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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Dec 19. 2021

진심을 전하는 방법


아들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내가 운전하여 아들을 어딘가로 데리고 갈 때마다 뒷 좌석에 앉아 있던 아이를 향해 손을 뻗어 아이의 손을 가만히 잡아보곤 했다.

"아들, 손이 얼마나 컸나 보자."   

하며 아들의 손을 잡아볼 때마다 녀석 손은 작고 여렸으며 보드라웠다. 그 순하고 말랑말랑한 촉감이 좋아서 만져보곤 했던 아들의 손. 내 손이 작은 편인데도 아이 손 마주대어 볼 때마다 아이 손은 항상 내 손보다 작았다.

"이고, 아직도 엄마보다 작네. 언제 엄마보다 크려나."

아들의 작은 손이 성장 속도의 기준점이라도 되는 양 나는 자주 아들의 손 마주대며 아이 손이 내 손보다 커지는 날을 고대해 왔다.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고 중학생이 되면서 나와 아들 둘만이 차 안에 탄 채 이동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그렇게 아이의 손을 잡아보는 일은 멀어져 갔다. 손을 잡아보는 일이야 집에 있을 때 언제라도 할 수 있는 일이었음에도, 희한하게 차에 단 둘이 앉아(그것도 앞좌석과 뒷좌석으로) 백미러로 아들의 얼굴을 넘겨다보며 쥐어보던 그때 아들 손의 감촉, 그때 맞잡은 손길에서 느껴지던 아들과 연결되던 느낌, 그 분위기가 집에서는 도통 만들어지지 않았다.  


중학생이 된 후 어느 날, 아들이 학원을 마치고 홀로 늦은 저녁을 먹게 된 날. 맞은편에 앉아 허기를 채우 아들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니, 초등학생이었을 때 아이의 조그맣던 손이 생각났다.

"아들, 손 좀 줘봐."

배고파 죽겠는데 뜬금없는 엄마의 요구가 귀찮을 법도 했으련만, 아들은 숟가락을 쥐고 있지 않은 손을 무심히 건네주었다. 가만히 만져보니 그 손은 더 이상 말랑말랑한 작은 손이 아니었다. 두툼해지고 길어진 손가락. 제법 기운 있어 보이는 '남자'의 손이었다. 잡아 끄는 내 손을 가볍게 제지할 때 들어가는 힘. 그것은 더 이상 아들이 어린아이가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훌쩍 큰 걸까. 아빠의 외투를 오버 사이즈로 입는 아이가 손만 자라지 않았을 리 없는데도 난 자꾸 차 안에서 내 손바닥보다 작았던 아들의 손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보다. 내 손보다 커진 아들의 손을 그렇게 기다려 왔으면서 막상 현실로 마주하니 단순히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니더라. 날갯짓을 파닥이던 어린 새가 단단해진 날개를 가졌다는 사실은 더 넓은 세상으로 날아갈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어미새는 곁을 떠나보낼 준비를 언제부터 하는 것일까.


아빠는 김포공항에 가서 지하철을 타고 인천공항에 가셨다. 왜 인천공항에 가셨냐면, 아빠가 출장을 가야 해서다. 아빠는 지금쯤 비행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너고 있을 것이다. 나도 아빠와 미국에 가고 싶었지만 코로나 검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에 가는 비행기를 타지 못하고 7일을 기다려야 한다. 아~! 나도 미국에 가고 싶다.
"아빠! 해외 출장 가서 힘내세요! 나는 일주일 동안 엄마랑 동생이랑 우리 집을 잘 지키고 있을게요. 코로나 바이러스 조심하시고 안전하게 집으로 오실 거죠?"


<아빠의 해외 출장>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남천(가명)이는 더 이상 초등학교 2학년 어린아이가 아니다. 아빠의 부재 동안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아는 아홉 살이다.

남천이가 쓴 이전의 글에서 남천이와 둘만의 여행을 통해 돈독한 부자 관계를 쌓아가던 남천이 아빠의 모습을 보았었다. 다 큰 남자 어른과 앞으로 아빠보다 더 클 남자 어린이 둘만 떠난 여행은 언제나 남자 어린이에게는 특별한 추억을 남겼다. 아빠와의 추억을 가슴에 품은 아들은 아빠의 빈자리에 오래 연연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믿고 지지해주는 어른이 있다는 것. 어린이에게는 미지의 세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떨치게 해주는 원동력이다.

해외 출장길을 떠나기 전, 남천이 아빠가 "아빠가 없는 동안 네가 우리 집에서 제일 큰 남자야. 그러니까..." 운운하지 않았더라도 남천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본분을 스스로 찾을 것이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니요, 아이와 부모가 맺어온 단단한 관계에서 자연스레 키워지는 일이다.


오늘 샤워실에서 엄마가 무섭게 문을 닫고 갔다. 무서웠다. 엄마가 미웠다. 그래서 엄마가 안아줬다.
그런데 엄마 옷이 젖었다. 엄마가 에라, 모르겠다 이러고 엄마와 물장난 샤워를 했다.


엄마와 샤워를 하며 있었던 일을 쓴 목화(가명)의 글이다. 글에 쓰지 않아서 무슨 일로 엄마가 샤워실을 무섭게 닫고 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샤워실에 홀로 남겨진 아홉 살 여자 어린이의 느낌은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래도 무섭고 미운 복잡한 아이의 응어리를 녹이는 것은 엄마의 따뜻한  '포옹'이다.


자신이 젖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자식을 끌어안는 어머니. 우리 어머니들은 항상 이렇다. 상대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공감하는데 능숙한 여자 어른과 여자 어린이의 연대는 나이와 세대를 뛰어넘는다.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가 풀리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에라, 모르겠다'심정으로 서로를 끌어안는 용기가 필요하다. 더운 가슴이 맞닿아야만 알 수 있는 게 있다. 긴 변명도, 어쭙잖은 사과도 필요 없게 만드는 순간. 서로를 끌어안는 순간뿐이다.


옆에 있는 아이, 혹은 부모의 손을 가만히 잡아보기. 그리고 따뜻하게 안아 보기.

진심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뿐이다. 





대문 사진 출처 : <반짝영>님의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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