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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그린 Nov 08. 2024

아빠를 살 릴수 있는 병원은 없었다

엄마와 통화가 끝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아빠가 암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새벽에 잠이 덜 깼거나,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거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에게 전화 걸어 진짜냐고, 거짓말 아니냐고 묻고 싶었지만,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최할 수 없었다. 절망도 슬픔도 아닌 허무함에 밀려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마음이 이렇게 아린데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빠의 마음은 얼마나 무너졌을까. 아빠의 목소리를 들을 자신이 없었다. 오전 내내 마주할 수 없는 현실과 싸우다 점심이 다돼서야 휴대폰을 들었다.


“어~ 딸~”

“아빠… 엄마한테 들었어…”

“엄마가 얘기했나?~ 걱정할까 봐 하지 말랬드만. 그래 그렇단다 아빠가”

 “아빠…. 흑흑흑흨”

“인생이 원래 살만해지면 어려운 일이 생기고 그러는 거다. 아빠는 괜찮아. 울지 마”


온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 사는 탓에 아빠의 암소식을 전화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기차역으로 뛰어가고 싶었지만, 해결해야 할 일과 진행 중인 일들이 있어서 주말에 내려가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친정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이렇게 무거웠던 적이 있는가. 기차 안에서도 택시 안에서도 아빠를 마주하면 어떤 말을 건네어야 할까 되뇌여봤다. 안아줄까? 괜찮냐고 물어볼까? 좀 어때?라고 할까… “아빠~~ 나왔어” 아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덤덤하게 가족들을 대했다. 아빠 얼굴은 아픈 사람 같지 않았다. 이렇게 멀쩡한데 시한부라니. 겉과 달리 아빠 몸속의 암세포는 급격하게 진화하고 있었다. 며칠 만에 콧속이 더 붓고 막혀서 코로 숨을 쉴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입으로만 숨을 쉬느라 바짝바짝 입이 말라갔다.  


설상가상으로 목에도 암덩어리가 있어서 식도를 눌러 물 삼키는 것도 힘들어했다. 가만히 있던 암세포들이 의사가 암선고를 하자마자 살아나는 것인지 대학병원 다녀온 이후 아빠의 상태는 점점 안 좋아져 갔다. 숨을 쉬는 것도, 먹는 것도 힘든 상황이지만 아빠는 연거푸 괜찮다는 말만 했다. 살다 보면 마주할 수 있는 일 일수 있음을 어른답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기엔 아빠가 너무 젊었다. 혼자 가장이라는 이름아래 자신의 죽음을 태연하게 삼키는 모습이었다. 대학병원 암센터에서 검사를 받고, 항암주사 치료를 기다리고 있었다. 코 깊숙한 곳에 암세포가 뭉쳐있어서 수술이 어려운 위치라고 했다. 수술을 할 수 도 없고, 다른 곳에 전이도 많이 된 것 같다며 추가 검사를 받아보기로 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먹어야 할 음식과 삼가야 할 것들이 적힌 안내문과 약봉투만 한가득 받아왔다.


비인두암 4기를 확정받고 돌아왔지만 몇 주째 병원에서는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 마약성분의 강한 진통제만 처방해 줄 뿐이었다. 수술도 어렵고 방사선 치료도 어렵고, 항암주사도 1주일 뒤부터 가능하다는 말만 했다. 검사 한번 받고 나면 결과를 기다리기까지 1주일 걸리고 다시 내원해서 상황을 설명 듣고 치료는 고작  진통제뿐이었다. 사람의 생명은 닳아 가는데 그에 반해 침착하고 느긋한 병원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아빠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빠의 증상은 조금씩 악화되어 갔다. 점점 호흡이 힘들어 입으로 숨을 몰아쉬었다. 씹어 먹는 것은 힘들어졌다. 마약성분의 항생제와 항암주사로 혓바닥 돌기가 더 예민해지고 통증을 동반해서 음식이 닿는 것이 힘들어져갔다. 겨우 한 모금 물 마시는 게 전부였다.


그 뒤로 2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항암주사를 맞고 왔다. 남들은 항암주사가 너무 독하기도 하고 부작용도 심해서 힘들어한다는데, 아빠는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 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항암주사를 맞고 온 날은 코쿠멍이 조금 확장되어서 숨쉬기가 한결 낫고, 목구멍도 열려서 죽 한 숟갈  먹는 것이 가능했다. 항암주사 맞은 살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정도로만 콧구멍과 목구멍이 열러도 좋겠다고 말했다. 양쪽 콧구멍으로 들숨 날숨을 편하게 내쉬고,  통증 없이 침을 삼킬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이고 행복인지.. 아빠는 지금 이 순간 다른 것보다 코로 들어가는 공기 한 줌이 절실했던 것이다. 한 달 두 달이 지나도록 항암주사를 맞고 마약진통제로 고통을 참는 일 외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항암주사를 맞았으니 암세포가 많이 죽었는지, 전이는 어디까지 됐는지, 항암주사를 맞고 언제 또 검사를 할 예정인지, 다른 수술 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없는지 등 궁금한 게 너무 많았지만 병원을 가도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이가 없다고 했다.


대학병원에서 아빠를 포기한 것 같은 느낌에 화가 났다. 친척들은 아빠를 서울에 있는 빅 5 병원으로 모시는 게 어떻겠냐고 했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예약이 어려울 거라는 소리를 들었지만 운 좋게도 한 번의 전화로 담당교수 외래 진료를 예약할 수 있었다. 아빠와 동생이 함께 기차를 타고 수서역으로 오면, 내가 배웅을 나가 병원의전을 했다. 지방 대학병원에서 갖고 온 진료기록들을 보여줬다. 서울병원에서는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자며 의사는 환자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말로 먼 길 힘들게 올라온 아빠에게 위안을 주었다.


‘역시 빅 5는 다르네! 아빠를 서울로 잘 모신 것 같아. 암 치료 전문 병원인데 뭔가 드리겠지. 처방하는 항암주사도, 치료방법도 좋을 거야. 호전될 수 있을 거야. 치료받고 나을 수 있을 거야. 기적이 우리 가족에게 올 거야.‘


내 바람과 달리 아빠를 서울병원으로 모신 것은 큰 실수였다. 아빠와 예상한 시간보다 훨씬 빨리 헤어지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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