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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사랑, 진짜 사랑

by 해니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 속 애순과 금명을 보며 많이 울었다. 어째서 엄마와 딸의 이야기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나 눈물을 쏙 빠지게 할까. 솔직히 나는 이렇게 많이 울게 되는 작품을 좋아하지 않는다. 보고 나면 마음이 너무 힘들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서는 비현실적이라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숙희 씨는 나보다도 더 하이퍼리얼리즘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와 ‘박하사탕’을 좋아했던 엄마가 ‘폭싹 속았수다’를 봤다면 뭐라 말했을까?


엄마는 미디어에서 흔히 묘사하는 ‘사랑’을 믿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부부간의 알콩달콩한 모습, 주름이 자글자글한 나이에도 서로를 살뜰히 챙기고 예뻐하는 노부부, 자식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내어줄 것처럼 묘사되는 부모의 존재를 불신하는 듯했다. 하루는 여느 때처럼 소파에서 텔레비전을 보는데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가 나왔다. 할머니를 바라보는 할아버지의 눈에는 꿀이 맺혀있었고 할머니 역시 온 손길과 몸짓에 할아버지를 위함이 가득했다. 70여 년을 함께 살면서 한결같이 애정이 넘치는 건 정말 흔한 일이 아닐 것이다. 영화로 만들어서라도 이 귀한 사랑을 남기고자 한 감독의 의도에 나 또한 감화되던 찰나였다.


“저런 건 다 가짜야.”


믿기 어려운 건지, 아님 믿고 싶지 않은 건지 알 수 없는 숙희 씨의 덤덤한 말투가 감동을 비집고 들어왔다.


“에이, 진짜로 저렇게 사랑하는 분들이 있으니까 영화로도 만들어지죠.”

“흥”


콧방귀를 뀌는 숙희 씨의 표정에 옅은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살아 계셨다면 ‘내가 언제?’라며 반박했겠지만 적어도 딸인 내 눈에는 보였다. 어쩌면 마음 저 깊은 곳의 엄마는 ‘절대적인 사랑’에 대한 갈구가 숨어있는 건 아니었을까?


크고 동그란 눈에 통통한 볼을 자랑했던 어린 숙희 씨는 마냥 이쁨 받으며 자랐을 것 같지만, 들어보면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본래 음력 1월 생이었지만 한해 지나고 나서야 비슷하게 태어난 친척 남자아이의 출생신고 때 곁다리로 신고되었다고 했다. 게다가 누구의 실수인지는 몰라도 날짜마저 틀려서 엄마의 주민등록증의 생년월일은 한평생 식목일로 표기되었다. ‘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훨씬 전부터 엄마는 살림의 일부였다. 외조부모의 서울집은 지방의 친척들에게 ‘허브’와도 같은 역할을 해서 드나드는 사람이 많았고 그 뒤치다꺼리는 엄마의 몫이었다. 외할머니는 기가 세고 괄괄한 성격이었는데 완전 정반대인 소심한 엄마는 무서운 친정엄마 등쌀에 시키는 걸 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참 진절머리였는지 엄마는 다 큰 나에게 아무것도 시키지 않았다. 여느 엄마라면 딸내미한테 설거지나 빨래를 해놓으라고 할 텐데 숙희 씨는 일절 그런 말을 안 했다. 한 번은 궁금해서 물어봤다.


“엄마는 나한테 왜 살림 안 시켜요?”

“어차피 시집가면 실컷 할 텐데 뭐 하러 미리 해.”

“아니, 가서 하더라도 뭘 알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닥치면 하게 돼. 엄마는 외할머니가 너무 시켰어서 너한테는 안 그러려고 그런다 왜?”


퉁명스러웠지만 엄마 나름의 사랑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내가 유치원생일적, 나란히 지독한 감기에 걸린 나와 엄마에게 와서 ‘밥 차려라.’를 외쳤던 당신처럼 되지는 않으리라- 다짐하고 또 다짐했던 숙희 씨의 마음이었다. 엄마의 방침대로 나는 살림 0단인 채로 결혼을 했고, 그제야 처음으로 계란 프라이도 부쳐보고 빨래도 돌리게 되었다. 정말 특이한 찐사랑의 방식이다.


엄마에게 엄마의 엄마는 버거운 존재처럼 보였다. 엄마가 암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는 중에도 외할머니는 딸에게 무언가를 해주려는 존재이기보다는 받으려는 존재였다. 나이가 들 수록 어린아이처럼 고집이 세지고 말을 듣지 않는 외할머니를 더 이상 상대할 힘이 없을 때는 일부러 외면하기도 했다. 미디어에서 묘사하는 모성애 가득한 전형적인 어머니의 모습은 엄마의 현실에서는 없었다. 숙희 씨가 세상을 떠난 지 1년도 안 되었을 때 외할머니도 딸의 뒤를 따랐다. 그동안 투병하느라 고생한 딸내미, 하늘에서 좀 편히 다니게 좀 천천히 가실 것이지. 살면서 사랑도 많이 주고 그러시지.


엄마의 마음에 ‘사랑’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절대적 감정’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여건과 기질적으로 ‘쿨’한 특성, 그리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방식이 숙희 씨다웠을 뿐이다. 그런 엄마에게 ‘폭싹 속았수다’의 장르는 ‘판타지’에 가깝지 않았을까? 만약 엄마가 드라마를 봤다면 엄마가 생각하는 진짜 사랑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물어보고 싶다. 어떤 사랑을 원했었는지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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