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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독일에서] 김치와 출근

김치를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남는 법

by 노란대문

배춧잎 하나 똑 뜯어다가 좌악좌악, 길게 길게 찢어먹는 맛은 어디 비할 데가 없다. 갓 지은 따끈한 밥 위로 길게 찢어 올린 배추김치 한 장. 한입 와아앙 하고 먹으면 호뜨거 하뜨거 하면서도 얼른 입안에 넣고 꼭꼭 씹어야 한다. 그러면 시원한 김치와 찰지고 고슬한 밥이 환상의 하모니를 이루는 순간이 펼쳐진다.


그뿐이랴, 아삭아삭 청명한 소리를 내며 입 안을 가득 채우는 깍두기는 어떻고. 말도 못 하게 맛있는 열무김치 쫑쫑 담아다가 국수에 말아먹으면 여름 별미가 따로 없고, 잘 구워진 삼겹살에 얹어먹는 갓김치도 그런 별미가 없다. 아니지, 삼겹살에는 구운 김치지. 고기 기름을 먹으며 지글지글 익어버린 김치는 밥그릇 두 그릇도 뚝딱뚝딱 해치우게 만든다. 아삭하면서도 고소한 오이김치도 세상에서 제일 좋다. 그런가하면 또 속 시원한 물김치만 한 소화제도 없고말고. 캬- 생각만 해도 침이 고이는 온갖 맛도리 김치들.

마늘왕창 새우젓 왕창. 이것 왕창 저것 왕창. 기억도 안나는 재료들이 왕창왕창 사랑과 정성으로 담겨 발효되는 우리나라의 자랑스러운 음식 김치.


근데 독일에서 김치 먹고 출근해도 되나?



한국에서는 매일 매 끼니 먹는 나의 김치. 우리의 김치. 독일에 유학 와서는 구경도 하기 힘들었다. 첫째로는 밥을 해 먹기가 세상 버거워서 고, 둘째로는 김치를 어디서 사야 하는지도 몰랐으며 셋째로는 셰어하우스에 살다 보니 조심하자는 취지가 좀 있었다. (모르는 사람이랑 한 집에 살아요)


첫 룸메들은 한 명의 독일인과 한 명의 미국인이었다. 셋이서 사는 집인 데다가 냉장고를 공유하니 김치를 집안에 들여오는 것은 나와 룸메들 모두에게 굉장한 도전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나는 엄마가 인정한 '김치 없이도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있으면 먹고 아니면 말지 뭐.라는 꽤나 무심한태도로 음식을 대했으니 김치 없는 나날들이 고역은 아니었다. 가끔 내가 뭐 먹는지 사진으로 보내면 엄마 아빠가 되려 느끼하다고 김치 한 조각 찾아드시곤 했다. 블루투스 느끼함 전송이랄까.


그렇게 파스타 먹기, 연어 구워 먹기, 빵 먹기, 가끔 밥 먹기 하다가 혼자 사는 기숙사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없는 게 없는 아시아 마트에서 만난 종갓집 김치. 이 얼마나 오랜만인지 나도 모르게 홀린 듯 집어 들었다. 그날 따뜻하게 칙칙폭폭 만든 밥 위에 잘 익은 김치 한 조각 얹어먹으며 나에게 '김치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 맛있는 걸 왜 그동안 안 먹고살았을까. 왜 이 맛난 게 넘쳐흐를 때는 귀한지 몰랐을까. 나의 김치 나의 사랑, 나의 영혼. 나를 이루는 그 커다란 한 조각이 발효된 김치로 이루어졌음이 분명했다.


그렇게 홀로 신나게 김치 파티를 즐긴 다음날, 입 안에 알알이 남아있는 '마늘냄새'가 느껴졌다. 게다가 냉장고는 김치냄새로 온통 뒤덮여 있었고. 아아 이것이 그 마늘냄새로구나. 외국애들이 한국사람에게서 난다 하는 그 냄새가. 생마늘이 발효되다 못해 진득하게 섞여 들어간 냄새는 생각보다 강력했다. 게다가 몇 개월 만에 김치를 먹으니 그 냄새가 눈에 보일 듯 선명했다. 이러니 살아생전 단 한 번도 김치라는 완전식품을 접해보지 못한 사람에게 이것은 얼마나 강력할 것인가.


그렇게 깜짝 놀라기를 끝으로 또 한동안 김치 없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마음은 고향으로 회기 한다던가. 이제는 뜨끈한 국물과 김치를 좀 먹어야 힘이 나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실 처음 독일에 와서는 나도 서양식으로 식단을 모조리 바꿔보겠다- 는 아주 대단한 시도를 했는데 라면 없이 살 수 없고 쌀밥 없이 살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감자와 파스타로 만족하는 이 나라 사람들이 참 대단하면서도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각설하고, 이제 직장에 다니는 30대는 김치를 어떻게 먹고 출근을 할 것인가. 이것이 나에게 도래한 문제였다. 베를린에서 직장을 따라 이주해 온 도시는 소도시였지만 고맙게도 아시아 마트가 두 개나! 언제나 원하는 때에 김치도 공수할 수 있고 라면과 비비고 만두 등등 온갖 것이 다 있다. 하지만 조용하던 집에 김치가 한번 오면 집안이 괜히 들썩거리는 것이다. 먹을 때는 행복하지만 한번 구워 먹기라도 하면 잔잔하게 남아있는 마늘향, 그윽하게 남아있는 김치의 냄새. 게다가 온통 김치가 점령한 나의 냉장고.


