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어딘가요? 갤러리에 오신 분들이 자주 궁금해하며 묻는 말이다. 나는 비현실의 풍경을 그린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현실처럼 그럴듯하게 그린다. 그래야 이야기가 성립되기 때문에 가능하면 현실에 존재하는 것처럼 재현하려 했다.
상식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인정하고 따라야 그것이 상식이 된다.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은 오해되지도 문제가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회적 믿음에 대한 이야기일까? 그렇다. 나는 그림을 그리면서 기포가 올라오듯이 조금씩 품어왔던 의심들을 작업에 녹여내어 나와 우리에게 질문을 하려고 한다. 기억과 기억 사이의 틈에 상상이라는 새로운 생명을 키우면 어떨까? 그러다 보면 상상은 다시 기억의 나무 언저리에 뿌리를 내리고 기억과 함께 자라나게 될 것이다.
관람객은 자주 등장하는 그림 속 소재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식물들인데 열대 지역에서 볼 수 있는 야자수, 사막에 사는 선인장, 추운 지방에서 볼 수 있는 눈 덥힌 나무와 같은 오브제 들이다. 내가 선택한 방법은 이들이 날씨와 환경의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가는 것을 그리는 것이다. 우리가 서로 다르지만 함께일 수 있다는 것을 이미지로 구현하면서 나는 하루하루 위로를 받는다. 그리고 서로는 서로를 유쾌하게 지지해 주면 좋겠다. 추위와 바람 앞에서 옷깃을 여미는 우리는 따뜻한 날에는 스스로 옷을 벗는다는 우화를 안다. 나는 주장하기보다는 은근히 웃게 만드는 그런 태도가 좋다. 내겐 펜이 칼을 이기듯 웃음이 가르침을 이긴다는 믿음이 있다. 내가 선택한 작은 오브제들은 거대한 풍경 속의 점 같은 존재이지만 그 존재가 웅장 함이라는 화면에서 피식하고 웃음을 짓게 하는 그림을 그리고 싶다. 그러는 과정에서 그림이 여유를 가지기를 바란다.
내 작업은 우리가 미처 의식하지 못했던 여러 정황들을 만들어 그림 안에 하려던 이야기를 여기저기 숨겨둔다. 가령 다른 대상에 비추어진 장면을 보면 반사되는 정도가 모두 다르다. 앞에 있는 사람은 옷 색깔마저도 자세하게 반사되고 멀리 있는 식물은 그것의 실루엣만 그림자처럼 반사된다. 혹은 역으로 가까이 있는 것이 아무것도 자신을 반사하지 않는 것도 함께 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며 일어나는 현실의 모습을 표현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더러 그림자가 없는 경우도 있다.
나는 시각예술의 미적 경험을 포기할 수가 없다. 바로 조화로움이다. 무얼 봐도 선과 색을 먼저 상상하고 그려내는 계산기가 머리와 눈에 장착된 것 같다. 나로부터 시작되는 모든 것들은 나를 둘러싼 환경에서 반사되고 역 반사되며 서로를 반추한다고 믿는데, 그 영향을 주고받음이 그림 곳곳에 자연스럽게 숨겨져 있다. 모두는 그 존재에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나는 표현하고 싶다.
다시 가던 길로 돌아와 여긴 도대체 어느 지역일까? 간단히 말하면 그런 곳은 없다. 그림이기 때문에 나는 자유롭게 같은 공간에 살 수 없는 것들을 한 공간에 그려 넣을 수 있었다. 그림 안에서는 표현 불가능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철옹성인 줄 알고 믿어왔던 것이 공중누각이라는 걸 알고 받아들이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일들은 때론 가혹하기도 했다. 서울에서 모두가 믿고 따르는 시간이 뉴욕의 하늘아래 서면 더는 기준이 아니게 된다. 이렇듯 우리는 서로 다른 공간에서는 다른 기준이 적용됨을 알고 공간적 진실도 역으로 다른 차원으로 가면 진실이 아닐 수 있다는 사고의 유연함을 만나게 된다.
살아가는 일에 정답이 없듯이 질문도 하나가 아니다. 한 번도 의심하지 않던 것들을 의심하는 일은 세상을 보다 풍성하게 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진정한 강함은 무겁고 딱딱함이 아닌 가볍고 유연함에서 성취될 수 있는 가치라는 생각으로 나는 조금씩 온전해 간다. 온전한 만큼 숲이 자라고 자라난 숲이 믿음을 이루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