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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Sep 14. 2023

재잘거림과 언어논리는 두뇌에 깃든 선천적 능력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에서 배우기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 2장 '수다쟁이Chatterboxes'에서 인상적인 내용을 인용하고, 영감을 받아 떠올린 생각을 기록합니다.


재잘거림은 하나의 인간 본능

1930년 5월 26일 호주 출신의 금광 채굴업자 마이클 리히의 발견 그리고 그의 일기의 내용은 연구자들에게 많은 영감을 준 것이 분명합니다.

그 '재잘거림'은 언어, 1960년대까지 고립된 고지대 거주민들 사이에서 발견된 800개의 언어 가운데 하나였다. <중략> 지금까지 언어가 없는 부족은 발견된 적이 없었고, 어떤 지역이 언어 없는 집단에게 언어를 퍼뜨리는 언어의 '요람' 역할을 했다는 기록도 없다.

육아를 하고 있어서 '재잘거림'이란 표현이 경험적으로 와닿습니다. 형이 무슨 말을 할 때 자신도 꼭 무언가를 말하려고 하는 둘째를 보면 그렇고, 저 어린 나이에 아는 어휘가 별로 없어도 재잘거리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본 듯합니다.


다음 문장은 딱히 언어가 문화적 발명품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도 도발적인 반박으로 읽힙니다.

복잡한 언어의 보편성은 언어학자들에게 경이감을 불러일으키는 발견인 동시에, 언어가 하나의 문화적 발명품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인간 본능의 산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품게 만드는 첫 번째 이유다.

그리고 저자의 명료한 부연은 매력적이기까지 합니다.

석기시대 사회는 존재하는데, 석기시대 언어는 없다. 20세기 초 인류 언어학자 에드워드 사피어는 다음과 같이 썼다. "언어의 형식에 관한 한 마케도니아의 돼지치기와 플라톤이, 아샘의 사람 사냥하는 야만인과 공자가 어깨를 견준다."


본질과 거리가 멀어진 언어 이론

첫 번째 문장은 유시민 작가 책에서 본 표현인 '거만한 바보'를 떠올리게 합니다.

언어학자들은 노동자들과 교육을 적게 받은 중간계층 사람들이 더 단순하고 조잡한 언어를 사용한다는 그릇된 믿음에 여러 차례 도전해 왔다. 이것은 대화의 수월성에서 비롯된 유독한 환상이다. 일상의 대화는 색채시각이나 걷기 같은 공학적으로 탁월한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어찌나 잘 작동하는지 사용자는 이면에 감춰진 복잡한 기계장치들을 의식조차 하지 못한 채 그 결과물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리고 저자의 논리에 수긍하며, 우리는 생각할 수 없거나 너무나 편리하면 그 작동원리를 잊어버리는 듯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HAL이나 C3PO는커녕 수십 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떤 인공 언어시스템도 거리의 사람을 복제하기는 어림도 없었다.

ChatGPT 현상에 대한 글을 쓰며 배운 LLM에 대한 이해 때문인지 인류가 언어 시스템에 대해 연역적 이해는 아직 불가하나 귀납적인 활용법을 찾은 것이 바로 LLM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을 멈추고 초점을 다시 책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언어의 동력장치는 인간 사용자의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그 마무리 포장이나 배색에는 지나칠 정도로 몰두한다.

종종 우리는 드러난 것이나 할 수 있는 것에 지나치게 힘을 쏟는 경향이 있습니다.[1]

마치 그것들 사이에 중요한 차이라도 있는 양 주류 집단의 방언을 '표준말'이라고 하고, 여타 집단의 방언을 '사투리'라고 하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평소 의문을 제기하지 않던 관례였는데, 표준어와 방언이란 이분법을 저자의 관점으로 생각해 보니 '권위주의'적인 의도가 아니고서는 전혀 합리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저 역시 그러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는 생각에 <사피엔스>의 하라리 주장이 떠올라 찾아보았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개인적 욕망이라고 여기는 것들조차 상상의 질서에 의해 프로그램된 것이다. 예컨대 해외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다는 흔한 욕망을 보자. 이런 욕망은 전혀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다. 침팬지 알파 수컷은 권력이 이용해 이웃 침팬지 무리의 영토로 휴가를 갈 생각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의 엘리트들은 피라미드를 짓고 자신의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데 재산을 썼지만, 누구도 바빌론에 쇼핑을 간다거나 페니키아에서 스키 휴가를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휴가에 많은 돈을 쓰는 이유는 그들이 낭만주의적 소비지상주의를 진정으로 신봉하기 때문이다.

위 문구는 <사피엔스> 173쪽 내용입니다.


더불어 46건이 넘게 맞춤법 오류에 대한 오답 노트를 적으면서도 의미가 있는 일인가 의구심이 들었던 순간들이 떠오릅니다.

일상 언어의 절대다수가 문법적이었다. 또 중간계층의 대화보다는 노동계층의 대화에서 문법적 문장의 비율이 더 높았다. 비문법적 문장의 비율이 가장 높은 곳은 뜻밖에도 학식 있는 학자들의 학술회의였다.

최봉영 선생님의 집념 어린 연구 역시 스티븐 핑커가 찾은 언어학계의 모순과 관련이 있을 듯합니다.


저자인 스티븐 핑커 전공분야가 아동기 언어발달에 관한 연구라는 모르던 사실로 시작하는 문단입니다.