이럴 때는 캡슐 커 피고 뭐고 다필요 없다. 원두를 찐하게 핸드 드립으로 내려마시고, 냉장고 안으로는 커피 찌꺼기들이 줄지어 입장하는 수밖에. 경험상 커피가 냄새 잡는 데는 최고였다. 그리고 출근 전에는 눈물을 머금고 김치만큼은 피한다. 정말로 힘내야 할 때는 옅게 만든 된장국 정도는 호록 호록 먹고 가기도 하지만 생마늘이 발효된 김치는 절대 먹지 않는다.


굳이 왜 그래야 하나- 하고 묻는다면. 글쎄. 어쨌든 내가 독일로 넘어온 것이고 내가 이 사회에서 자리 잡기로 결심을 한 것이니 익숙하지 않은 내 나라의 음식과 문화로 서로를 고통스럽게 하지 않고 싶다. 퇴근 후, 출근하지 않는 날. 언제든지 즐길 수 있는 날들이 많고 현재 독일에도 한식당이 줄지어 개업하고 또 인기가 높아져 가는 추세이니 강요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다. 심지어 나는 한국 사람이면서도 김치냄새와 마늘냄새가 무엇인지 너무나도 알게 되었으니.


나에게 독일의 문화를 강요한 사람이 없었던 것처럼, 서로가 존중할 수 있는 선 뒤에 서있다면 쓸데없이 피곤해질 상황이 줄어들지 않을까. 물론 무지성으로 공격해 오는 말에 수긍할 필요는 없지만 굳이 나도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달라면서 김치를 먹고 출근할 생각은 없다.


한 번은 독일 동료가 다른 한국인 동료에게 '오 너 저번에 김치 먹고 와서 진짜 힘들었어' 하고 웃으며 농담을 건넸다. 그러자 그 이야기를 듣는 한국인 동료는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게 왜? 그냥 음식일 뿐이야.' 그리고 약간의 정적이 감돌았다. '기분 나쁘게 하려는 의도는 아니었어. 하지만 출근 전에 김치는 자제하는 게 어때?' 그 뒤로 두어 번의 이야기가 오고 갔지만 여전히 한 동료는 기분이 나쁘고 다른 한 동료는 어깨를 으쓱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건넨 독일 동료는 낫토도 즐겨 먹고 김치도 사 먹기도 하는 '맛도리 음식 러버'였다. 그래서 그의 충고는 꽤나 고민 후에 나온 이야기라고 여겨졌다. 음식이라는 의견, 혹은 나라의 정체성이라는 의견 등등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서로 조심할 필요는 있다고 본다.


매일매일 출근해야 하는 평일 저녁, 오늘은 바이오리듬 상 혹은 심적으로 김치가 급하게 필요한 순간이 있다. 그럴 때면 야무지게 챙겨 먹고는 아침에 기상시간을 한 시간 앞당긴다. 출근 전 짧은 유산소 운동으로 땀을 빼면서 냄새를 없애려는 노력이다. 그렇게 땀도 빼고 샤워까지 하고서는 요플레, 빵, 계란 등등으로 간단하게 식사하고 출근하는 것이다. 일전에 엄마가 '누구는 아침에 땀을 빼고 출근한다더라. 전날 술이라도 먹었으면 그 냄새가 남는다고.'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참으로 프로페셔널하다고 느꼈었다. 그래서 매일은 어렵더라도 전날 김치를 먹은 날만큼은 힘을 내어 기상하는 것이다.


이런 나름의 노력 덕분인지 아직까지는 누군가 나에게 '냄새'로 인한 컴플레인을 건 적은 없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거기는 암내가 심하다더라, 씻지를 않는다더라 등등의 말로 받아치라는 사람들도 있다. 물론 여름에 괴로워지는 순간도 있고 샤워의 개념이 남다른 사람도 있다. 그런데 회사라는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아침마다 단정하게 옷을 입고 향수로 퐁퐁 뿌리고 오는 사람들이다. 적어도 나의 작은 경험 안에서는 그러했다. 그러니 진득한 마늘냄새는 땀으로 쫙쫙 배출시키고 상큼한 향수로 무장하고 출근하는 것이다.


오늘도 삼겹살과 김치 파티를 할 예정이니 내일 아침은 힘차게 기상해야 한다. 읏샤읏샤


+ 오늘 생신이신 멋지고 성실한 우리 아빠 아주 생신 축하드립니다. 따뜻하고 뜨끈한 국밥 처럼 언제나 위로와 안길 품이 되어주시는 멋진 분. 그리고 그 옆에서 지치고 힘든 모든 순간을 위로해 주는 김치같은 존재의 사랑하는 나의 엄마 :) 뜨근한 국밥과 김치의 힘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독일 외노자의 생일 축하를 받으세요 :)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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