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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영회 습작 Jul 31. 2023

아티스트로 살기 위해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월요안영회 2023

이 글은 책을 읽고 쓰는 글입니다. 직전까지 '<제로 투 원>에서 배울 수 있는 내용'과 같은 식의 연재로 작성했는데, 이번에는 아예 내가 살아가는 방식에 부합하는 내용을 중심으로 배울 점을 추리겠다는 의지로 하나의 글에 담고 연재도 책이 아니라 제 생각이 중심인 곳에 씁니다.


계속 아티스트로 살자

세스 고딘의 <이카루스 이야기>의 시작은 매력적이었으나 반쯤 읽을 때까지는 반신반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5부를 읽을 때 비로소 나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책의 마지막인 '나오며'의 제목은 '당신은 아티스트인가?'입니다. 여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 있습니다.

아트는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이다. 진정으로 살아 숨 쉴 때, 비로소 가능한 일이다. <중략> 아티스트란 기존 질서에 도전하는 용기와 통찰력, 창조성과 결단력을 갖춘 사람임을 말이다.

사회생활 진출 방식과 그 후 지켜온 삶의 방식을 보면 세스 고딘의 표현으로 아티스트로 살아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체 5부로 구성된 <이카루스 이야기>를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5부였습니다. 5부를 읽고 마음먹은 사실은 뒤돌아 보지 말고 스스로는 이대로 아티스트가 되고, 나의 두 아들도 아티스트로 키우는데 필요한 내용을 참조 혹은 숙지하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어떻게 아티스트로 계속 살 수 있을까요? 세스 고딘에 따르면 '위대한 작품을 창조하라'는 내 안의 소리를 따르라고 합니다. 그러한 삶을 그는 아티스트라고 하는데, 아티스트의 기반을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아티스트의 세 가지 기반: 보기, 만들기, 백지상태

첫 번째로 보는 법을 배우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선입견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법을 배우라는 말입니다. 저자는 불교 용어 반야(般若)를 소개하지만, 영리함을 침묵하게 하라고도 표현하는데 그 말이 더 와닿습니다. 그리고, <팩트풀니스>를 보고 배운 바와 최근에 쓴 <내가 과학을 공부하는 진짜 이유>가 이미(?) 보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며칠 전에 알았더라면 <내가 과학을 공부하는 진짜 이유>에 덧붙이고 싶었을 내용이 194쪽에 나옵니다.

예측이 틀렸을 때, 사람들은 자신의 세계관이 아니라 세상에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거나 기존의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운명을 탓하고, 예외로 치부해 버린다. 하지만 판단착오의 경험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안목에 대해 고민하고 더 다듬어나갈 수 있다. 그럼으로써 시장의 근본적인 수요,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요소를 이해하게 된다.

절절하게 내 이야기 같다는 생각을 하며 <베터코드 첫 서비스 우여곡절 이야기>와 그 후 시간에 대해 저자에게 공감을 받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당신이 옳다> 그리고 세계관 On/Off 능력

그리고 다음 내용을 읽을 때에는 '보기'뿐 아니라 제대로 대화하는 능력도 잃어버린 제 모습을 확인하게 합니다.

그냥 바라보는 것이 힘든 이유는 자신에게 이미 익숙한 지식을 멀리 치워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어제도 아내와 대화 속에서 나에게 익숙한 것을 지키기 위해 아내가 익숙한 표준(?)만 긍정하는 태도를 비난하는 마음이 일었던 순간이 떠오릅니다.[1]


그리고 다음 문장을 읽을 때에는 세계관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하자는 각오를 해 봅니다.

자신의 세계관을 버리기 전까지 우리는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없다. 물론 세계관은 일상생활에서 쓸모가 있다. 일련의 전제와 편견, 믿음으로 이루어진 세계관을 통해 우리는 세상과 관계를 맺고,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 외부와 접촉할 때마다 매번 모든 것을 검토하고 판단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더욱 익숙하게 정보를 처리하고 일관되게 행동할 수 있다.

세계관이 양날의 검이란 사실을 바로 알고 평소에도 내려놓는 훈련을 하자고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세계관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방해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능력을 키워야만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볼 수 있다.


그들의 눈을 통해 보고 계속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기

<떨림과 울림>에서도 '우리는 믿는 것을 본다'라고 했습니다.

무엇을 보게 될지 미리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어둠이 아닐 것이며, 거기서는 빛을 밝히는 아트가 존재할 수 없다.

이를 극복하려면 어둠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해법을 이 책이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름에 갇혀 이면을 보는 능력을 잃을 수 있으니 '보기 위해서 이름을 잊으라'라고 합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을 읽을 때 비로소 <당신이 옳다>[2]에서 강조한 시도가 필요한 진정한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 쉴 새 없이 분류하고, 판단하고, 받아들이기 껄끄러운 것들을 외면하는 동안 우리는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한다. 우리는 기회를 보지 못한다. 고통과 마주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하게, 아무 시도도 하지 않는 데 따른 위험을 보지 못한다.

또한, 어떤 아트가 시장 판도를 바꾸고 있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서 그들의 눈을 통해 보는 법을 배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궁극적으로 행할 행동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다양한 세계관을 이해하여 함께 융합하면서 계속해서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은 깊숙이 뿌리내린 세계관을 버린다는 뜻이다. 그리고 자신의 기대에 따라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선입견 없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글이 길어져서 이후 내용은 다음 글에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I do not define, Only I must observe

글을 쓰고 난 다음날 김상욱 교수님 강의 영상에서 모르는 것을 정의하지 않는 뉴턴의 태도가 근대 과학에 아주 중요한 부분이라고 설명하시는 부분이 있었는데 이를 옮겨 옵니다. 좌측은 라틴어이고, 우측 영어 번역 영역에서 붉은색 표기가 그것입니다.

옮기면서 다시 보니 'Only I must observe'라는 표현이 보입니다. 뉴턴의 기록 속에는 세스 고딘이 역설한 보는 법에 대한 훌륭한 기록이 있습니다.


주석

[1]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를 읽는 덕분에 화를 내거나 생각을 바로 말하지 않고, 숙성시킨 후에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풀어가려고 합니다.

[2] 12편의 기록을 남겼던 <당신이 옳다>에서 배운 내용을 아직 부드럽게 실천하지 못하는 자신을 확인하며, 조만간 다시 <당신이 옳다>를 펼쳐야 한다는 생각도 합니다.


지난 월요안영회 연재

1. 경계와 활용(Boundaries & Leverage)

2. 웹툰과 지인들의 글을 보고 '세션 관리' 벼리기

3. 내가 과학을 공부하는 진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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