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차리는 독서의 시작
박구용 철학 교수님이 쓴 <빛의 혁명과 반혁명 사이>의 머리말에서 인상적인 내용을 인용하고 그에 따른 생각을 담습니다.
<월말김어준>을 장기간 구독하고 있기 때문에 박구용 교수님의 철학 이야기는 익숙한 편입니다.
'철학'이란 단어는 서양에서 철학을 뜻하는 philosophy를 정확하게 번역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단어의 뜻과 상관없이 철학을 현대인들이 이해하기 쉽게 풀어보면 지식의 총괄 체계, 즉 학문 그 자체를 의미합니다. 유럽 대학을 가보면 공학이나 특수목적 대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학문 분야는 다 철학부입니다. 철학이 많은 학문의 출발점이라는 뜻이죠. 그렇게 철학에서 시작한 학문이 점점 뻗어가서 새로운 연구 영역이나 새로운 지식 체계를 갖추면 그때부터는 독립된 분과가 됩니다.
철학에 대한 명쾌한 정의입니다.
한편, 철학은 관심 분야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마흔 즈음 지인이 저에게 지나치게 철학적이라고 말한 이후에 ‘철학적으로 보인다는 게 뭘까?’라는 의문이 저에게 남아 있었던 듯합니다. 그가 저를 '철학적'이라고 말한 것도 태도에 대한 평가이거나 제가 말하는 방식에 대한 그의 느낌을 담은 말이였습니다. 제가 철학자를 인용하거나 철학이란 학문에 대해 말한 것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마흔이 지난 다음부터는 조금 변화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도올 선생의 중용을 다룬 책을 읽기도 했고, 제 내면은 물론 다른 사람들의 내면에 대해 관찰하고 토론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중에 결정적으로 2021년부터 최봉영 선생님과 인연이 닿아 묻따풀(묻고 따지고 푸는 행위)을 시작했습니다.
어느덧 4년이 지났고, 다음 문장을 볼 때 적어도 저에게 철학은 묻따풀과 거의 같은 말처럼 느껴졌습니다.
철학은 기초 학문이자 모든 학문의 방법론을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유튜브 추천으로 본 영상에서 본 '학문 방법론'이란 말도 떠오릅니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면 머리말에 <월말김어준> 박구용 교수님 강의에서도 들었던 듯한 내용이 눈에 들어옵니다.
부엉이는 밤을 새워가며 인류의 스승들이 남긴 고전을 파고드는 철학자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헤겔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헤겔은 처음으로 진리와 시대를 연결한 철학자입니다. 이전에 그 어떤 철학자도 진리를 시대와 연결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란 시대를 초월한다고 생각해 온 것입니다. 그러니 밤을 새워 아버지가 남긴 진리를 습득하는 것이 철학이었습니다. 하지만 헤겔은 이제 진리가 시대-특징적 epoche-specific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철학은 시대를 사상의 이름으로 포착하라고 말합니다. 철학이 사상의 이름으로 포착해서 해석이나 해명 또는 비판해야 할 대상이 바로 사건입니다. 따라서 헤겔은 사건이 끝날 때를 기다리라고 주문합니다. 헤겔에 따르면 진리는 더 이상 철학자가 책상 위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으로 진리와 시대를 연결한 철학자 헤겔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름은 많이 들어본 사람인데, 그의 책을 읽어본 일은 없습니다.
흥미롭게도 마지막 문장은 제 직업인 소프트웨어 분야의 진리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이 될 듯합니다. 소프트웨어에 대한 진리도 현장과 릴리즈에서 찾아야 한다는 게 제 경험적 사실입니다.
이 책을 읽은 시점을 지나 글을 쓸 때는 이제 막 <추측보다는 실험: 현실에 입각한 경험주의>를 쓴 직후인지라 릴리즈와 연관시킨 부분이 무리가 아님을 확인합니다. 경험주의와 릴리즈에 따른 학습과 가설 검증을 중요시하는 것은 확실히 관련이 있는 듯합니다.
이어지는 내용은 헤겔의 사상에 이어 박구용 교수님의 철학에 대한 정의로 이어집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언뜻 합리적인 것 같지만 이해할 수 없는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고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나는 철학이 그런 의문을 풀 수 있는 꽤 중요한 열쇠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런 현상들의 근저를 파헤쳐보면 조금 다르게 볼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시대 특징적이라고 했으니 구체적인 사건을 해석하거나 해명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사상과 개념에 대응시키는 일이라고 합니다.
철학이란 결국 시대를 품고 있는 사건을 사상과 개념으로 포착해서 해석, 해명, 비판하는 일입니다.
