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농가주택과 홈스쿨

살던 집 시리즈 스물한 번째 집

by 조은미

10년 가까이 살았던 집, 내 집이 아니라는 것을 잊고 살았던 집, 너무나 특별하고 그리운 대화동 집에 쌓인 이야기들은 수북한데 그 하루하루가 순서대로 생각나는 것이 아니어서 글로 남기는 것을 매번 머뭇댔다. 그러나 이사한 다음날 첫 아침의 기억은 생생하다.


기쁘고 들뜬 마음을 달래며 겨우 잠이 들었는데 그런 우리를 다음날 이른 아침에 깨워댄 것은 윙윙대는 파리들이었다. 이 방 저 방에서도 같은 이유로 잠 깬 아이들이 거실로 모였다. 짜증이 날 법도 한데 모두들 잘 잤는지 웃으며 나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땅의 기운이라는 것을 느꼈다. 집안에서 보는 거실 창 밖의 풍경은 그동안 집을 기웃대며 보아왔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포도원 기둥을 감은 초록 넝쿨, 그것을 감고 올라온 활짝 핀 주황색 여름 꽃, 능소화가 주렁주렁 매달려있고, 땅에는 노란 수선화와 잔잔한 흰 꽃들이 흔들리고 있었다. "엄마, 엄마, 우리 여행 온 것 같아. 여기서 계속 사는 것 맞아요?" 제대로 된 여행을 다녀본 적도 없는 아이들이 앞다투어 나에게 물었다.


현관으로 들어오는 나지막한 나무 계단을 지나 문을 열면 오른편으로 넉넉한 ‘ㄱ’ 자 부엌이 맞은 편의 거실과 마주 보고 있고, 큼직한 통유리창 밖 아래로 깔아놓은 자갈밭 한두 평을 건너 꽃밭과 포도원이 펼쳐졌다. 거실 유리문과 밖으로 연결된 널찍한 나무 데크는 난간 없는 베란다 같기도 하고 마당에 내어놓은 넓은 평상 같기도 해서 거침없는 햇살과 바람에 빨래를 말리기 좋았다. 때때로 이 데크에서 상을 펴고 함께 밥을 먹었다.


대화역으로 가는 마을버스와 서울행 광역버스를 이용할 수 있는 버스 정류장은 걸어서는 10분 안팎, 자전거를 타면 수 분 안에 갈 수 있는 위치의 우리 집을 방문한 사람들마다 도심 속 이 시골집을 어떻게 찾았는지 궁금해하고 부러워했다. 전셋집을 얻었을 뿐인데 마당과 텃밭과 꽃밭을 모두 누릴 수 있었다. 마당은 네댓 대 정도의 차가 주차할 만하고, 텃밭도 힘에 부칠만큼 밭농사를 지을 수 있을 정도로 넓었다. 꽃밭과 포도원 뒤쪽 열나무그루의 아담한 복숭아나무는 이사 후 첫여름에 최고의 꿀 복숭아를 선물해 주더니 이후 맞은 열 번의 봄, 무릉도원 부럽지 않은 황홀한 꽃 잔치도 열어주었다.


세상과 다르게 흐르는 것 같았던 그 시간에 우리는 다른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과목을 커리큘럼에 넣지 않았다. 꼭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아이들이 배우고 싶은 것을 같이 공부하며 살았다. 일주일에 한 번 피아노 레슨이 이어졌다. 선생님이 집으로 오셔서 세 아이들을 각각 20분씩 봐주셨다. 때때로 같이 채우는 한 시간 수업 중에 또래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동요를 같이 부르기도 했다. 아파트에 살 때부터 인연이었던 선생님이 우리가 홈스쿨을 한다고 하니 처음에는 놀라더니 다음에는 아이들을 딱하게 여기셨다가 어느 날부터 응원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아이들의 친구들인 홈스쿨러 남매와 함께 동요집 CD를 만들자고 제안하셨고 연습을 마친 후, 선생님 지인의 스튜디오에서 친근하고 밝은 동요 몇 곡과 캐럴을 넣어 노래집을 제작했다. 훗날 오디오 서랍을 정리하다가 그때 만든 아이들의 CD를 찾았다. 변성기가 오기 전, 꼬꼬마 막내아들의 맑은 목소리와 이제 막 변성기가 시작된 애매한 큰 아들의 목소리와 수줍은 떨림이 가득 담긴 딸아이 앳된 소리를 그대로 담은 노래를 차례로 듣는데 웃음과 눈물이 같이 나왔다. 감동의 순간을 간직할 수 있게 해 주신 선생님에게 감사한다.


나와 남편은 모두 도시 사람이라 농사에 아는 바가 없었지만 '밭농사'라는 특별한 생산 활동을 아이들과 함께 하는 살아있는 수업으로 바꾸어준 이가 있다. 우리가 사는 모습을 신기하게 보는 이웃 중 한 분인 옆집 할머니는 팔을 걷어 부치고 기꺼이 농사 스승이 되어 주셨다. 이 집에 사는 내내 감사했고 지금도 감사하다. 우리와 오래도록 함께 살던 여러 집 중에서 엄마가 가장 마음에 들어 하셨던 곳도 대화동 집이다. 함께 마당을 거닐고 텃밭과 꽃밭을 가꾸시다가도 문득문득 내게 물었다. “이 집을 우리가 살 수는 없는 거니?” 아이들의 연주도 원 없이 들으시며 행복해하시던 집, 급기야 당신도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고 마음먹으셨던 대화동 집에서의 하루하루에는 감사하고 특별한 추억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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