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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페이지는 엄마였다

[My Human Library] #10

by 김성수

국민학교 5학년 무렵이었을까?

주번 활동 때문에 씩씩거리던 내게 엄마가 나지막이 말했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어해. 그러니 그런 일은 네가 솔선수범해서 하는 게 좋은 거야."
짝꿍이 일을 미루고 뺀질거리는 게 짜증 난다는 내 투정에 엄마는 그렇게 답하셨다.

그땐 그 말의 깊이를 다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문장은 내 인생이라는 책의 첫 페이지에, 가장 선명한 잉크로 새겨졌다.
돌이켜보면, 그 문장은 엄마라는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였다. 엄마의 삶은 그 문장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과정이었으니까.

아빠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고단함의 그림자에 잠겨 있을 때조차, 엄마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어느 날, 거실의 낡은 괘종시계가 멈춰 섰다. 멈춰버린 시간을 보며 모두가 한숨을 내쉴 때, 엄마는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그래도 저 시계는 하루에 두 번은 정확한 시간을 알려준단다."
멈춰버린 순간 속에서도, 기어이 두 번의 '정확한 희망'을 찾아내던 사람. 그것이 나의 엄마였다.

엄마의 마음은 언제나 더 약하고 아픈 사람들을 향했다. 시장 골목에서 초라한 나물을 파는 할머니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고, 번화가의 구걸하는 사람들에게 주머니를 털어 도움의 손길을 내밀던 엄마의 모습.

그리고 늦은 밤 학원이 끝난 뒤, 아픈 내 친구의 안색을 먼저 알아보고 약국으로 달려가 살뜰하게 챙기던 모습. 그 친구가 엄마의 장례식장에서 사흘을 꼬박 지켰던 이유를 나는 안다.
사업 실패로 삶을 포기하려던 부모님의 지인 댁에 쌀과 간식을 들고 드나들며, 끝내 그 가족이 다시 살고 싶게 만들었던 사람. 장례식장에서 가족보다 더 서럽게 울던 그분의 어깨를 보며, 나는 내가 다 읽지 못했던 엄마의 수많은 페이지들을 떠올렸다.

그런 엄마와의 동행은 스무 해를 넘기고 너무나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엄마와의 사별은 내 인생 최대 암흑기의 시작이었다.
내 삶의 첫 페이지를 열어주었던, 나의 가장 위대한 책이 영원히 덮여버린 날이었다. 시간이 흘렀다.
나는 여전히, 엄마가 남긴 그 첫 문장을 붙들고 나의 다음 페이지들을 써 내려가고 있다. '골목을 누비는 활동가' 센터장님에게서 존경심을 느끼고,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어가는 아들의 모습에서 대견함을 느낀다. 나는 인간의 따뜻한 감정과 관계를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 모든 마음의 뿌리에는 언제나 엄마가 있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은 남도 하기 싫어해." 그 단순하지만 명확한 문장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엄마는 내 삶의 가치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알려준, 내 인생의 첫 번째 '사람책'이다. 그리고 나는 이제, 그 책의 다음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서툴더라도, 문장이 엉키더라도 괜찮다.

엄마라면 그마저도 미소 지으며 읽어주었을 테니까. 오늘도 나는, 내 사람책의 다음 장을 천천히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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