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 독후감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읽게 된 계기는 박문호 박사님에 대한 팬심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유시민 작가님에 대한 기대가 있기는 하지만 이미 사 둔 과학책이 많았는데, 박문호 박사님과의 대담을 보고 나서 '이건 못 참지'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만든 규칙을 깨고 <문과 남자의 과학 공부>를 사서 읽었습니다. 다행스럽게 매우 흥미로웠고 꽤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이 글은 책 소개는 아니고 제가 관심을 둔 부분이나 활용할 법한 내용을 담는 글입니다.
파인만의 책에서 인용한 '거만한 바보'란 표현은 약간의 충격과 함께 흥미를 끄는 표현이었습니다.
토론회에는 거만한 바보가 많았고, 그들이 나를 궁지에 몰았다. 바보는 나쁘지 않다. 대화할 수 있고 도울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얼마나 대단한지 자랑하는 거만한 바보는 어떻게 할 수가 없다.
'거만한 바보'란 표현을 곱씹어 보니 두 가지 자극 혹은 기억을 떠올랐습니다. 하나는 <외면(外面)하기와 직면(直面)하기>에서도 썼던 저의 단골 메뉴 직면(直面)입니다. 제가 직면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이미지는 바로 타이슨의 격언입니다.
하지만 '거만한 바보'란 표현은 다시 페벗님을 통해 알게 된 캠벨의 다음 격언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하지만, 캠벨은 바보를 지적하는 표현이 아니라 자신의 무지 혹은 두려움을 직시할 때 우리가 찾던(?) 보물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는 또다시 럼즈펠드의 노하우를 연상시킵니다.
바로 <사분면 혹은 매트릭스 활용하기>에서 인용한 럼즈펠드의 사분면인데요. <린 분석> 책을 볼 때 상당한 영감을 받아 인용해 두었던 것인데, 당시에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기록(펌질)의 가치가 빛을 발하는 순간입니다.[1]
앞서 언급한 캠벨의 문구는 '모른다는 것을 모르는 것'을 연결할 수 있습니다. '탐색'은 'seek'으로, '경쟁우위와 흥미로운 깨달음'이 바로 'the treasure'입니다. 이렇게 대응시켜 보니 다시 '거만한 바보'와 '럼즈펠드'의 차이도 구할(?) 수 있을 듯합니다.
럼즈펠드는 능히 공포라는 동굴을 인식하고 찾을 수 있는 사람일 듯합니다. 반면에 '거만한 바보'라면 공포에 압도되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동굴을 피하는 삶의 방식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문장에서 유시민 작가에 대한 호감이 '인정'으로 바뀝니다.
내가 바로 '거만한 바보'였다.
더불어 제가 '거만한 바보'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고마운 분들과 그 순간들도 떠오릅니다. <내가 과학을 공부하는 이유>에 썼듯이 2012년에 만난 멘토는 나에게 '과학'이 태도란 직관을 심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내가 과학을 공부하는 진짜 이유>에서 썼듯이 많은 책과 과학 커뮤니케이터들이 유시민 작가와 마찬가지로 '운명적 문과'인 내가 과학으로 태도로 받아들이게 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책을 읽으면 '거만한 바보'를 벗어나던(혹은 벗어나고 있는) 과정에서 배운 경험과 연결시켜 제 경험을 소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험에서 배운 바를 대입하여 제 나름으로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나름의 해석이 어떤 것인지 두 가지 구절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저는 다음 문구를 읽으면 밑줄을 치고 OKR이라고 메모했습니다.
주제 자체가 모호해 토론자들이 아무 말이나 막 해도 주제와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OKR이 유행하며 쉽게 오용되는 현실을 목도하지만 과학적(?)으로 써서 가치를 만들어 온 경험이 있습니다. 이를 떠올리는 저의 언어는 '정렬'입니다. 과학자들의 행동 양식과 연결해 보면 '논문'과 '인용'이라는 형식이 목적과 KR을 대응시킬 수 있습니다. 협업을 할 때 직업 일상의 소통에 목표를 마치 '논문'처럼 대하고 업무의 결과가 목적을 지향하도록 '인용'을 흉내 내면 분명 생산성을 확보했다고 믿습니다.
하나 더 있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스스로는 지혜롭다고 믿는 거만한 바보였다.
이는 제가 어렵게 TDD에 대한 저항을 극복하고 받아들였던 십수 년 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리고 이후에 XP를 익히면서도 반직관적이라 여겼던 당시의 느낌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각각 요약할 수 있습니다. 먼저 TDD를 배우기 전과 후의 제 변화를 한 문장의 요약한 내용입니다.
(프로그램 작성을 시작할 때) 나는 아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모르는 상대로 대충 프로그램을 작성하려고 들었다.
그다음은 XP를 익히기 전과 후의 제 변화를 한 문장의 요약한 내용입니다.
최선을 다했는데 성과가 나지 않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모호하게 할 만큼만 해 놓고 남 탓이나 환경 탓을 하고 있었다.
TDD와 XP를 통해 배운 바를 압축한 제 표현인 '직면'은 어쩌면 저에게는 '과학' 이전에 '과학적 태도'를 익혀준 지식들입니다. 독후감 쓰다가 삼천포로 빠졌는데, 그래도 제 삶에 굉장히 긍정적인 영향을 준 Kent Beck에게 고마움을 표합니다.
그의 사이트가 있다는 사실도 모르다가 최근에 우연히 발견했는데, 한글로 쓴 글을 번역해서 보고 댓글을 남기는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받은 일이 있는데요. 사이트의 배너를 보고 나서 그가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독후감이 길어질 듯하여 이후 이야기는 다음 글로 넘깁니다.
주석
[1] 럼즈펠드의 분류에 따르면 '안다는 것을 모르는 것'에 해당하죠. 당시에 그랬는데 이렇게 기록해 두고 다시 지적 자극을 받을 때 지난 영감을 꺼내어 보면 점차 알아갈 수 있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