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이후, 마음이 먼저 무너지고 다시 일어나는 과정에 대하여
중년이 되면 사람은 조금 더 단단해지는 줄 알았다.
웬만한 일에는 흔들리지 않고, 지나온 시간만큼 마음의 갑옷도 두꺼워졌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 마주한 중년의 초입은 생각과 달랐다.
유방암 진단, 시험관 실패, 엄마의 병, 경력단절, 남편과의 다툼 같은 일들이 한꺼번에 밀려오자
내가 믿던 단단함은 생각보다 쉽게 금이 갔다.
특히 병원 진료실에서 “유방암입니다”라는 말을 들었던 순간, 나는 세상이 멈췄다고 느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보니 멈춰 있던 것은 세상이 아니라 바로 내 마음이었다.
그날 밤 나는 휴대폰을 붙잡고 끝도 없이 검색하며, 타인의 공포까지 그대로 떠안았다.
막연한 두려움이 파도처럼 밀려와 나를 집어삼켰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창문을 두드리는 햇빛과 밥 짓는 냄새, “밥 먹자”라고 말하는 남편의 평범한 한마디가
그날은 이상하게 생명줄처럼 느껴졌다. 삶은 멈추지 않았고, 정작 멈춰 서 있었던 사람은 나였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암 이후의 시간은 몸의 회복만을 요구하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오래 묵혀 있던 균열들이 하나둘 드러났다. 그중에서도 가장 크게 흔들린 것은 엄마와 오빠의 관계였다.
어린 시절 내게 영웅 같던 오빠는 어느 순간 가족을 가장 크게 흔드는 사람이 되었고, 엄마는 그런 오빠에게 실망하고 상처받으면서도 끝내 등을 돌리지 못한 채 마음에 응어리를 쌓아왔다.
둘은 서로를 향해 서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각자의 상처 속에서 길을 잃은 사이처럼 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가 대장암 4기라는 말을 들었고 그 순간부터 우리 가족 사이에 오래 파여 있던 골짜기가 아주 천천히, 그러나 분명하게 메워지기 시작했다. 오빠는 엄마의 병원 동행을 묵묵히 맡았고 엄마는 그런 오빠를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나는 알게 되었다. 가족은 때로 가장 큰 상처를 주지만 결국 가장 깊은 치유를 건네는 존재라는 것을. 회복이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이 아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하는 과정이라는 것도.
이 책은 그렇게 다시 흐르기 시작한 나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암 이후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고 새로운 나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했다. 마음이 흔들리면 몸이 따라 아프고, 관계가 흔들릴 때 가장 먼저 상처받는 존재는 결국 나 자신이라는 것도 그제야 알았다.
그럼에도 모든 균열 속에는 ‘다시 살아보고 싶다’는 작은 마음이 남아 있었다.
그 마음이 아주 느리지만 분명한 힘으로 나를 앞으로 밀어주었다.
어떤 날은 잘 버텼고, 어떤 날은 이유 없이 무너졌으며, 어떤 날은 괜찮은 척하는 데 온 힘을 다 써야 했다.
그러나 그 모든 날들 속에서도 삶은 한 번도 멈춘 적이 없었다.
우리가 잠시 숨을 고르고 있을 뿐, 삶은 늘 우리보다 먼저 걸어가고 있었다.
이 기록이 당신의 오래 묵혀 둔 상처나 말하지 못한 아픔에 작은 숨구멍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삶은 오늘도 조용히, 그러나 확실하게 다시 흐르고 있으니까.
[독자 안내]
이 브런치북에는 제가 이전에 브런치에서 연재했던 <암 이후, 나를 지키는 방법>의 일부 내용이 새로운 흐름과 호흡으로 다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동안 많은 분들이 나눠주신 경험과 응원, 질문들이 저에게 큰 힘이 되었고, 그 마음을 바탕으로 동일한 이야기라도 더 깊고 넓은 시선으로 다시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이미 읽어주셨던 분들께는 더 서사적이고 단단해진 ‘확장본’이 되어드릴 것이고, 처음 만나시는 분들께는 암 이후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데 조용한 동행이 되어드리기를 바랍니다.
삶은 멈추지 않았고, 우리의 마음만 잠시 멈춰 서 있었을 뿐이니까요.
이 글이 다시 흐르는 삶을 향해 조금이나마 힘을 건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