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화 - 첫 번째 남자
윤희는 약속 시간보다 40분이나 늦게 준환과 약속한 인사동의 그 옛날 단골찻집에 도착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생략했다. 그런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 찻집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소리들로 윙윙거리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색깔의 웃음소리들과 전혀 비슷하지도, 어울리지도 않는 목소리들이 작은 공간에 마구 뒤엉켜 있었다.
윤희는 신경이 바짝 날카로워져, 차를 마시고 있는 준환을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자는 말을 던지고는 그곳을 먼저 휑하니 빠져나왔다. 준환은 마시던 차를 내려놓고 계산을 하고 서둘러 그녀를 따라나섰다. 35개월쯤이라는 시간이 주는 어색함은 그의 차가 세워진 주차장까지 걸어가는 동안, 윤희의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 속으로 사라졌다. 아니, 잠시 잊혔다. 윤희는 그렇게 느끼고 싶었다.
「너도 나이를 먹기는 먹었구나」
며칠 동안 술만 마신 그녀의 거칠어진 얼굴 때문이었을까. 준환은 ‘오랜만이다’도 아닌 ‘너 왜 이렇게 늙었냐.’ 하는 얼굴로 첫마디를 떼었다. 윤희는 그를 만나기 위해 아니, 초라한 자신이 싫어 한 시간이 넘도록 정성스럽게 화장을 했다. 점점 아름다워지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그녀는 진심으로 오래간만에 기분이 좋아졌었다. 화장을 끝내고도 한참 동안 그렇게 거울 앞에 앉아 설레고 있었던 사실이 쨍그랑 깨졌다.
준환의 몸은 전체적으로 살이 올라 있었다. 특히 양복에 감추어진 허리선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눈가는 피곤이 가득해 가만있어도 눈썹 주변은 세로로 주름이 잡혔다. 준환은 재빨리 아우디에 올라 시동을 걸었고, 한 손으로는 윤희를 위해 앞문을 열어주었다. 준환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주차장에 켜놓은 형광등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끼익, 주차장의 초록색 바닥이 내는 불협화음을 뚫고 그들은 지상으로 올라와 목적지도 없이 서울을 달리기 시작했다.
윤희는 운전하고 있는 준환의 손가락을 보며 말했다.
「결혼, 언제 했어?」
「어떻게… 알았어?」
「그 반지……」
「5개월 지났어」
윤희는 준환의 옆모습을 보았다. 갑자기 백화점에서 봤던 창수와 함께 있었던 그 여자가 떠올랐다. 문득. 윤희는 쓸쓸해졌다.
「너는?」
「……」
차는 도로 위에 멈춰서 움직이질 않았다. 퇴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도로는 주차장이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두 사람은 입을 닫고 말없이 어색한 침묵에 잠겨 있었다. 어색해졌다. 준환은 CD플레이어의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음악 들을래?」
마리아 칼라스였다.
「여전하네. 마리아 칼라스는……」
준환은 마리아 칼라스 마니아였다.
「결혼 안 했니? 하긴, 너랑 결혼은 안 어울려」
‘나랑 결혼이 왜 안 어울리는데?’라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윤희는 왜인지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행복해?」
윤희는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며 차갑게 물었다.
「요즘 자꾸 살이 쪄서 큰일이야. 그 사람이 요리를 잘해. 다음 달부터는 테니스라도 쳐야겠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윤희를 의식하며 객쩍게 웃었다. 윤희는 여전히 창밖만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가고 싶은데 있어? 시간은 많지 않아」
「아무 곳이나…」
그는 잠시 한강 둔치의 불빛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했다.
「정말이지? 어디든 가도 되는 거지? 나중에 다른 말하기 없다」
「……」
윤희는 지금 준환의 차 안에 있다는 게, 아니, 그를 다시 만난 것 자체에 대해 후회하기 시작했다. 준환은 서른둘이다. 3년 동안 그의 몸과 말투는 10년이 지나버린 것 같았다. 되돌아갈 수 없는 건 시간만이 아니었다.
그는 인테리어 디자인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이태리 유학에서 막 돌아온 그에게선 느리면서도 세련된 이미지가 있었다. 친구가 선배를 소개해 주겠다고 나오라던 자리에서 윤희는 그의 분위기에 이끌렸었다. 그리고는 일 년 남짓 그녀와 그는 애인사이가 되었었다. 그는 졸업과 동시에 아버지가 하는 건축사무소에 다니게 되었다는 것까지만 기억에 있다. 그땐 이미, 서로가 헤어진 것과 다름없는 나날들이었다.
「아직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회사에 다녀?」
「아니. 결혼하고 독립했어. 처가에서 좀 도와줬어. 내 전문분야를 살리고 싶었거든…」
간신이 한남대교를 빠져나간 준환의 차는 오른쪽으로 보이는 호텔로 갑자기 핸들을 틀었다. 차는 호텔 입구에 정확히 세워졌다.
「어디든 가도 된다고 했잖아」
그는 동의를 바라듯 웃었고, 윤희는 아마도 한동안 그의 웃음을 지우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희는 준환이 자신보다 더 불쌍해 보였다. 호텔 주차 요원이 윤희의 문을 열어주었다. 다시, 문을 닫고 싶었지만 준환은 벌써 호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 버린 후였다. 윤희는 로비로 들어가 머뭇거렸다. 그가 현금으로 계산을 하고 열쇠를 들고 윤희에게 다가왔다.
