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언제까지나 잊지 마, 내가 여기 있었다는 걸 기억해 줘.”
스물일곱 번째 책.
저자 무라카미 하루키 / 역자 양억관 / 민음사 / 2017.08.07
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기체가 두꺼운 비구름을 뚫고 함부르크 공항에 내리려는 참이었다. 11월의 차가운 비가 대지를 어둡게 적시고, 비옷을 입은 정비사들, 밋밋한 공한 건물 위에 걸린 깃발, BMW 광고판, 그 모든 것이 플랑드르파의 음울한 그림 배경처럼 보였다. 이런, 또 독일이군.
- 9p
도쿄에 도착해서 기숙사로 들어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을 때, 내가 할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모든 걸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모든 것과 나 사이에 적절한 거리를 두는 것, 그것뿐이었다.
(중략)
처음에는 잘되어 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잊으려 해도 내 속에 희뿌연 공기와도 같은 덩어리가 남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덩어리는 점점 더 또렷하고 단순한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나는 그 덩어리를 말로 바꾸어 낼 수 있었다. 바로 이런 말이었다.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그러나 기즈키가 죽은 날 밤을 경계로 이미 나는 죽음을(그리고 삶을) 그런 식으로 단순하게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 54~55p
그런 숨 막히는 배반 속에서 나는 끝도 없이 제자리를 맴돌았다. 지금 돌이켜 보면 참으로 기묘한 나날이었다. 삶의 한가운데에서 모든 것이 죽음을 중심으로 회전했다.
- 56p
"자주 그래. 감정이 차올라서 울어. 괜찮아, 그건 그것대로. 감정을 바깥으로 표출하는 거니까. 무서운 건 그걸 바깥으로 드러내지 못할 때야. 감정이 안에서 쌓여 점점 딱딱하게 굳어 버리는 거지. 여러 가지 감정이 뭉쳐서 몸 안에서 죽어 가는 거. 그러면 큰일이야."
- 234p
“그 사람과 같이 있는 한 괜찮을 것 같았어. 그 사람과 같이 있는 한 내가 이상일 일은 없을 것 같았지. 우리 같은 병이 있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신뢰감이야. 이 사람에게 맡겨 두면 안심이라고, 조금이라도 내가 이상해지면, 태엽이 풀어지기 시작하면, 이 사람이 금방 알아차리고 참을성 있게 정성을 다해 나를 고쳐 줄 거라고, 태엽을 다시 감고 얽힌 실타래를 풀어 줄 거라고 말이야 .그런 신뢰감이 있으면 병은 재발하지 않아.”
- 244p
‘죽음은 삶의 대극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속에 잠겨 있다.
그것은 분명 진실이었다. 우리는 살면서 죽음을 키워 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배워야 할 진리의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나오코의 죽음이 나에게 그 사실을 가르쳐 주었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 할 수는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 529~53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