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영회, 드러커를 만나다 11
지난 글에 이어서 <경영의 실제>에 대해 앞서 정리한 글귀를 다시 돌아보는 글입니다.
<경영자는 현대산업사회의 기본적 기관(Organ)>에서 인용한 글을 다시 봅니다.
경영자는 아마도 서구문명이 존속하는 한, 사회의 기본적 지배적 기관으로서 존속할 것이다. 왜냐하면 경영자는 현대산업사회 시스템의 본질상 필요할 뿐만 아니라, 산업사회 시스템이 그 생산자원-인적자원 및 물적자원-을 위탁하고 있는 현대기업이 경영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드러커는 기업을 산업사회의 기본 단위라고 합니다. 지난 글의 원자 비유를 다시 들면, 기업이 사업사회를 구성하는 원자라면, 경영자는 원자핵이죠. 경영자는 전자를 잘 다루어서 생산물을 극대화하여 기업 성장을 이뤄내는 역할입니다. 전자는 지원들이죠.
이에 대해 드러커는 원자핵이 아닌 기관으로 비유했습니다.[1]
경영자란 하나의 기관(organ)이며, 기관이라는 것은 그것이 수행하는 직능을 통해 설명될 수 있고 또 규정되기 때문이다.
기관 정의를 보면 하나의 기능에 담은 개념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소프트웨어 설계에서 입자의 응용>에서 다룬 생각과 섞이는 일을 경험합니다. 기관이라는 말은 개념에 선을 긋는 입자 역할을 한다는 것이죠.
다음 문장을 다시 보니 <드러커의 <경영의 실제>를 펼친 날> 그리고 지난 글에서 인용한 '생산물'의 단위를 설명하는 글입니다.
경영자는 그 존재의 정당성과 권위를 오직 그가 생산하는 경제적 결과에 의해서만 인정받을 수 있다.
물론, 계측을 위한 단위를 언급하거나 암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드러커 글에서 영감을 받아 시도 중인 베터코드의 측정에 대한 도전의 바탕이기도 하고, 흔히 하는 성과 측정에 대한 명징한 기준을 제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더불어 드러커의 그 유명한 말도 있죠.
이러한 드러커의 전제를 바탕에 두면 다음 문장에서 다시 기관이라는 생물학적 비유의 정당성을 이해하게 됩니다.
경영자의 모든 행동, 모든 의사결정, 모든 고려 사항은 언제나 경제적 차원에서 결정되어야 한다.
경제적 차원이 꼭 현재의 매출이나 이익 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복습의 범위를 넘어서지만, 책의 77쪽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경제활동은, 그것이 하나의 활동이므로, 미래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미래에 관한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불확실성과 위험이다. <중략> 생존은 기업의 첫 번째 의무다. 달리 말해, 기업 경제학의 지도원칙은 이익최대화가 아니다. 그것은 손실의 회피다.
뒤이어 드러커의 자세한 설명이 있지만, 이는 이후에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지금은 복습에 초점을 둡니다.
이전 글의 제목으로 사용한 <혼란을 야기하는 귀찮은 일들을 다루는 경영>이라는 측면은 드러커를 통해서 처음 알게 된 발견입니다. 물론, 제 입장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경영을 "과학적"인 것으로 또는 "직업"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그것이 아무리 진지한 것이라 해도 그것은 마침내 "혼란을 야기하는 귀찮은 일들"을, 즉 기업 활동의 불가측성-기업의 위험, 기업의 영고성쇠, "소모적 경쟁", 그리고 "소비자의 비합리적 선택"-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도록 할 것이고, 그리고 그 과정에, 경제적 자유와 경제의 성장 능력을 제거하려는 시도를 하게 할 가능성이 크다.
인용한 문장에서 "과학적" 혹은 "직업"은 "사전에 규정된" 혹은 "불확실성과 위험이 없는" 정도의 뉘앙스를 줍니다. 공교롭게 혼란을 피하고자 하는 극단적 사례로 다뤄진 인물인 간트인데, 개인적으로는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폐단처럼 느껴졌던 도구가 간트 차트였습니다.[2]
MS 프로젝트나 엑셀이라는 강력한 도구 탓에 간트 차트를 써서 정교한 미래를 복잡한 전자 문서에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을 줄었지만, 근 10년 사이에도 이를 필수도구로 여기는 지인들이 있었죠. 사실 <계획은 개나 주자>는 그런 행동양식을 지닌 경영자를 비난하는 마음을 다스리며 쓴 글입니다.
경영환경이 내포하는 혼란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고, 미래에 초점을 맞추는 탓에 불확실성과 위험이 경영자의 벗(혹은 적)이란 점을 납득하면 다음 문장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경영활동은 경제적 환경을 형성하려고 시도할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며, 그런 경제적 환경에 대해 계획을 수립하고 주도권을 쥐고,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위 문장을 다시 곱씹어 보니 기업가 정신이라는 나에게는 다소 모호했던 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집니다. 그리고 위 문장은 경영자나 경영활동의 범주에서 쓰인 문장이라면, 책의 67쪽에는 기업과 사회라는 범주에서 비슷한 측면을 다루는 글이 있습니다.
기업은 오직 확장하는 경제 하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또는 적어도 변화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그리고 동시에 바람직한 것으로 취급하는 사회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상에서 배운 바는 이전 글의 제목이기도 한 <경영활동은 시행착오로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가능성의 확인은 경제적 조건으로만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이에 대해 드러커는 이렇게 말합니다.
기업의 이익을 위해 무엇이 바람직한가 하는 것은 또 다른 하나의 기둥이다.
이 문장에 이어지는 내용이 <경영활동은 시행착오로 가능성을 확인하는 일>에서 인용한 다음 문단입니다.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의 환경을 절대로 "통제"할 수 없고 더군다나 인간은 가능성이라는 단단한 자물쇠 내에 항상 갇혀 있으므로, 처음에는 무엇이 바람직한가 하는 가능성을 탐색하고, 나중에는 실질적인가를 검토하는 일이야말로 경영자가 수행해야 할 구체적인 과업이다.
놀랍게도 애자일의 당위성을 말하는 듯도 하고, 지난 글에서 경영자가 '생산성의 원천' 혹은 '생명력의 원천'이라는 드러커의 사상을 재확인했던 순간도 떠오릅니다. 간트를 그리며 완전한 통제 욕구를 드러낼수록 경영에 대한 오해를 하기 쉽다는 생각도 함께 합니다.
[1] 처음 이 책을 읽을 때, 여백에 '왜 기관인가?'라고 썼습니다. 지금 보니 입자를 표현한 은유였는데, 물리학 대신 생물학 메타포를 썼군요.
[2] '간트 없이 어떻게 프로젝트 관리를 하느냐'라고 묻는 분이 있다면 2008년 저에게 가장 강렬한 영감을 주었던 One Page Project Management 책을 추천하겠습니다.
9. 경영자가 맞이하는 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