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과 함께 배우기
아이가 묻따풀 한자 160 공부하는 것을 옆에서 돕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보리 국어사전에서 병 고치는 풀 약藥이 들어간 낱말을 찾는데, '약포지'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자를 헤아려 뜻을 유추할 수 있었지만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단어였습니다.
그 뒤에 아들과 나눈 대화에서 내면의 밀당이 느껴졌습니다. 아이와의 밀당을 인지한 덕분에 제 고집과 더불어 마찰이 빚어지는 상황을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마침 이에 대한 기록을 꺼내어 정리하고 싶었습니다. 시작은 3년 전인 2022년에 쓴 <항해하듯 아이와 밀당하기>인 듯합니다. 당시 제 인식과 밀당 소재는 다음 그림에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이번 상황도 그림으로 묘사해 봅니다. 수직선으로 대응시킨 것에 오해의 소지는 있지만 대강의 의미만 표현하기로 합니다. 아이는 약포지를 고수하고 싶어 했고, 저는 요즘에는 안 쓰이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마찰을 일으키는 대신 구글에서 예시 이미지를 찾기로 합니다.
그랬더니 등장하는 이미지는 '제가 예상한 것'뿐 아니라 요즘에 쓰이는 약봉지 형태도 있었습니다. 아이가 재빠르게 일어나 약 봉투 안에 들어있는 증거(?)를 찾아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아이의 표정에는 승리자의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더불에 '우물 안 개구리'를 피하려던 제 의지가 아이와 실랑이를 할 때 내면을 훈련하기 좋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마 다른 성인과의 관계보다는 제가 사랑하는 동시에 보호해야 하는 두 아이가 제 내면을 훈련하고 익히기에는 더 나은 상대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추가로 <율리시스의 계약이 알려주는 타인의 말에 경청할 이유>에 썼던 교훈은 인용해 볼까요?
우리가 때로 타인의 냉정함에 기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선원들이 자신의 간청을 무시해 줄 것이라고 율리시스가 믿은 것과 같다. 우리는 자신의 이성 시스템을 믿을 수 없을 때 남의 시스템을 빌려온다. 앞의 사례에서는 환자가 윤리위원들의 이성 시스템을 빌려왔다고 할 수 있다. 위원들은 환자를 유혹한 사이렌[5]들의 감정적인 노래를 듣지 못하기 때문에, 미래의 환자를 보호하는 책임을 더 수월하게 수행할 수 있다.
다른 사람보다는 아이를 상대할 때 감정을 가라앉히고 경청하기에 훨씬 유리합니다. 최근에도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이를 깨달은 사건이 있습니다.
엄마가 사준 퀴즈 책을 보며 문제를 내던 아들에게 제가 읽었던 <오리진>을 건네어주고 대화를 나누면서 '전략'이나 '전략적 로드맵'에 대해 번쩍 하는 순간이 찾아왔던 일이 있었습니다.
전혀 다른 주제였지만 아이와 '밀당'을 통해 키운 경청하는 습관이 순간 저에게 전략적 로드맵에 대한 일깨움을 준 것이죠.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아이의 욕망이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갈피를 잡기 어려운 점이나 시장 변화를 대하는 일이나 받아들이는 내면에서는 매우 비슷하다는 점입니다.
한편, <아이디어 불패의 법칙>을 두 번째 읽으며 배우는 바대로 강력한 본능인 '자기 편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수반하는(a.k.a. 사실에 입각한) '나만의 데이터'가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국어사전과 구글링이 함께 하는 환경에서 제 본능에 마찰을 만들어 주는 아이의 자아가 유익할 때가 있는 듯합니다.
이 글을 쓰기 얼마 전에도 기록 삼아 다음 사진을 찍어 두며 '밀당에서 창발로'라는 이름을 붙인 바 있습니다. 기억이 분명하지는 않지만, 가사가 쓰인 종이는 우선 제가 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를 동력 삼아 영어 표현을 익히게 하고 싶은 욕망의 결과입니다.
그 옆의 우드 스피커는 아내가 신청한 교육의 결과로 만든 것인데, 현재는 제 핸드폰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아이가 노래를 듣고 싶을 때, 제 폰에서 노래를 고르면 아이가 만든 스피커에서 음악이 나오죠. 그리고, 오른쪽 아래에는 '환골탈태換骨奪胎'라는 한자가 출력되어 있는데, 제가 중고 서점에서 아이들에게 노출할 욕심으로 산 고사성어 책의 한 페이지입니다. 큰 아이가 우리 가족의 특성을 말하다가 그 표현을 쓰기에 순발력을 발휘해서 놓아둔 것입니다. 일종의 '게시판 효과'를 노린 것이죠. 이 장면을 두고 언젠가 그저 '밀당에서 창발로'라고 이름 붙였던 것인데, 당시의 느낌 중에 일부를 이 글에서 풀이한 듯해서 여기 기록을 남깁니다.
(32회 이후 링크만 표시합니다.)
33. 가르치려 하기 전에 먼저 아들에게 관심을 보이기
34. 결과가 아닌 과정을 보게 하고 좋은 습관 들이기
36. 정조는 왜 조祖로 끝나고, 세종은 왜 종宗으로 끝나나?
37. 아이들 영화 덕분에 배우는 Boxing day의 맥락
40. 디지털 네이티브들의 소비 훈련
41. 연기(緣起)를 이야기로 만들기
44. 일상에서 자연스러운 배움을 아이들에게 흐르게 하기
45. 두 아들에게 눈에 보이게 하는 게시판 효과 활용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