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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수인 Sep 30. 2024

그리운 나의 아버지

4장 저녁 식사(1)






희주는 도어락 열림 버튼을 눌러 성준을 맞았다. 아가는? 홀로 들어온 성준에게 희주가 물었다. 아, 좀 힘들어 하다가 집에서 자요. 엄마가 보이는 아쉬움에 뒷머리를 긁는 성준에게 희주는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 그 무렵이 다 그렇다. 나도 무거운 배 잡고 다니느라 얼마나 고단했는지 몰라. 틈만 나면 잠들고 그랬어. 하고서는 안방에 있던 성진을 불렀다. 성진은 약간 흐트러진 모습으로 성준을 맞았다. 야, 빨리 좀 오지. 아후 삭신이야. 성준이 성진의 시선을 따라 주변에 늘어져 있는 파란 유품 정리 박스와 제상의 물건과 옷가지 등. 버려질 만한 물건들을 쳐다봤다. 멋쩍게 미안하다 하면서 손에 들고 있던 것들을 거실 어딘가에 내려 놓은 성준은 파카를 벗고 옷소매를 걷었다.


“안방에 들어오는 건 오랜만이네?”


손바닥만 한 가족 사진 액자가 다 큰 성준을 보며 새삼스러워 했다.


“저 사람이 이제상씨 아들이에요?”


“이이— 이뿐 둘 째.”


“이뻐? 남잔데, 왜 이쁘다고 그래요?”


“쟨 좀 곰살맞구 그려. 심성두 여리구.”


“아, 그럼, 자기 누나랑은 약간 스타일이 다르겠네요?”


“이잉, 겨어—.”


“왕자마마, 오셨습니까? 그동안 저희가 성심을 다 해 어마마마를 보필해드리고 있었사옵니다.”


들어오자마자 제가 사준 고가의 화장품들을 살펴보는 성준에게 윤조 에센스가 반가움을 표시했다. 야, 그거 둬. 엄마가 버리면 안 된대. 성진이 불쑥 끼어들어 성준의 손에 들린 에센스들을 얌전히 빼냈다. 그래? 나는 얼마나 남았나 보고 새로 하나 사드리려고 그랬지. 이번에 괜찮은 프로모션 또 나왔거든. 성준이 미련이라곤 한 톨도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봐. 쟤들은 뭐가 그렇게 쉬워? 누군 죽고 사는 문젠데. 언니, 오빠. 저런 인간한테 너무 상심하지 말아요. 이유야 어떻든, 우린 이제 살았잖아요. 전부 언니 덕분에!”


“그렇지. 부인, 내 그렇잖아도 곱고 가녀린 그대가 어찌 그런 묘책을 구해낸 건지 궁금하려던 차였소.”


윤조 에센스는 의외였던 자신이 쑥스러운지 머뭇거렸다.


“원래가 하늘하늘허게 가녀리구 청순한 타입일수록, 이이, 안이 꽈아악 찬 것이 찐또배기로 강단이 턱! 허구 바루 선 갱우가 있는 겨. 요 갱우가 그 갱운기지. 이이. 아마, 거 우리 희주 젊었을 적 야기 듣구 더 그러셨을 것잉데, 안 글남요?”


“그래. 자네 말이 맞네. 나도 한 번 쯤은 어마마마처럼 지혜롭고 강건한 여인이 되고 싶었어. 비록 나의 지아비께서 두려움에 떨기만 하던 나를 가련하게 보듬어 주신다 하셨으나, 어쩐지 오늘에서야 누군지 제대로 알게 된 자네와 담배 아우의 이야기에 내내 가슴이 떨렸지. 그러다가 폐하의 죽음 앞에서 나도 모르게 그만, 그런 결단이 나온 것이네.”


“완전 걸크러시였는데!”


“걸… 크러시?”


“아이, 그 여자대장부를 갖다가 요즘 애들은 걸크라쉬라 햐요. 이이.”


“참 장하시오. 부인. 내 진정으로 그대를 흠모할 것이오.”


본윤 에센스의 기분 좋은 웃음소리에 주변이 따라 웃었다. 성준은 화장대 위에 있던 홍삼 필름 하나를 까서 입에 넣더니 주위를 살피며 버릴 것이 있나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아휴, 근데 우리야 뭐 어떻게 살았다 쳐도 다른 이들은 또 난리겠어요.”


화장대 앞을 가로 막고 있던 성준이 몸을 비키자 에쎄 수가 성진을 보며 말했다. 성진은 잔뜩 꺼내 놓은 앨범이며, 교환 일기장, 손편지 등 부부가 신혼 초기 때까지 남긴 것들을 대강 다 살핀 모양이었다.