저의 주업인 소프트웨어 설계와 개발 업무에 대응시켜 보면 마치 설계 원칙이나 패턴을 찾는 일과도 비슷해 보입니다
다음 말들을 읽으면 철학자들은 개념과 현실의 일대일대응을 추구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철학자들은 개념과 현실을 동일한 선상에 놓고 보아야 합니다. 세상이 왜곡되면 말도 왜곡되고, 말이 왜곡되면 세상도 왜곡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고 나서 내세웠던 구호가 '정의사회 구현'이었습니다. 그때 전두환이 말한 정의는 심각하게 왜곡된 정의였고, 그 왜곡된 '정의正義'의 '정의定義'만큼 세상도 왜곡되었습니다. '정의사회 구현'을 외친 전두환은 살인자입니다. 그러니 그에게 정의는 '살인의 정의'입니다. 전두환은 결국 살인적인 정의사회를 만들어냈습니다. 개념을 왜곡시킨다는 것은 이토록 크고 위험한 일입니다.
시대 특징적 진리를 찾으려면 시대를 이루는 시점들과 개념이 대응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 헤겔의 개념을 따르면 철학은 개념과 현실을 대응시키는 함수라 하겠습니다. 이렇게 철학을 정의하니 굉장히 흥미로운 일이라 느껴집니다.
한편, 공교롭게 <군사정권의 유산과 강력한 검언유착을 이겨낸 K-민주주의>에서 언급했던 '정의사회 구현'을 말의 왜곡의 사례로 또 만납니다. 거기에 더해 말의 왜곡이라고 하니 윤대통령 탄핵심판의 명장면인 장순욱 변호사가 변론에 등장한 '오염된 헌법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오염된 헌법의 말’은 이날 장 변호사 변론의 주요 열쇳말이었다. 공식 석상에서 헌법을 자주 거론했지만, 속으론 왜곡된 헌법 인식을 갖고 있던 윤 대통령의 모순을 꿰뚫는 표현이기도 했다. 12·3 내란사태를 일으켜 헌법을 유린하는 그 순간조차도 헌법을 수호한 것이라고 강변했던 윤 대통령을 가리켜, 장 변호사는 “아름다운 헌법의 말, 헌법의 풍경을 오염시킨 것”이라고 했다. 읊조리듯 윤 대통령이 더럽힌 헌법의 말과 풍경들을 하나하나 제시한 장 변호사는 “국민과 함께한 이 사건 탄핵 결정문에서 피청구인이 오염시킨 헌법의 말과 헌법의 풍경이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며 9분여간 이어진 변론을 끝마쳤다.
출처: 변론의 품격… 장순욱 “오염된 헌법의 말, 제자리로 돌려놓자”
인터레그넘은 <월말김어준>에서도 들었던 터라 낯설지 않습니다.
지금 현재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요? 많은 철학자들은 현재를 이른바 권력 공백의 시기, 곧 인터레그넘interregnum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직역하자면 최고 권력의 부재 혹은 공백 기간이라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라는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기 전의 시대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 이전의 시대정신이 사라졌는데, 새로운 시대정신은 아직 출현하지 않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시대정신이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굳이 따지자면 시대를 지배하는 최고의 가치가 없다는 것이며, 다른 말로 하자면 춘추전국시대처럼 모든 가치가 경쟁하거나 혹은 모든 가치가 동등하게 인정받는 다원주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다원주의는 가치의 영역이 아니라 사실의 영역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다원주의를 하나의 가치로 보면 다원주의를 반대하는 가치도 다원주의의 가치에 의해 인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속화된 입헌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원주의는 찬성하거나 반대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사실로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원주의는 가치의 영역이 아니라니, 그 사고의 엄밀함에 멋지다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 어떤 시대정신이 등장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는 것임에는 분명하지요. 이 맥락에서 보면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깃들 무렵에야 비로소 날갯짓을 시작한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시대정신은 결국 그 시대가 어느 정도 숙성한 다음, 곧 저녁 무렵에야 알 수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대정신이라는 단어를 남발하는 태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여기까지가 이 책의 머리말에서 밑줄 친 내용입니다.
(141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141. 악(惡)의 낙수 효과는 현실이고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143. 자신만의 기억을 위해 싸울 때 당신은 인간답다
144. 시각이 세상을 충실하게 표현한다는 널리 퍼진 착각
145. 나는 나로 살아야 숨통이 트인다
146. 사랑은 우릴 어디론가 데려다줄 것이다
147. 우리는 실제 세상이 아니라 뇌가 보여주는 것을 인식한다
148. 내가 가지고 다니는 것들이 곧 나를 이야기한다
150. 준비가 아니라 나를 알고, 나를 믿고, 해 나가는 것
151. 뇌가 추측을 최대한 동원해서 정보를 더 크게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