내 전공분야인 아동기 언어발달에 관한 연구에서 나온다. 복잡한 언어가 보편적인 까닭은 매세대마다 '아이들이 실질적으로 언어를 재발명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 주장의 핵심이다. 그것은 아이들이 교육을 받아서도 아니고, 아이들이 하나같이 머리가 좋아서도 아니고, 언어가 아이들에게 대단히 쓸모가 있어서도 아니다. 그것은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노엄 촘스키 주장대로 언어는 본능임을 지지하면서 그 근거로 아동기 언어발달의 사례를 전하려 합니다. 그런 의도를 전하면서 '그렇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통쾌한 설명을 합니다.


취업만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한계에 부딪힌 인문학

저자의 어조에서 과학적 태도가 엿보입니다.

언어학자들은 오늘날의 복잡한 언어들을 더 이른 시기의 언어들로 추적할 수 있지만, 그것은 단지 문제를 한 발짝 뒤로 미루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어떻게 인간이 찍찍거리는 소리에서 복잡한 언어를 창조했는지 알아내야 한다.

그리고 언어학자라는 학문 분야의 한계는 최봉영 선생님의 진지한 작업이 갖는 가치를 떠올리게 합니다. 학자가 아니라 조심스럽지만, 취업조차 힘든 인문학과의 현황과 더불어 인문학은 위기에 봉착한 듯합니다. 유시민 작가가 인문학자들이 들으면 감정이 상할 파인만의 표현 '거만한 바보'를 인용한 이유도 그러한 위기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기 위함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쨌든 저자는 과학적 태도를 견지한 언어학자의 발견도 전합니다.

언어학자 데릭 비커턴은 피진어가 단번에 완전하고 복잡한 언어로 변모할 수 있다는 증거를 제시한 바 있다. 여기에 필요한 조건은 단지 아이들이 모국어를 습득하는 나이에 특정한 피진어에 노출되는 것뿐이다. <중략> 비커턴은 만약 크리올어의 문법이 부모로부터 입력되는 복잡한 언어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의 마음의 산물이라면, 그것은 우리에게 뇌의 선천적인 문법장치를 들여다볼 수 있는 아주 깨끗한 창을 제공해 준다고 적고 있다. <중략> 심지어 동일한 기본문법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또다시 최봉영 선생님의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을 떠올리게 합니다. 심지어 일반문법이라 불리는 신체 기능은 수화에서도 발견된다고 합니다.

수화는 청각장애인 공동체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발견되며, 모든 수화는 전 세계의 구어에서 발견되는 것과 동일한 종류의 문법적 장치를 이용하는 독특하고 완전한 언어다. <중략> 그런데 정말 놀랍게도 부모의 엉터리 미국수화밖에 보지 못한 사이먼이 부모보다 훨씬 나은 미국수화를 구사했다.

그래서 말합니다.

우선 부모가 자식에게 언어를 가르친다는 속설을 머릿속에서 지우자. <중략> 아이들은 그들이 습득한 언어에 대해 최고 학점을 받을 자격이 있다.


대화는 경청에 의해서 완성된다

이 모든 경우에 화자의 의도는 청자에 의해 채워진다.

인용한 문장을 보면 <대화를 하세요, 그게 관계예요>에서 인용한 강렬한 메시지가 떠오릅니다.

그리고 개인적인 숙제로 오랫동안 마음에 두었던 '의사소통' 그리고 '경청'에 대해 제가 아는 지식과 경험을 생생하게 해 줍니다. 대화는 '마주'와 '서로'가 필요한 상호작용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출처: 네이버 한자 사전


저자가 지지하는 촘스키의 주장을 담은 인용문입니다.

촘스키는 만약 언어 논리가 어린아이들에게 배선되어 있다면 아이들은 두 개의 조동사를 가진 문장과 처음 마주쳐도 적절히 단어 배열을 조정함으로써 그 문장을 의문문으로 바꿀 수 있을 것이라고 추론했다. <중략> 촘스키가 '입력 결여에서 도출되는 논거'라고 불렀던 이와 같은 논증은 촘스키에게 언어의 기본설계도가 선천적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해 주는 주된 근거였다.

'배선'이라는 표현은 꽤 훌륭한 단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저자는 언어 논리가 선천적이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한 과학적 단계를 밟아갑니다.

만약 언어가 본능이라면 우리 뇌 안에서 언어의 자리가 확인될 수 있어야 하고, 언어 회로의 구성에 관여하는 특정한 일단의 유전자가 있어야 한다.


언어가 만드는 놀라운 허구의 힘

언어가 만들어내는 허구의 힘은 놀랍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진지하게 이야기한 일들이 상상으로 꾸며낸 허구라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허구의 힘이 인류에 얼마나 강력하게 작용하는지는 <사피엔스>에서 처음 알았지만, 일종의 무속에 기반한 주장으로 대한민국 현실 정치에도 영향을 끼치려는 시도가 2023년 현실에 존재한다는 사실에서도 다시금 허구의 힘을 확인합니다.

저자의 인용문으로 돌아가 보면 사실 소설이나 영화는 그러한 허구의 힘을 산업으로 만든 것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언어논리는 두뇌에 깃든 선천적 능력

이번 장 마지막 쪽에 있는 다음 문단은 여러 가지 선행 연구를 인용한 이번 장의 주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인간이 사는 곳이면 어디에서나 복잡한 문법이 펼쳐진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는 석기시대를 떠나지 않았어도 된다. <중략>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필요가 없다. 심지어 학교에 갈 만큼 자랄 필요도 없다. <중략> 이 모든 이점들을 다 가졌다 해도 유전자나 두뇌 일부에 결함이 있으면 우리는 유능한 언어 사용자가 되지 못한다.


주석

[1] <기능이 형태를 지배해야 한다>편에서 다룬 FFF도 그런 인간의 편향 혹은 오류를 보정하기 위해 강조된 원칙이 아닐까 상상해 봅니다.


지난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에서 배우기 연재

1. 언어는 본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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