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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on Oct 18. 2022

엄마의 감정과 언어로부터 독립하기

백번 넘어지면 백번 쓰기를 하며 일어난다

 나는 엄마의 마음을 잘 안다. 엄마가 지금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 싶은 지 감지할 수 있다. 섣불리 누군가를 안다고 자부하는 것이 얼마나 경솔한 일인지 알지만 엄마도 나를 잘 안다고 확신하니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련다. 나는 엄마를 잘 안다. 어떤 행동에 엄마가 웃고, 어떤 말이 엄마의 가슴에 박힐지를 명징하게 아는 편이다. 잘 알게 된 건 후천적인 영향이 크다. 공기를 읽지 못하면 언제 화가 날아들지 모르는 환경에서 커왔기 때문이다.


 엄마는 나를 싫어했다. 그녀의 표현을 빌려 말하자면 나는 '맞아도 싼 딸'이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고, 학원에 종종 빠졌으며, 그녀가 싫어하는 친구들과 어울렸다. 그 행동들 중 몇몇 개는 고쳐도 엄마는 여전히 날 싫어했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데 보통 이유가 없는 편이라고 하지만 그것이 양육자와 피 양육자 간에 형성되면 자식 입장에선 꽤나 곤란하다. 나는 아직 어려 이 집안에서 커야 할 세월이 십 년은 넘게 남았는데, 부모가 날 싫어하고 툭하면 집을 나가라고 한다면 난처해진다. 그래서 눈치를 봤다. 오늘 엄마의 컨디션이 어떤지. 산책을 갔다 오면 엄마가 친구들과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오랜만에 전화를 걸어온 할머니가 엄마의 신경을 긁지는 않았는지. 내 방에서 거실로 나오면 눈치를 살피고 그녀의 기분을 묻고 화제를 전환할 소재를 찾아 엄마를 웃게 만들었다.


 거실은 나에게 일종의 테스트 현장이었다. 시험에 통과하면 그날 하루를 무사히 넘길 수 있다. 실패하면 욕이나 내가 지은 죄가 얹어지면 '조금' 맞기도 했다. 그 덕에 나는 현관문 손잡이만 잡아도 엄마의 기운을 읽을 수 있는 달인이 됐다. 엄마가 나를 어떻게 키웠는지는 알 수 없다. 모든 현상들이 다 뜻대로 이뤄지는 것은 아니니까. 엄마의 의도는 모르지만, 그녀의 양육이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부분은 이것이다. 나는 타인의 감정 그중에서도 특히나 엄마의 감정을 잘 읽는 딸로 길러졌다.


 감정을 잘 읽는다는 건 나쁘지 않다. 타인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이타적 인간으로 큰다는 건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장단점이 있는 법. 언어보다 감정을 먼저 읽고 표현하는 법을 더 크게 배운 탓에 나는 타인의 감정과 나를 분리할 줄 몰랐다. 성장기 내게는 나의 감정을 표현할 장소가 없었다. 딱히 친한 친구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집은 엄마의 감정이 지배하는 공간이었다. 그곳에 내 감정이 끼어 들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늘 내 감정보다 타인의 감정을 먼저 수용하는 것에 익숙했다. 소위 ‘감정 쓰레기통’이라 불리는 관계적 위치를 자처했고, 쌓이다 쌓여 해소되지 못한 부정적인 감정들은 자기 파괴적 수단들로 처리했다. 그렇게 나는 타인의 감정에 쉽게 압도되는 아이로 꼬꾸라졌다.


 그런 엄마에게 가장 감사한 일은 나에게 대학교육을 받게 해 줬다는 점이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주는 이득에서가 아닌 나는 대학에서 언어로 나를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내 언어가 생기면서 나는 타인의 감정과 나를 구분 지을 수 있게 됐다. 엄마에게서 감정 분리를 시도하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엄마가 이번에는 언어로 나를 규정하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녔겠지만 더 이상 엄마의 감정에 따라 내가 움직이지 않자 엄마는 자신의 단어 안에 나를 가두기 시작했다. 가령 이 글을 쓰며 내가 구사한 표현 같은 것들. "내가 널 잘 아는데, 너는 ~" 식의 화법이다. 과거의 나를 기반하여 현재의 날 평가하고 미래의 나를 재단한다. 엄마가 이런 화법을 구사한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할 당시 나는 내 주변관계를 그와 같은 사람들로 다시금 채워나갔다. 그것이 내 삶과 가능성을 어떻게 좀먹는지 나는 알지 못했다. 그때 나는 기회의 순간마다 번번이 무너졌다. 보통 사람에게 찾아드는 기회란 자신이 현재 가진 능력보다 큰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그게 기회인 것이다. 기회를 잡는 이는 자신의 미래 가치와 가능성을 믿고 자신하는 사람이다. 반면, 나는 늘 내게 주어진 기회 앞에 위축됐고, 나를 깎아내렸다. 타인의 말과 언어가 날 규정하도록 방치했다. 그렇게 다시 꼬구라졌다.


