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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Sep 07. 2023

언어는 본능이다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에서 배우기

스티븐 핑커의 <언어본능> 1장 '언어는 본능이다'에서 인상적인 내용을 인용하고, 영감을 받아 떠올린 생각을 기록합니다.


<사피엔스>가 깨우쳐 준 무지를 또 느끼다

놀라운 내용입니다. 물론 놀라움은 인용한 문단의 앞부분 즉, 시연 내용을 직접 읽어 보셔야 공감할 것입니다.

나의 시연은 우리가 가진 읽기와 쓰기 능력에 기댄 것으로, 이 능력은 시간, 공간, 친분의 간극을 이어 줌으로써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을 대단히 인상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러나 쓰기는 선택사양 품목일 뿐이다. 언어 커뮤니케이션의 진짜 엔진은 우리가 어려서 습득하는 말이다. <중략> 공통의 언어는 막강한 응집력을 발휘하여 한 사회구성원들을 정보공유 네트워크에 통합시킨다.

제 개인적인 놀라움으로 한정하면 <사피엔스>를 읽으며 '허구'가 우리 종에 미치는 강력한 힘에 대한 무지 상태를 깨닫고 느낀 충격과 유사합니다. 교묘하게도 그 ‘허구'를 생산하는 능력은 바로 '언어'에 있었고, 이는 생물학적 영역에 해당하는 본능일 수 있다는 느낌을 단 몇 페이지만에 선사합니다. 게다가 고생해서 읽었던 스티븐 핑커의 다른 책과 달리 비교적 쉬운 표현에 위트까지 담아서 전합니다.


언어가 본능이라면 SNS야 말로 본능을 간파한 대단한 발견(?)이자 인간 본능에 호소하는 발명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의 흥분(?) 상태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럼즈펠드의 틀을 찾았습니다. 이런 '무지'를 깨달으면 '흥미로운 깨달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언어가 본능인지라

언어는 문화적 발명품이란 생각이 확고한 독자를 위해 스티븐 핑커는 다시 잽을 날립니다.

사람들은 말을 건넬 상대가 없으면 자기 자신에게, 기르는 개에게, 심지어 풀포기에게까지 말을 건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승리는 빠른 자가 아니라 말 잘하는 이에게 돌아간다.

'말 잘하는 이'라는 표현을 보니 대한민국에서 현실 정치에까지 영향을 끼친다는 법사가 떠올라 구글링을 해 보았습니다.

터무니없는 소리를 지껄여도 따르는 이가 있는 모습을 보면 분명 언어는 본능이란 점을 깨달은 이들이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에는 분명 재주가 있었던 듯합니다. '터무니없다'는 저의 판단은 합리나 논리에 따른 것이라 보편성이 떨어지는 판단일 수 있다는 점도 깨닫습니다.


언어는 학습하는 문화적 인공물이 아니다

다음은 스티븐 핑커가 이 책 집필 목적을 쓴 듯한 강렬한 글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는 이러한 상식적인 견해들이 죄다 틀렸음을 여러분에게 확신시키기 위해 노력할 참이다. 그것들이 죄다 틀린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언어는 시간 읽는 법이나 연방정부 운영 방식을 학습하듯이 학습하는 문화적 인공물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 뇌의 생물학적 구조의 일부다.

그래서 책 제목에 '본능'이 들어간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좀 색다르게 받아들일지도 모르는 '본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싶다. 이 용어에는 거미가 거미줄 치는 법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대동소이한 의미에서 사람들은 말하는 법을 안다, 라는 생각이 담겨 있다.

거미줄과 언어라니 굉장한 비유입니다.

의식적 노력이나 정규교육 없이 어린아이에게서 자연발생적으로 발달하며, 그 저변의 논리에 대한 자각 없이 전개되며, 모든 개인들에게서 균질하며, 정보처리나 지능적 행동에 필요한 더 일반적인 능력들과 구분된다.

관점을 바꾸면 다음과 같은 시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언어를 해명 불가능한 인간 고유의 본질이 아니라 정보를 전달하려는 생물학적 적응으로 보기 시작하면 <중략> 다윈의 말을 빌면, "우리의 찬탄을 불러일으키는 구조의 완벽성과 상호적응을 갖춘 기관"


언어가 일종의 본능이라는 관념은 다윈이 시작한 것

종의 기원의 다윈이 이러한 생각도 처음 명료하게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언어가 일종의 본능이라는 관념이 처음 명료하게 표현된 것은 1871년 다윈에 의해서였다.

다음 내용은 다윈의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에서 보듯이, 인간은 말을 하려는 본능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들에게 술을 빚고, 빵을 만들고, 글을 쓰려는 본능적 경향은 없다.

대비를 이용한 명쾌한 설명입니다. 저는 다윈에게서 세스 고딘이 말한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의 훌륭한 사레를 보는 듯합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힘든 이유는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지식을 멀리 치워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저자의 부연에 따르면 다윈은 언어능력이 '어떤 기술을 습득하려는 본능적 경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윈의 추종자 윌리엄 제임스의 기록이 이어집니다.

그는 인간은 동물들이 가지고 있는 본능들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 그 외의 많은 본능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유연한 지능은 서로 경쟁하는 여러 본능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다. 사실, 인간 사고의 본능적 특성이 되레 사고를 본능으로 보기 어렵게 만든다.

다음은 저자의 판단 근거가 된 윌리엄 제임스 인용문 일부입니다.

배움은 당연한 것을 이상하게 보이도록 만드는 과정을 수행하며, 마음은 이 배움에 의해 뒤틀린다. 그리하여 인간의 모든 본능적 행동에 대해 '왜'라고 묻게 된다.


