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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은새 Sep 08. 2024

여전히 사춘기

240908

조카가 놀러 왔다. 사촌 누나의 딸이니까 촌수로는 5촌, 아기는 나를 당숙이라 부른다는데 난 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조카라 부른다. 아무튼 이 조카를 사진으로만 보다가 이번에 견학을 와서 처음 봤는데 너무 귀엽다. 아기들은 혀 짧은 소리가 너무 귀엽다. "쪼방차", "해쪄요", "가찌 가요" 하는 식의 심장을 후벼 파는 발음들. 하임이에게 소중한 주말 오전을 바쳤지만 하나도 아깝지 않은 순간이었다.

시간이 가는 걸 나에게 느끼는 순간이 대부분이지만 가끔 타인의 삶을 통해 체감하는 경우도 있다. 어제가 그랬다. 가끔 우리 집에 놀러 오던 대학생 누나, 그랬던 사촌 누나가 이젠 남편과 함께, 앵두 같은 딸과 함께 소방서 주차장 앞에서 보는데 감회가 새로웠다. 나도, 누나도 많이 달라져 있었으니까. 내가 입고 있던 활동복이, 누나가 하임이를 잡고 있던 손이 새삼 낯설었다. 난 그때 시간이 많이 지났음을 느꼈다.

시간이 지나는 건 따뜻함과 차가움을 동시에 가진다. 새싹 같은 어린이가 자라는 건 온기라 표현할 수 있지만 나를 키운 부모가 늙는 건 차가움이다. 살면서 아버지와 몇 번 다툰 후 효심이 1그램 정도 남은 나지만 언젠가 헤어질 운명을 생각하면 조금 마음이 무거워진다. 이런 생각을 가진 난 여전히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투덜거린다. 난 모순이 많다.

마음이 시끄러워 책을 편다. 줄줄 문장을 내려가다 보니 끝에 닿았다. 다 읽은 책은 김영하 여행의 이유. 태국에 있던 때 읽었던 책인데 한 번 더 읽었다. 김영하 글은 부드럽고 탐구적이다. 문장을 잘 쓴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살면서 일어나는 현상을 기꺼이 궁금해하고 탐구한 흔적이 글에 묻어있다. 난 그의 글을 읽으며 내가 미처 닿지 못했던 삶의 부분을 들여다볼 기회를 얻는다. 동시에 글 쓴답시고 삶에 무관심했던 내 모습을 조금 반성한다.

살면서 이렇게 두 번, 세 번 보게 된 책이나 영화가 있다. 난 n 회차 관람을 좋아한다. 영화 맨프롬어스, 김영하 여행의 이유, 마블 영화를 두 번씩 봤고 영화 어바웃 타임을 세 번 봤다. 처음 볼 때 느끼지 못했던 장면과 보지 못했던 문장을 찾는 순간이 좋다. 맨프롬어스에선 내가 종교를 믿지 않는 이유를 다시 한번 확인했고, 여행의 이유에선 살면서 기꺼이 통찰을 가까이해야 할 이유를 찾았다. 마블은…. 모르겠다. 속 시끄러울 때 보면 시간 잘 간다. 어바웃 타임은 킷캣이 정말 예쁘다. 현실성 없는 캐릭터지만 그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좋다. 난 그렇게 못하니 더 좋아하는 듯하다.

어제 결혼식을 다녀왔다. 친구 하나둘 반려자의 손을 잡고 떠난다. 로비에 가득 찬 사람들, 빽빽한 타임 테이블을 보며 결혼 공장 같다고 생각했다. "xx 씨 이리 오세요." "삑." "결혼 완료하셨습니다. 퇴실하세요." 이런 느낌이랄까. 조금은 다르지만 대부분 천편일률적인 결혼 식순. 입장, 주례, 축사와 축가, 마치고 사진…. 난 언젠가부터 사진을 찍을 때 그냥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여러 줄로 겹친, 중간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신부와 신랑을 보며 조금의 피로를 느낀다. 불이 꺼지고 하객들은 플래시를 켜고 흔든다. 중앙에 있는 신부와 신랑은 입을 맞추고 사람들은 환호한다. 그리고 하루 새 날아가는 몇천만 원…. 난 언젠가 저기 있을 내 모습을 상상하면 머리가 지끈거린다.

서울에서 온 친구를 부산역에 내려주고 집으로 향하는 길, 요새 인디노래를 찾아 듣는다. 김필선, 최유리, 한로로, 이고도. 노래 좋아하는 동생에게 더 많은 가수 리스트를 받았다. 마음이 풍족하다. 요즘엔 노래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음악은 무언가 할 때 흥얼거리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건만, 요즘엔 가만히 앉아 가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한다. 서른의 나는 변하지 않을 것 같으면서도 조금씩 변한다. 가사에 귀를 기울이는 내 모습이 낯설면서도 그 모습이, 또 앞으로 변할 모습이 모나지 않기를 숨죽여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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