고개 내민다.
오전, 오후 한 번씩 물 주면서 조금씩 커가는 작은 생명 바라보며 사량도의 날들을 돌이켜 본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돌아다보는 상추밭에는 어쩌면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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