언어의 작용도 우리의 지각과 거리가 멀다

언어의 작용이 우리의 지각과 거리가 멀다는 표현은 자못 충격적이기까지 합니다.

산란의 근본적인 이유가 파리의 지각과 무관하듯이 언어의 작용도 우리의 지각과는 거리가 멀다. 우리는 생각이 마음의 검열을 너무나 힘들이지 않고 통과하는 입 밖으로 튀어나가는 바람에 당황하곤 한다.

다년간 경청 훈련(?)을 하고 있는 입장에서 경험적으로 동의할 수밖에 없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은 저자가 윌리엄 제임스의 표현을 패러디하여 책의 목적에 대해 다시 설명하는 듯한 내용입니다.

나는 여러분들의 마음이 배움에 의해 뒤틀리고, 그리하여 이 당연한 재능들이 이상하게 여겨지고, 그리하여 이 편안하게만 보이는 능력 대해 '왜', '어떻게'라는 질문을 던지게 만들고 싶다.

반면에 다음 내용은 단박에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언어의 용이성, 투명성, 자동성은 환상이다. 그 환상의 가면을 벗기면 엄청나게 풍부하고 아름다운 시스템이 드러난다.

어쩌면 이 문장들을 이해하는 것이 책을 읽는 목적이 되어야 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노엄 촘스키가 주장하는 언어에 대한 두 가지 근본적인 사실

뒤이어 전하는 노엄 촘스키의 주장은 굉장히 매력적입니다.

어떤 사람이 내뱉거나 이해하는 모든 문장은 사실상 우주 역사상 최초로 출현하는 완전히 새로운 단어조합이다. 따라서 언어는 반응의 레퍼토리일 수 없다. 틀림없이 우리 두뇌에는 유한한 단어들의 목록으로부터 무한한 문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비책이나 프로그램이 담겨 있다.

저자는 이를 '정신문법'이라 부를 수 있다고 합니다. 뒤이어 촘스키가 주장한 두 번째 근본적인 사실을 설명합니다.

어린아이들이 이 복잡한 문법을 재빨리 그리고 정규교육 없이 전개하며, 난생처음 부딪히는 새로운 문장구조들에 일관된 해석을 가정한다는 점이다.

반복해서 읽다 보니 잊혔던 관련 경험이 떠오릅니다. 중국에 있을 때, 중국어를 굉장히 열심히 공부하는 동료가 있었는데, 노력에 비해 실력이 늘지 않았습니다. 저도 모르게 유심히 관찰하게 되었는지 다른 사람과 확연하게 구분되는 어떤 패턴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 패턴은 영어 문법처럼 본인이 알고 있는 틀에 중국어를 분해하여 대입하려고 시도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중국어를 배우는 방식은 일상의 순간과 그 맥락에 굉장히 밀착해 있기 때문에 그런 시도가 어쩐 이유인지 굉장히 소모적이란 추측을 했었는데, 근거는 없었습니다. 그저 직관이었을 뿐인데, 촘스키의 주장을 읽으니 당시의 제 직관을 설명해 주는 듯합니다.


경계를 허무는 언어와 마음의 과학

다음에 인용한 내용 중에 첫 문장을 보자 대번에 데카르트의 오류가 떠오릅니다.[1]

지난 수세기의 지성사에서 신체의 발달과 마음의 발달에 대한 접근법이 판이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인간이 경험을 통해 날개가 아니라 팔을 갖게 되었다거나, 특정 기관의 기본구조가 우연한 경험에서 비롯되었다는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서양에서 오랫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데카르트의 이분법 즉, 정신 혹은 마음과 신체를 분리한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설명하는 안토니오 다마지오의 책입니다. 물론, <언어본능>에서는 언어 사용 능력을 주제로 다루니까 범주는 다르지만, 근대 교육에서 비롯한 오랜 이분법적 사고의 오류를 알리는 면에서는 같은 느낌을 줍니다.


오랜 통념을 깨는 시도를 암시하는 글을 보며 통쾌한 기분까지 듭니다.

진지하게 탐구해 보면 인간의 인지체계는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살아가는 동안 발달하는 신체구조 못지않게 경이롭고 복잡하다. 그렇다면 언어와 같은 인지구조의 획득을 복잡한 신체기관을 연구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으로 연구해서는 안될 이유가 어디 있는가?

앞으로 돌아가 지은이 서문을 다시 보니 저자는 이러한 분야를 '언어와 마음의 과학'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책을 통해 따라가고 있는 지식은 어쩌면 해당 분야의 성과에 대한 설명이란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을 읽을 때는 최봉영 선생님이 정리 중이신 <언어에 대한 일반이론>과 일치하는 면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언어집단에 속한 개인들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언어를 발달시켜 왔다. 이 사실은 이 개인들이 문법 구성을 인도하는 고도의 구속력을 갖는 원리들을 이용하고 있다는 가정 우이에서만 설명 가능하다.

마지막으로 다음 문장은 1장을 간결하게 요약하는 듯합니다.

나는 눈이 그러하듯 언어를 하나의 진화적 적응으로 간주하고, 그 주요 구성 부분들은 중요한 기능들을 수행하도록 디자인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주석

[1] 박문호 박사님 월말김어준 강의에서 여러 차례 언급한 이유로 사서, 생소한 책인데 어렵게 따라 읽은 책입니다. 당시 썼던 독후감이 아래 있습니다.

뇌 구성의 우아함을 음미하기

감정과 느낌의 장애는 사회적 행위의 결함을 초래한다

신체표지 가설과 감정

신체에 마음을 두다

추론의 바탕을 제공하는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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