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by 바다숲


김금희 작가의 단편집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 중 '춤을 추며 말없이'를 읽었다. 할아버지 손에 자란 주인공은 어느 날 '말로'라는 값싼 대화형 로봇을 할아버지에게 선물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로봇을 집으로 가져오게 된다. 상대의 말을 따라 하는 로봇은 이런 말들을 한다.

"날이 푹해졌나? 따뜻해? 오늘은 어땠어? 이제 그만 쉬어라. 나 정정해."

배터리가 자주 나가고 소음이 커지고 점차 깨워주는 시간이 늦어졌다. 수리공은 이건 사람으로 치면 '소진'이라 고칠 수 없다고 한다. 주인공은 팔을 흔들다가 결국 퓨즈가 나간 로봇처럼, 말없이 혼자 춤췄을 할아버지의 일상을 떠올린다. 바쁘단 핑계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방치했던 할아버지에게 미안함을 느낀다.


읽다가 아빠 생각에 눈물이 났다. 전화하면 항상 "춥다. 따뜻하게 입고 다녀라. 눈 온단다. 주머니에 손 넣고 다니지 말아라. 넘어진다." 고 하셨다. 지금도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걸어간다. 말로 다 못할 사랑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온기가 사라지기 전에, 소중한 사람들에게 온 마음을 다 쏟아야겠다.


드라마에서 울 때 청초하게 눈물만 또르르 흐르는 게 정말 부러웠는데, 나는 비염이라 눈물콧물 범벅이 된다. 역시 비염이던 아빠는 길을 걷다 엄지와 검지로 코를 잡고 퀭하고 풀어서 전봇대에 닦고 잔여물은 바지에 쓱하고 닦으셨다. 어릴 땐 그게 너무 창피하면서 또 재밌기도 해서, 옆에서 퀭하고 똑같이 코 풀어 닦는 흉내를 내면서 낄낄댔다.


조금만 뜨겁거나 매운 걸 먹으면 콧물이 줄줄 나서 식당에 눈치 보일 정도로 휴지를 많이 쓴다. 아주 예전에 남자 친구와 호프집에 간 적이 있다. 치즈 불닭을 먹었는데 너무 매웠다. 코 푼 휴지를 옆에 쌓아놓기가 민망해서 불닭접시 밑에 하나씩 끼워 놨는데, 어느새 커다란 접시 밑을 둥그렇게 돌려가면서 빼곡히 끼워놨다. 남자 친구는 "이렇게 해놨는데도 좋아하는 거 보면 진짜 대단하지 않냐."라고 했다. 보통 더러운 게 아니었는데 찐사랑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무료하고 딱히 할 게 없다 싶을 땐 TV를 보다 무심히 코를 판다. 남편은 언제 봤는지 소파 팔걸이에 붙이기 전에 잽싸게 휴지를 건네며 제지한다. 너는 더러움부심이 있냐, 제발 안 그럴 수 없냐고 하면서도 킥킥댄다.

어젯밤 티셔츠가 자꾸 위로 말려올라와 배가 드러났다. 남편이 티를 잡아내려 배를 가려주려해도 스프링처럼 계속 다시 올라갔다. 좀 긴 옷을 사면 안 되냐고 하길래 '원래는 긴 옷'이었다고 말하고 엄청 웃었다. 남편도 아빠처럼 나를 사랑해 준다. 있는 그대로 사랑받는 기분은 언제나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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