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안영회 - 8호
페친인 박태웅의장님 소개로 구입한 책 <미래의 교육, 올린> 에필로그에서 교육에도 혁신가가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내가 필요하다는 뜻은 아니겠지만, 나는 교육에 관심이 있고 혁신을 대가로 보상을 받는 일이 잦으니 혁신가이기도 하다. 다만, 지금 약속한 일을 마치고 나서 전력을 다할 수 있을테니까 어림잡아 8년은 기다려야 할 듯하다. 물론, 짬짬이 기여할 방법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당분간 전력을 다할 수는 없다.
앞으로 계획을 논하기 전에 지난 과거를 재미삼아 휘리릭 그려보았다. 나는 1999년에 처음으로 돈을 받고 프로그램을 작성하는 일을 시작했다. 복학을 늦게 하는 통에 졸업 전에 시작한 개발 일이다. 다행히 졸업하고 내가 가는 회사가 어떤 근무 환경인지 알게 되면서, 일반적인 루트를 선택하지 말자는 전략을 갖게 되었다. 1999년은 소프트웨어 개발자에게 적합한 직장은 거의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벤처 창업 말고)
그래서 우연히 BK21 사업 참여를 준비하시는 교수님을 도와 IT전문대학원 설립을 함께 하고 HBR 기사를 배경으로 설계한 교육 프로그램을 내가 만들고 내가 다녔다. 작명은 교수님이 하셨지만 비즈니스 컴퓨팅이라는 이학 석사였고, 강사진 대부분이 현장 전문가로 구성된 단명한 프로그램이다. (경기상황이 좋지 않아 BK21 사업지원도 끊기고 3기에서 멈췄다.)
암튼 그때 얻은 배경지식과 인적 네트워크로 비교적 어린 나이에 컨설팅 회사에서 일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컨설팅 회사에서 논리적 사고를 하고 표현하는 모습에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런 기획안을 UML을 이용하여 실체화 할 수 있다는 기대감에 행복했다. 문제는 컨설팅 회사의 결과물을 SI회사라 불리는 대형 외주개발회사 가 책임지고 개발하는데, 이는 다시 하청 개발업체 개발자에게 할당되면서 설계 결정은 사실상 사라진다는 점이었다.
나는 너무나 불합리하다 생각해서 내가 코드 샘플을 직접 만들겠다고 나섰다. 그 선언의 결과는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로 당시 국내에서는 잘 쓰이지 않았던 스프링 프레임워크를 도입하고, 참조할 곳이 없어 소스코드를 까보고 블로그에 메모를 하고 내가 메모한 글을 다시 참조하는 삶이 1년 넘게 지속되었다. 그렇게 컨설팅회사에서 코드의 모양까지 책임지는 일을 하며 우리 회사를 찾는 클라이언트들에게 나는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돌아보면 그렇다는 의미다. 당시는 그런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영업/기획/설계/PM을 모두 책임지며 했던 4년간의 프로젝트를 끝으로 나는 당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단순히 회사를 그만 두었다기 보다 내가 일하던 방식을 완전히 바꾸고 싶어 리셋을 결심했다. 아주 공교롭게 그 결심을 할 즈음 지금 파트너인 안영완님이 함께 크로스보더 일을 하자는 당시에는 뜻도 몰랐던 단어를 언급하며 제안을 해왔지만, 처음에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창업하고 첫 시작은 북경개발센터라고 불리던 북경의념과기유한공사의 구성원들을 살리는 일이었다. 애초에 한국회사의 개발을 위탁할 오프쇼어센터로 만들어진 곳인데, 시대 변화에 뒤따라가지 못해 경쟁력을 잃은 곳이었다. 당시 법인장님이 중국인 개발자 직원들이 회사가 망해도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경쟁력을 갖게 해달라고 부탁하셨다.
그래서 CTO님이 <Micro Service, Docker로 할 수 밖에 없었던 사연>편에 쓴 일들이 벌어졌다. 아래 사진이 그 일을 함께 했던 한국인 개발자들이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가 모르는 조직에서 외국인들이 그들의 환경에서 어떻게 경쟁력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찾아야 한다. 그 과정은 어디서 배운 전공이 아니고 바로 그 자리에서 배우고 적응하는 그런 일이었다. 이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가장 적절한 이름은 아마 혁신이 아닐까 싶다.
<베터코드 첫 서비스 우여곡절 이야기>편에서 쓴 바 있는데, 2020년 1월 코로나가 상륙하기 직전 설을 위해 서울에 왔는데, 4월 완전한 북경 철수로 이어졌다. 다행히 요우마란 이름으로 자체 서비스를 시작해두어서 할 일은 명확했다. 이제는 우리 단독으로 살아 남아야 하는 스타트업이 되었다. :)
개발 조직 혁신 성공 경험을 가진 나에게 큰 도전이었다. 일단, 내 스스로가 전혀 다른 역할을 해야 했다. 일단 개인적인 혁신이 필요했다. 이제 조직 문화나 협업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매출이 없어도 시장도 아직 형성되지 않은 서비스를 키울 수 있는 해결책을 내놓아야 했다. 다행히 지금까지 2년 반 정도의 시간을 그럭저럭 항해하고 있다.
무엇을 해야할지 막막할 때, <빠른 의사결정은 스타트업 대표의 의무>라는 생각으로 동료들이 결정을 요구할 때 즉석에서 할 수 있도록 준비했다. 지금껏 잘 견뎌온 이유는 내 성향 탓인 듯하다. 나는 대체로 모호한 문제를 좋아한다. <의사결정을 위한 문제영역 구분의 틀>편에서 소개한 커네빈(Cynefin)에 따르면 Chaotic 이나 Complex 유형인데, 일을 해보면 나와 비슷한 사람보다는 반대인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 점들이 나를 혁신가로 만들고, 스타트업 경영자로 사는 일도 적응시킨 듯하다.
적응을 했다고 해서 스트레스가 없는 것은 아니다. <리더가 극복할 7가지 필수 스트레스> 두 편을 쓰며 확인한 사항이 바로 그간 내가 감당한 스트레스였다. 작년엔가 딱 10년만 채우고 베터코드 대표이사는 그만 두겠다는 말을 동료들에게 했다. 창업후 10년이 아니라 2020년 기준으로 10년이니까 2030년까지 회사가 존속하면 뜻을 이룰 수 있다. 그 다음에 무엇을 할지 계획은 없다.
다만 7년 반 정도가 남아 있다고 생각하니 두 가지 생각을 할 수 있다. 조금 더 사업에 전념하기 위해 소프트웨어 전문 지식을 내려 놓아야겠다는 생각이 하나고, 다른 하나는 어쩌면 교육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이 글의 직접적인 동기는 두 번째 생각이다. 그건 그렇게 모호하게 두고...
첫 번째 결심에 대해서는 요즘 동지도 나타났다. 3년 안에 99년부터 내가 배운 지식을 풀어놓을 생각이다. 그리고 사업에 전념하자. 마틴파울러에 비견할 수준으로 결과물을 내놓고 싶다.
1. 계획은 개나 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