전망이 좋은 방이었다. 한강이 보였고 반대편에는 도심의 빌딩들이 형형색색의 불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는 창밖을 보고 있던 윤희를 거칠게 뒤에서 더듬었다. 윤희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창수가 생각났고 화려했던 결혼식도 생각났다. 하지만 모든 것은 너무 늦어가고 있었다. 윤희는 질끈 눈을 감았다.
「부드럽게 해 줘」
윤희의 말에 준환의 동작이 잠깐 멈췄다. 몇 초 동안 그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는 윤희를 천천히 침대에 눕혔다. 그녀의 옷들을 익숙하게 하나씩 벗겼다. 윤희의 뽀얀 몸이 드러나자 그는 서둘렀다. 준환의 몸은 윤희를 아프게 했다. 윤희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건 아니었다. 서러움이 눈물을 토해냈다. 그가 어서 끝내기만을 바랬다.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는 윤희의 옆으로 힘없이 내려왔다. 모든 것이 고요해졌다. 윤희는 감각이 무디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어떤 자극도, 느낌도 받을 수 없었다. 너무 서둘렀기 때문일까. 너무 긴장했기 때문일까.
「좋았어?」
「……」
「몇 년 만이지? 2년… 아니, 3년?」
윤희는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천천히 아주 조금씩 천정의 무늬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윤희도 흔들리고 있었다. 몸이 덜덜덜 떨렸다. 이를 앙다물지 않으면 윗니와 아랫니도 탁탁탁 부딪칠 것만 같았다. 온몸에 세포들이 움직일 수 없을 만큼 힘을 주어야만 했다.
「왜 그렇게 굳어 있었어? 내가 결혼해서 실망했니?」
윤희는 그에게 뭐라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먼저 씻을게」
그는 볼일을 끝낸 사람처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고 윤희 쪽은 보지도 않고 건성으로 말했다.
「나 좀 안아줘…」
준환은 알몸인 채로 옆으로 누워있는 윤희를 내려다보더니 이불을 끌어다 윤희의 몸을 덮어주고는 바닥에 아무렇게나 널려있는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 하나를 꺼내 불을 붙였다.
「집에 가야 해」
준환의 마르고 둔탁한 소리가 실내를 삼켰다. 윤희는 물었던 어금니가 풀렸고 눈물이 콧등을 타고 내렸다.
「5분만 아니, 아주 잠깐이라도…」
윤희는 자존심보다는 몸을 감싸고 있는 한기를 없애고 싶었을 뿐이다.
「알잖아, 시간이 늦었어」
그는 잠시, 서있었지만 윤희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으며 담배를 물고 화장실로 사라졌다. 윤희는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 온몸이 차갑게 굳어버릴 것만 같았다. 입술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준환은 샤워를 하고 나와 조용히 옷을 다 입었다.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몇 장을 꺼내어 그녀가 등 돌리고 누워있는, 자신이 누워있던 곳에 돈을 내려놓았다.
「샤워도 해야 되고, 화장도 해야 할 텐데… 나 먼저 가야 될 것 같아. 저녁 먹고 천천히 쉬었다 가. 부족하지는 않을 거야」
윤희는 그가 나가고 조용히 문이 닫힐 때까지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는 이런 식으로 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집은 핑계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건 윤희의 자기 합리화였다. 자신의 몸이 초라해졌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와 결혼한 여자가 윤희보다 더 매력적인 몸을 가지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는 왜 그렇게 도망치듯 이곳을 빠져나갔을까. 아내에 대한 죄책감일까. 결혼이 한 남자를 이렇게 바꿀 수도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윤희는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거울 속의 여자가 알몸으로 누워있었다. 순간, 가슴이 무언가로 꽉 막혀버렸다. 눈물이 베갯속으로 소리 없이 스며들었다.
‘남자들은 다 똑같아. 그 남자, 집에 가면 아내를 꼭 껴안겠지. 보고 싶었다고……. 사랑한다고 말하겠지. 그러면 자신을 위해 밤늦게까지 일하고 돌아온 남자에게 여자는 행복을 느끼겠지. 그에게 있어 나라는 존재는 쉽게 잊히겠지. 아니, 어쩌면 그의 여자가 생리 중이거나, 혹은 집을 비우게 되는 날이면 내게 연락을 할지도 모르지. 그땐…….’
이런 생각이 들자, 윤희는 더 이상 눈물만 흘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핸드백 속의 핸드폰은 지금까지 계속 울리고 있었다. 세 번이나 받지 않았는데도 계속 울리다가 다시 끊겼다. 곧 네 번째 울리는 핸드폰을 윤희는 무거운 몸으로 들어 올렸다.
「… 여보세요」
「나야」
「……」
「아직 호텔이니?」
「응」
「부탁할 게 있는데 앞으로는 내가 연락할게. 먼저 연락하지 말아 줘. 그래줄 수 있지?」
「……」
「지금 집 앞이야. 약속해 줘. 너 때문에 불편해지는 거 싫거든…」
「내가 어떻게 달라진 거야?」
윤희는 그에게 진지하게 물어보았다.
「아니야. 넌 달라지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내가 결혼했잖아. 이젠 다르게 살아야지……」
윤희는 전화를 끊지도 않고 그대로 핸드폰을 있는 힘껏 바닥에 던져버렸다. 거울 속의 그녀는 어느새 윤희 옆에 와 앉아 있었다.
‘난 그냥 위로가 필요했을 뿐인데, 난 그냥 따뜻한 체온이 필요했을 뿐인데……’
윤희는 그녀의 품에 안겨 서럽게 오래도록 울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