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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싫어진 나를 위해

2부. 숨고르기 (식물 편)

by Slowlifer

직장 내 괴롭힘, 그리고 가스라이팅.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세상 이야기인 줄로만 알았다. 물론 내가 겪기 전까지는. 그리고 그게 괴롭힘이고 가스라이팅인 것을 깨닫는 데는 자그마치 4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지나고 보니 참 미련하게도 버텼다 싶지만 나는 괜찮을 줄 알았다. 어딜 가나 쉽게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건 몇 안 되는 내 장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나라도 갈등이 왜 없었겠나, 그래도 늘 방법은 알고 있었는데, 내가 노력하기만 하면 다 해결할 수 있다 생각했다. 최근에서야 알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인간관계에서 문제를 겪기가 힘이 든단다. 왜냐면 나는 HSP, 타인의 감정에 대한 안테나가 남달라 문제가 생기기 전에 내 에너지를 모두 끌어다 문제를 막아 버리는 타입이라서.


하지만 인생사 내 맘 같지 않고, 내가 아무리 민감한 안테나를 가지고 있더라도 나의 그 방식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늘 그래왔듯 노력했다. 그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나를 바꾸고 또 바꾸고, 노력하고 또 노력했다. 나를 버리고 다른 사람에게 모든 걸 맞추는 일이 스스로를 얼마나 좀 먹게 하는지 미처 알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나의 노력이 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그 당연한 인생 진리를 뼈 저리게 배웠던 아팠던 시간들.



한순간 모든 게 싫어졌다.


분명 그 사람 하나가 문제였는데 모든 사람이 싫어졌다. 가족도 친구도 모두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의 문을 닫았다. 당시 심리검사에서 내가 그린 나의 집에는 현관문이 없었다. 내 마음의 출입구도 완전히 봉쇄해 버렸던 날들이었다.


절대 다시 예전처럼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는 모습을 되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랬다. 그리도 사람을 좋아하던 내가 사람에게 깊게 상처를 받고 사람을 멀리하게 되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는 걸 느낀 그날 이후, 나는 자주 내 호흡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자주 숨을 멈추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건 분명 자연스러운 호흡이 아니었다. 어떤 생각을 떠올릴 때, 특히 그 사람에 대한 생각을 할 때 나는 내가 습관적으로 숨을 멈추고 극도의 긴장 상태에 놓인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게 가장 급한 급선무는 내 숨을 찾아오는 일이었다. 극도의 긴장으로 얼어붙은 내 몸과 마음을 이완하는 일이었다. 쉬어야 했다. 아주 잘.


많은 사람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쉬는 법을 몰랐다. 어떻게 하면 내가 긴장을 풀고 편안해지는지 알 리가 없었다. 그렇게 집안에 웅크리고선 내가 뭘 좋아하더라 가만히 떠올려보자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게 ‘초록’이었다.



나는 초록을 좋아한다.


굳이 따지자면 자연을 좋아한다. 내가 행복감을 자주 느낄 수 있었던 공간을 떠올려보면 그곳에는 늘 자연이, 나무가, 식물이 옆에 있었다.


파란 하늘, 나를 둘러싼 초록들, 선선한 바람. 그게 다였다. 나는 그 안에서 강한 충족감을 느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당시 기준 몇 달 전 방문했던 제주의 한 식물카페가 떠올랐다. 나는 그 공간에서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그 감정은 공간이 주는 위로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나는 그 공간에서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예쁜 카페는 참 많지만 카페투어 같은 일에는 전혀 취미가 없던 나에게, 남편이 여긴 내가 너무 좋아할 것 같다며 몇 번을 이야기하며 데려가준 곳이었다. 비 오는 11월의 제주였다.


그 공간에서 어떠한 영감을 받았던 걸까. 아니면 여태껏 생각만 하고 실천하지 못하고 억눌러만 놓길 반복하던 과거의 나에 대한 보상심리 같은 거였을까.


내가 당시 결심 아닌 결심을 한 것은 이랬다.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 건 다 할래’


생각해 보면 하고 싶은데 정말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현실을 핑계로 그저 할 수 없는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 붙이며 미루고 또 미뤄 왔을 뿐.


그렇게 멈춰 선 지 한 달 정도 지났을까,

나는 돌연 나의 집에 정원을 들이겠다 선언했다.



우리 집은 24평짜리 3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된 구축 아파트다. 이때까지는 몰랐다. 내가 구축 아파트에 살아서 얼마나 다행인가를, 그리고 입주 전 베란다 확장공사를 하자고 남편에게 우겨댔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가며 아찔함을 느꼈다.


왜냐하면 아파트에서 정원을 만들기에 베란다만큼 좋은 장소는 없으니까.


어쨌든 장소는 정해졌겠다, 그런 설렘은 참 오랜만이었다. 나는 미친 사람처럼 식물을 들여오기 시작했다.


들여오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커다란 뱅갈고무나무부터 들여왔다. 이렇게 쉬운걸 여태 왜 못하고 살았을까? 웃음이 나왔다. 이유는 이랬다. 큰 나무를 들여오면 나중에 이사 갈 때 힘들다는 이유.


이렇게 내 눈동자 한가득 초록을 채워주는 것만으로 충만감을 가져다주는데. 단 하루만이 되더라도 내게는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었는데.


일어날지 아닐지도 모르는 일들에 내가 포기해야 했던 것들은 무엇이고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일까, 그리고 포기했던 그것들의 가치는 내게 어떤 의미였을까, 생각했다.


사람이 싫어졌던 나는, 내 마음에 세상 무해한 초록이들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이 친구들은 나를 판단하지도 억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있는 그대로의 진짜 나를 꺼내놓을 수 있게 도왔다.


식물들 사이에서 나는 다시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나의 또 다른 작은 세상을 구축해 나갔다. 처음 느끼는 또 다른 종류의 분명한 행복이었다.




나의 정원 @green_greene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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