“저것을 다 버리믄 안 되는디. 저거시 다 역사여. 역사. 딸아, 딸아. 너가 생기기 전부텀 고이 내려오던 거시란 말여.”


가죽 지갑이 성진은 듣지도 못하는 말을 타이르며 나무랐다.


“아유, 저 선풍기 아재 결국 들려 나가네.”


“그려? 거쪽은 어째 또 성준이가 그른 거만 딱 발견을 혀부냐.”


날개 네 개 중에 하나가 반동가리 난, 때가 누렇게 탄 고물 선풍기는 별다른 저항 없이 성준의 손에 이끌려 나갔다. 성진은 그들을 힐끔 쳐다보다가 다시 하던 일로 눈을 돌렸다. 성준은 성진이 길게 늘어 놓은 종량제 봉투 무더기들과 파란 상자들을 피해 낡은 선풍기를 현관 앞에 내려놓았다. 가볍게 몸을 돌린 그는 ‘신발’이라 적힌 상자를 발견하고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미 박스 테이프로 여러 차례 야무지게 감긴 상자 속이 어쩐지 궁금했다.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바닥을 향했다. 역시 그 근방에 커터칼이 있었다. 칼을 주워 날을 빼낸 성준은 능숙한 솜씨로 테이프를 자르고 상자 양날개를 열었다. 신발 무덤에서 나는 쿰쿰한 냄새가 저절로 코를 씰룩거리게 만들었다.


“옴마야! 이기 와 이리 또 열려뿌노!”


“켁켁, 아, 관짝에서 나온 기분이 이런 건가 봐요. 언니들.”


“성준 오빠가 상자를 연 것이로구나.”


성준은 가장 먼저 자신을 마중 나온 할머니 신발들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눈에 걸려 든 기억이 날 듯 말 듯한 신발의 앞 코가 저 바닥 아래쪽에 깔려 있었다. 저거 뭐더라? 성준이 중얼거리며 반대편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노? 와 강새이 맨크루 자꾸 고개를 까닥까닥 해대노?”


“그러게요? 뭐지? 으악!”


성준이 자신의 홈쇼핑에서 한 때 적당한 매출을 올렸던 기능성 단화 한 짝을 집어들었다. 그는 그것을 옆으로 대충 옮겨 놓더니 아! 저거 내가 사드린 아부지 수제 구두네! 하고서는 화색을 밝혔다. 그러더니 갑자기 빠른 속도로 상자 안에 있는 신발들을 파내고 수제 구두를 길어올리기 시작했다.


“형늼!!!!! 쫌 빨리 오시지. 너무 무서웠어요. 으헝헝!”


비싼 가죽으로 만들어 때깔부터 다른 처치스 구두가 성준을 보자마자 울음을 터트렸다. 성진이 뭐하나 슬쩍 쳐다본 성준은 처치스 구두를 고이 옆에 놓고, 어질러 놓은 신발들을 마구잡이로 집어 넣어 다시 상자의 파란 날개를 닫았다. 테이프를 살살 뜯어 원상복구를 한 그는 처치스 구두를 신발장 한 켠으로 다시 옮겨 놓았다. 흐트러진 옷가지까지 완벽히 정리한 후, 성준은 이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안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아들, 인제 나 풀러야지.”


성준이 소파 옆을 지나치려던 때, 누군가 그를 불러 세웠다. 황금색 보자기에 싸인 영정사진을 잊고 있다가 발견한 성준은 아차 하는 표정으로 그를 곱게 받쳐 들었다. 소파 위에 올려 보자기를 푸는 그의 손길이 조심스럽고 또 경건했다.


“아부지, 참말로 그립고 그리운 나의 아부지. 보고자펐어라.”


“머더냐. 우덜 다 아부지헌티 절 올려야제.”


원앙 인형들이 나서서 분위기를 잡았다. 그 틈에 성준은 액자를 들고 부엌에서 밥을 차리는 희주를 물끄럼히 쳐다보았다. 좋은 냄새, 맛있는 냄새가 솔솔 흘러 나오고 있었다.


“밥 냄새 참 구수하고 좋다. 나 저 냄새 맡게 여기 어디에 잘 둬라.”


영정사진이 중후하지만 약간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 순간 성준이 몸을 일으켰다.


“아니! 형님 거기로 모시게요?”


LED TV의 만류에도 성준은 안방으로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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