 요즘 나는 내 언어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고 회복 중이다. 얼마 전 엄마에게 내가 새로이 갖게 된 꿈에 대해 말하자 그녀가 비웃었다. "그게 되겠니, 쟤는 맨날 저렇게 현실성 없는 소릴 하더라." 그리고 그날부터 나는 그 꿈을 내 일기장에 백번씩 쓰기 시작했고 오늘로 70일 차가 됐다. 100일이 지나면 나는 다른 꿈을 내 일기장에 백번 쓸 것이다. 가끔 그걸 쓰고 있으면 설렘에 벅차올라 심장이 뛸 때도 있지만, 서러울 때도 있다. 하지만 이게 어디야. 10년 전에 나는 내가 뭘 원하는지 말로 표현하지도 못했는데.


생각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말이 됩니다. 말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행동이 됩니다. 행동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습관이 됩니다. 습관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성격이 됩니다. 성격을 조심하세요. 언젠가 운명이 됩니다. - 마더 테레사


 10년 전 나는 SNS에 유려한 문장으로 글을 쓰는 한 유저를 부러워했다. 그분을 팔로워 하며 그분이 쓴 문장을 나의 표현으로 변형해보곤 했다. 그 문장을 닮고 싶어서. 10년이 지나 학교에 들어온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분은 서울예대 극작과를 졸업한 선배님이셨다. 아직 그분처럼 직업인으로 작가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과거 나는 그분의 문장을 부러워했고, 그분이 밟았던 교육과정을 밟고 있다. 말이, 언어가 없던 시절 나의 생각이 10년 지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이제 나는 5년 전 쓸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분량의 글을 2주 만에 쓸 수 있는 사람이 됐다. 할 수 없을 거라고 믿었음에도 나는 그보다 큰 사람이 됐다. 할 수 있을 거라고 믿고 키우는 나는 얼마나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누군가가 나에게 안 된다고 말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으로부터 나를 지킬 체력과 정신력을 매일 조금씩 길러둔다. 내가 나 자신한테도 안 된다고 말하면 안 되는데 누가 감히 당신에게 안 된다고 말한단 말인가. 더는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의 말이 내 인생을 망치게 두지 않는다. 그게 설령 나를 사랑하는 엄마일지라도. 우리는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말의 힘이 중요한 걸 깨달은 나는 지금 이 종이 위에 선언한다. 이제는 엄마보다 내가 더 나를 잘 키울 자신이 있다고.


 왜 하필 엄마일까. 나에게 안 될 거라고 말하는 타인의 말은 무의미하다. 그들은 나에게 중요하지도 않고 스쳐 지나갈 인연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의 말은 나에게 어떤 영향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무엇보다 그들이 떠들도록 더는 내버려 두지도 않는다. 하지만, 엄마는 끊임없이 말한다. 나의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내가 말하지 말라고 하면 자신을 뒷방 늙은이 취급한다며, 혹은 엄마 대접을 해주지 않는다며 부정적인 단어로 나를 규정하려 든다. 엄마를 내 인생에서 잘라낼 수는 없다는 걸 엄마는 잘 안다. 하지만 엄마 덕에 나는 엄마에게 무슨 말이 먹힐 지도 안다. 어떤 말을 해야 그녀가 진정하고, 말문이 막힐지를 알고 있다. 나는 오늘도 그녀가 내가 정의하는 나를 키우기에 적합한 엄마가 되기를 바라며 엄마와 싸운다. 나는 그녀가 달라질 수 있는 사람이라 믿고, 딸의 행복을 빌며 성장하는 엄마라 믿기 때문이다. 엄마, 엄마가 키우고 싶은 딸로 나를 만들려 말고, 내가 되고 싶은 나를 키우는 엄마가 되도록 해.


Q. 백번 쓰고 싶은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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